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지에서 고종칭경기념비전까지, 역사의 시공간을 거닐다

시민기자 이선미

발행일 2023.06.22. 10:58

수정일 2023.06.22. 17:33

조회 510

일요일 오전,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이미 기온이 높았다. 열기를 피해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그늘에 모인 시민들이 시간여행에 나섰다. 2016년부터 2019년까지 발굴조사를 통해 2020년 사적으로 지정된 의정부지 현장공개투어에 신청한 시민들이 권기봉 작가와 함께 떠나보는 여행이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의정부지 600년의 시공간을 거닐다’ 여정이 시작되었다. ⓒ이선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의정부지 600년의 시공간을 거닐다’ 여정이 시작되었다. ⓒ이선미

출발 전에 개략적인 안내가 이어졌다. 우리가 만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조선시대에 이조가 있던 곳이었다. 광화문교보빌딩과 KT빌딩 역시 호조와 한성부 등 주요 기관 자리였다. 세종대로 너머도 마찬가지였다. 삼군부와 예조, 병조, 형조 등이 지금의 세종문화회관과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있었다. 육조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육조거리'라고 불렸던 이 일대는 일제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형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 가운데 조선시대 최고 의결기관이었던 의정부가 있었다.
시민들이 의정부지 발굴조사 현장으로 이동하고 있다.ⓒ이선미
시민들이 의정부지 발굴조사 현장으로 이동하고 있다.ⓒ이선미

길을 건너 의정부지 발굴조사 현장으로 향했다. 현장 가림벽에 의정부에 대한 안내가 있어서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경국대전에 기록된 의정부의 역할은 총백관(모든 관료를 통솔함), 평서정(나라의 업무를 총괄함), 이음양(음양의 조화를 이루도록 함), 경방국(국왕과 함께 나라를 다스림) 하는 것으로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국정 전반을 논하고 다스리던 국가 최고 행정기관이자 의결기관이었다. 지금으로 하면 국무총리실과 부총리실이 합해진 기구라고 할 수 있다.
의정부지 발굴조사 현장 가림벽에 의정부의 역할이 분명하게 적혀 있다. ⓒ이선미
의정부지 발굴조사 현장 가림벽에 의정부의 역할이 분명하게 적혀 있다. ⓒ이선미

발굴 현장에 들어서자 건물들의 자취가 한눈에 들어왔다. 각 건물이 있었던 곳에 표지를 만들어 건물의 위치를 어느 정도 유추해볼 수 있었다. 안전을 위해 헬멧을 쓰고 현장으로 내려섰다. 인솔한 작가는 필요한 자료를 단톡방에 올려서 다 같이 자료를 보며 설명을 들었다. 비어 있는 공간이 한결 구체적인 그림으로 다가왔다. 
고종 때 중건된 의정부는 정본당과 석획당, 협선당이 자리하고 연못과 정자 등이 들어서 있었다. ⓒ이선미 / 아래는 고궁박물관에 전시 중인 의정부 모형 ⓒ서울시
고종 때 중건된 의정부는 정본당과 석획당, 협선당이 자리하고 연못과 정자 등이 들어서 있었다. ⓒ이선미 / 아래는 고궁박물관에 전시 중인 의정부 모형 ⓒ서울시
각 건물의 이름을 크게 표시해 위치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선미
각 건물의 이름을 크게 표시해 위치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선미

의정부는 당상대청인 정본당을 중심으로 석획당과 협선당이 날개처럼 이어지고, 그 앞으로는 큰 마당과 월대가 있었다고 한다. 월대는 조선시대에 궁궐 전각 같은 중요한 건물 앞에 설치한 널찍한 돌 기단으로 여기서 중요한 행사가 치러졌다. 경복궁과 창덕궁 등 궁궐과 종묘의 정전, 성균관 명륜당 등에서 월대를 볼 수 있는데, 궁궐의 월대는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었다. 창덕궁은 2020년 월대 복원 공사를 마무리했고, 덕수궁과 경복궁 월대 복원 공사도 진행되는 중이다. 그런 월대가 있었다는 건 의정부의 위상을 보여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참가자들이 단톡방에 공유된 자료를 보며 작가의 설명을 듣고 있다. ⓒ이선미
참가자들이 단톡방에 공유된 자료를 보며 작가의 설명을 듣고 있다. ⓒ이선미

임진왜란으로 훼손된 의정부는 고종 때 중건됐다. 그런데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의정부가 내각으로 바뀌며 경복궁 수정전으로 옮겨가고, 의정부에는 내부가 옮겨와 새로운 청사를 올렸다. 외행랑과 내삼문을 헐고 붉은 벽돌로 지은 이 서양식 2층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경기도청으로 쓰였다. 한국전쟁으로 의정부 건물들이 대부분 소실된 와중에도 살아남았던 이 건물은 내무부 치안본부와 서울시경 별관 등으로 쓰이다가 1990년 철거됐다.

