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지나도 가보면 좋은 곳!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발행일 2025.03.04. 11:01
3.1절 맞아 찾아가 본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김덕출
3.1절 하면 떠오르는 인물과 위인들이 많지만 매헌 윤봉길 의사가 생각난다. 3.1절을 앞두고 서초구 양재동에 있는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을 찾아 윤봉길 의사의 일생과 그의 의미를 되새겨봤다.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은 지하철 신분당선 양재시민의숲역 1번 출구에서 3분만 걸어가면 나온다.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돌탑이다. ‘사나이 뜻을 세워 집을 나가면 공을 이루지 않고서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긴 말로 윤봉길 의사가 항일투쟁을 결심하고 중국으로 떠나며 가족들에게 남긴 편지의 첫 구절이다.
아쉽게도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의 전시실은 올해 3.1절을 앞두고 개선공사가 한창이었다. 전시실 리모델링 후 3월 3일 재개관한다. 기념관을 바라보며 왼쪽 앞마당으로 가면 무궁화꽃이 새겨진 시비가 있다.
윤봉길 의사가 지은 ‘학행’이라는 시다. 윤 의사가 15살 때인 1923년 중추절에 고향 충남 예산군 덕산 수암산 기슭의 두엄 바위에서 열린 한시대회에서 이 시로 장원을 했다. 칠언절구의 시인데 ‘불후성명사기명(不朽聲名士氣明)’으로 시작해 ‘도재학행불후성(都在學行不朽聲)’으로 끝난다. ‘불후의 그 이름, 선비의 기개를 밝히고, 그 모두가 배움의 행함에 있으니, 그 이름 영원히 빛나리라’는 뜻이다.
암담한 시대적 배경이 아니었다면 윤 의사의 손에는 폭탄이 아니라 붓이 쥐어져 있었을 것이다. 윤봉길 의사의 숭모비를 지나 왼쪽으로 조금 더 가면 윤봉길 의사의 동상이 나온다.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돌탑이다. ‘사나이 뜻을 세워 집을 나가면 공을 이루지 않고서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긴 말로 윤봉길 의사가 항일투쟁을 결심하고 중국으로 떠나며 가족들에게 남긴 편지의 첫 구절이다.
아쉽게도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의 전시실은 올해 3.1절을 앞두고 개선공사가 한창이었다. 전시실 리모델링 후 3월 3일 재개관한다. 기념관을 바라보며 왼쪽 앞마당으로 가면 무궁화꽃이 새겨진 시비가 있다.
윤봉길 의사가 지은 ‘학행’이라는 시다. 윤 의사가 15살 때인 1923년 중추절에 고향 충남 예산군 덕산 수암산 기슭의 두엄 바위에서 열린 한시대회에서 이 시로 장원을 했다. 칠언절구의 시인데 ‘불후성명사기명(不朽聲名士氣明)’으로 시작해 ‘도재학행불후성(都在學行不朽聲)’으로 끝난다. ‘불후의 그 이름, 선비의 기개를 밝히고, 그 모두가 배움의 행함에 있으니, 그 이름 영원히 빛나리라’는 뜻이다.
암담한 시대적 배경이 아니었다면 윤 의사의 손에는 폭탄이 아니라 붓이 쥐어져 있었을 것이다. 윤봉길 의사의 숭모비를 지나 왼쪽으로 조금 더 가면 윤봉길 의사의 동상이 나온다.

매헌윤봉길기념관 외관 ©김덕출
윤봉길 의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야 성공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상하이로 향했다. 혼자 칭다오(靑島)로 건너가 그곳에서 일하면서 돈을 모으고 독립운동 할 곳을 물색하기도 했다. 결국 1931년 8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는 중국에서의 뜻있는 일을 위해 생활을 구상했다. 또한 국제활동을 위해 상하이 영어학교에서 영어 공부도 병행했다. 그리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인 김구 선생을 찾아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다짐했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거점이 중국으로 옮겨지면서 항일운동은 주로 중국, 만주에서 진행됐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지원과 안내를 받아 조직적으로 움직였는데, 윤봉길도 그 가운데 한 분이다.
그는 중국에서의 뜻있는 일을 위해 생활을 구상했다. 또한 국제활동을 위해 상하이 영어학교에서 영어 공부도 병행했다. 그리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인 김구 선생을 찾아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다짐했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거점이 중국으로 옮겨지면서 항일운동은 주로 중국, 만주에서 진행됐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지원과 안내를 받아 조직적으로 움직였는데, 윤봉길도 그 가운데 한 분이다.

윤봉길 의사의 뜻이 담긴 ‘장부출가생불환’ 돌탑 ©김덕출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거사
일본은 1932년 자작극인 일본 승려 살해사건을 이유로 상하이사변을 일으켰고, 시라카와 대장의 지휘하에 전쟁에서 승리했다. 이에 일본군은 일왕의 생일축일인 천장절과 전쟁 승리 두 가지를 축하하는 기념식을 갖기로 했다.
윤봉길은 이 기회를 택하여 기념식장에서 거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김구를 비롯한 지도자들과 협의해 거사를 구상했다.
윤봉길은 야채상으로 가장하여 미리 기념식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고, 기념식장에서 투척할 수류탄도 제조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은 폭탄을 감추고 식장에 입장했다.
그리고 식이 한참 진행 중일 때 식장으로 다가가 수류탄을 던졌다. 이 폭발로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테이지는 즉사했고 식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932년 11월 20일 일본으로 옮겨져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수감됐다. 그리고 그해 12월 19일 총살형을 받고 2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이 사건은 중국 등 세계에 알려졌고,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는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격찬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윤봉길은 이 기회를 택하여 기념식장에서 거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김구를 비롯한 지도자들과 협의해 거사를 구상했다.
윤봉길은 야채상으로 가장하여 미리 기념식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고, 기념식장에서 투척할 수류탄도 제조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은 폭탄을 감추고 식장에 입장했다.
그리고 식이 한참 진행 중일 때 식장으로 다가가 수류탄을 던졌다. 이 폭발로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테이지는 즉사했고 식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932년 11월 20일 일본으로 옮겨져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수감됐다. 그리고 그해 12월 19일 총살형을 받고 2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이 사건은 중국 등 세계에 알려졌고,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는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격찬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윤봉길의사의 동상 ©김덕출
흔히 윤봉길 의사에 대해 물으면 도시락 폭탄 정도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출생부터 거사를 하게 된 과정까지를 알게 되면 윤봉길 의사의 나라사랑을 더 깊이 알게 된다. 윤봉길 의사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커다란 울림을 주는 위대한 분이다.
3.1절을 맞아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을 찾아보는 것도 매우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3.1절을 맞아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을 찾아보는 것도 매우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 위치 : 서울시 서초구 매헌로 99
○ 교통 : 지하철 신분당선 매헌역 5번 출구에서 직진 100m
○ 운영일시 : 하절기(3월~10월) 10:00~18:00, 동절기(11월~2월) 10:00~17:00, 기념관 외부 시설 상시운영
○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및 추석 당일
○ 관람료 : 무료
○ 누리집
○ 문의 : 02-578-3388
○ 교통 : 지하철 신분당선 매헌역 5번 출구에서 직진 100m
○ 운영일시 : 하절기(3월~10월) 10:00~18:00, 동절기(11월~2월) 10:00~17:00, 기념관 외부 시설 상시운영
○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및 추석 당일
○ 관람료 : 무료
○ 누리집
○ 문의 : 02-578-3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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