윤동주·백석·현진건까지…시와 소설 따라 걷는 부암동 문학기행

시민기자 조성희

발행일 2026.06.01. 09:15

수정일 2026.06.15. 16:25

조회 2,632

복합문화공간 별뜨락으로 들어가고 있다. ©조성희
복합문화공간 별뜨락으로 들어가고 있다. ©조성희
걷기 좋은 날씨의 5월 어느 날, 서울 종로구 부암동 일대를 문학적 감수성을 느끼며 걸었다. 윤동주 시인의 이름을 품은 윤동주문학관에서 시작해, 서시 시비시인의 언덕, 복합문화공간 별뜨락을 지나 창의문에서 백석 시인의 시 <창의문외>를 떠올리고, 마지막으로 현진건 집터에서 소설 <운수 좋은 날>을 되새기는 코스였다. 걷는 내내 시 한 줄, 소설 한 대목이 발걸음 위에 포개졌다.
윤동주문학관 외관 ©조성희
윤동주문학관 외관 ©조성희

수도 가압장에서 문학관으로, 윤동주문학관

인왕산 자락 청운동에 자리한 윤동주문학관은 처음부터 문학관으로 지어진 건물이 아니다. 원래 이곳은 서울 수도국의 가압장이었다. 2005년 인근 시민아파트 11개 단지 577세대가 노후화로 철거된 뒤, 유족과 뜻있는 시민들의 힘이 모여 2010년 윤동주문학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버려졌던 공간이 기억의 공간으로 탈바꿈한 셈이다.
제2전시실, 물탱크의 지붕을 개방하여 만든 '열린 우물' ©조성희
제2전시실, 물탱크의 지붕을 개방하여 만든 '열린 우물' ©조성희
제3전시실, 영상을 보는 시민들 모습 ©조성희
제3전시실, 영상을 보는 시민들 모습 ©조성희
윤동주문학관 안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우물'이라는 주제와 마주한다. 물탱크를 활용해 만든 열린 우물 공간은 윤동주 시인의 시 <자화상> 속 우물을 시각적으로 풀어낸 것이다. <자화상>에서 시인은 우물 속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미워하고, 가엾게 여기고, 끝내 그리워한다. 절제된 언어 속에 담긴 깊은 자기 성찰은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도 끝내 우리말을 붙들었던 시인의 삶과 겹쳐져 더욱 묵직하게 다가왔다.
  • <서시>가 새겨진 시비 ©조성희
    <서시>가 새겨진 시비 ©조성희
  • <슬픈족속> 시가 새겨진 시비 뒤편 ©조성희
    <슬픈족속> 시가 새겨진 시비 뒤편 ©조성희
  • <서시>가 새겨진 시비 ©조성희
  • <슬픈족속> 시가 새겨진 시비 뒤편 ©조성희

하늘과 바람과 별이 머무는 곳, <서시> 시비와 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을 나와 인왕산 방향으로 오르면 윤동주 시인의 대표작 <서시>가 새겨진 시비를 만난다. 시비 앞에 잠시 발을 멈추면 자연스레 시의 첫 구절이 마음속에 떠오른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고자했던 시인의 다짐은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서시> 시비 뒤에는 <슬픈족속> 시도 새겨져 있으니 꼭 뒷부분까지 확인하길 바란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은 서울 밤풍경 명소다. ©조성희
윤동주 시인의 언덕은 서울 밤풍경 명소다. ©조성희
조금 더 오르면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다. 인왕산 자락에 자리한 이 언덕에 서면 서울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일제강점기, 시인이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던 시절 이 산자락을 거닐며 시상을 다듬었으리라 짐작하는 것은 지나친 상상이 아닐 것이다. 맑은 날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울 하늘은 더없이 넓고 청명하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은 낮뿐만 아니라 서울 밤풍경 명소로도 유명하다.
별뜨락 공간에서 잠시 쉬어간다. ©조성희
별뜨락 공간에서 잠시 쉬어간다. ©조성희

일상과 문화가 만나는 쉼터, 복합문화공간 별뜨락

시인의 언덕 인근에는 복합문화공간 '별뜨락'이 자리해 있다. 문학 산책 중 잠시 숨을 고르기에 좋은 공간으로, 지역 주민과 탐방객 모두가 편히 쉬어 갈 수 있는 곳이다. 윤동주문학관에서 시인의 언덕으로 이어지는 코스의 중간 거점이 되어주는 별뜨락은, 이름처럼 별빛이 담긴 뜨락 같은 고요한 분위기를 품고 있다.
창의문(彰義門) ©조성희
창의문(彰義門) ©조성희

창의문에서 떠올리는 백석의 시, 창의문외

별뜨락을 지나 내려오면 서울 성곽의 북쪽 문, 창의문(彰義門)과 마주한다.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불리는 이 문은 조선시대 사대문 중 북쪽을 지키던 문이다. 창의문 앞에 서면 자연스럽게 시인 백석의 시 '창의문외(彰義門外)'가 떠오른다.
창의문의 1900년대 모습 사진 ©조성희
창의문의 1900년대 모습 사진 ©조성희
백석 시인은 1933년 '창의문외(彰義門外)' 시를 창작했고, 1936년 시집 <사슴>에 수록했다. 창의문 밖 세검정 쪽의 풍경을 서정적으로 묘사한 이 시는, 1930년대 중반 아직 한가로운 농촌 풍경을 간직하고 있을 때의 평화로운 모습을 증언해 준다. 무이밭과 밤나무, 까치 울음소리와 붉은 수탉, 돌담 기슭의 오지항아리가 등장하는 이 시는 일제강점기 경성 변두리의 고요한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전쟁과 수탈의 시대에 시인이 포착한 그 평화로운 풍경이 지금의 창의문 앞에 겹쳐지며 묘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시인 백석(1912~1996)은 평북 정주 출신으로, 해방 후 북한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으나 지금은 토속적이고 민족적인 언어를 구사한 한국의 대표 시인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우리 말의 아름다움을 끝까지 붙들었다는 점에서 윤동주 시인과 백석 시인은 닮아 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두 시인의 시가 이 길 위에서 만나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만 같다.
현진건 집터 ©조성희
현진건 집터 ©조성희

소설 속 인력거꾼의 삶을 떠올리며, 현진건 집터

창의문에서 조금 걸으면 소설가 현진건이 살았던 집터>에 이른다. 1920~30년대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걸작으로 꼽히는 <운수 좋은 날>의 작가 현진건은 이 부근에 오랫동안 살았다. 집터 앞에 서면 소설 속 인력거꾼 김 첨지의 하루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운수 좋은 날'이라는 제목과 소설의 결말이 빚어내는 비극적 아이러니는 식민지 시대 도시 하층민의 삶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실제로 현진건 작가는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를 하던 중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 마라톤 금메달 리스트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삭제 사건으로 체포되었고, 1년간 옥살이를 했다.
현진건 집터 표지석 ©조성희
현진건 집터 표지석 ©조성희
그후 지금 표지석이 있는 현진건 집터에서 닭을 키우며 생계를 이어갔다고 하니, 일제와 끝내 타협하지 않았던 그의 굳은 지조와 함께 1943년 장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표지석 문구로 빈곤했던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제 집터 주변은 당시의 빈곤함을 느끼기 어려운 말끔한 도시 풍경과 서울의 평범한 골목으로 이어지지만, 그 땅 위에 깃들었던 이야기들은 조용히 남아 지나는 이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 ©조성희
윤동주 시인의 언덕 ©조성희

도심 속 문학 코스로 걷기 좋은 길

이번 코스는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또는 버스를 이용해 윤동주문학관에서 시작하여 서시 시비 → 시인의 언덕 → 별뜨락 → 창의문 → 현진건 집터 순으로 이어진다. 전체 거리는 길지 않아 천천히 걸으며 문학과 역사를 음미하기에 알맞다. 인왕산 자락의 오르막이 일부 포함되어 있어 바닥이 고르지 않은 구간이 있으니 편한 신발을 신고 걷는 것이 좋다.
서울 도심 속 문학의 길을 따라 걷고 있다. ©조성희
서울 도심 속 문학의 길을 따라 걷고 있다. ©조성희
시인과 소설가의 이름이 촘촘히 새겨진 이 길은 단순한 산책로가 아니다. 일제강점기라는 가혹한 시대를 온몸으로 버텨내며 우리말로 시를 쓰고 이야기를 남긴 이들의 흔적이 곳곳에 살아 있다. 봄날 서울 도심에서 가장 문학적인 하루를 보내고 싶다면, 이 길을 한 번쯤 천천히 걸어보길 권한다.

부암동 서울 도심 문학 산책

○ 코스 : 윤동주문학관 → <서시> 시비 → 윤동주 시인의 언덕 → 복합준화공간 별뜨락 → 창의문(시인 백석의 <창의문외>) → 현진건 집터
○ 교통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 → 버스 환승(1020, 7022, 7212번 등) → 윤동주문학관 하차

시민기자 조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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