그늘 없는 현장에서 햇빛을 그대로 쬐다 보니 꽤 따가웠다. 양산을 펼쳐든 참여자들도 있었지만 다들 집중력이 대단했다. 의정부지에서는 관청만이 아니라 민가 터와 우물 등도 확인되었다. 또한 정본당 동쪽에서 연못과 정자의 흔적도 드러났다.
정본당 뒤쪽으로 연못과 정자도 있었다. ⓒ이선미
정본당 뒤쪽으로 연못과 정자도 있었다. ⓒ이선미

발굴현장을 뒤로 하고 중부학당 터로 향했다. 중학동 어느 한 건물 입구 화단에 ‘중부학당 터’라는 표지석이 보였다. ‘학당’은 조선시대에 도성 안 유생을 가르치던 교육기관으로 애초에는 동서남북, 중부까지 5부 학당이 세워졌다가 북부학당이 없어지고 4부학당이 남았다. 갑오개혁 때 4부학당이 폐지되면서 잊혔는데 지금의 건물을 세우는 과정에서 발굴된 적심석 등으로 중부학당 터를 유추하게 되었다고 한다.
중학동 어느 빌딩 앞, ‘중부학당 터’ 표지석과 적심석이 놓여 있다. ⓒ이선미
중학동 어느 빌딩 앞, ‘중부학당 터’ 표지석과 적심석이 놓여 있다. ⓒ이선미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강화유리 바닥 아래쪽으로 건물을 지을 때 주초가 놓일 자리에 땅을 파고 잡석을 넣어 다져올린 적심석이 들여다 보였다. 중부학당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나 ‘중학동’이라는 지명이나 ‘중학천’ 등에 그 자취가 남아 있다. 
참여자들이 강화유리 아래로 보이는 중부학당의 흔적, 적심석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선미
참여자들이 강화유리 아래로 보이는 중부학당의 흔적, 적심석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선미

지금은 물길이 덮여 도로가 된 중학천을 따라 걸었다. 사복시 터 표석을 지나 중학천 유구를 만났다. 가히 물의 도시라고 할 만큼 물길이 많았던 한양을 상상해 보았다. 중학천을 염두에 두고 조성한 물길을 따라 종로로 나서니 복잡한 도심 속 거리에 혜정교 표석이 홀로 고즈넉했다. 저만큼 고종칭경기념비전이 보였다.
‘중부학당’에서 이름을 얻은 ‘중학천’ 유구가 도심 한복판에 남아 있다. ⓒ이선미
‘중부학당’에서 이름을 얻은 ‘중학천’ 유구가 도심 한복판에 남아 있다. ⓒ이선미
중학천 물길을 염두에 두고 조성한 물길을 따라 걸었다. ⓒ이선미
중학천 물길을 염두에 두고 조성한 물길을 따라 걸었다. ⓒ이선미

칭경기념비는 고종이 보위에 오른 지 40년이 되던 해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과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 칭호를 사용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1398년 도평의사사로 시작된 의정부는 조선왕조 오백 년 동안 한자리에 있었다. 의정부지 유구를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한 여정은 고종칭경비에서 마무리됐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조선의 건국부터 대한제국 때까지를 걸어본 셈이었다. 조선왕조에 대한 여러 평가가 있지만 세계사에서도 500여 년 지속된 왕조가 흔하지는 않다. 그 왕조를 지탱하고 이끌어온 철학과 수고가 이날 걸은 길에도 배어 있었다. 
의정부지 현장부터 고종칭경비까지 600년의 시공간을 거닐어 보았다. ⓒ이선미
의정부지 현장부터 고종칭경비까지 600년의 시공간을 거닐어 보았다. ⓒ이선미

의정부지는 유구 보호시설을 만들고 공원을 조성해 도심 속 역사문화공간으로 개방될 예정이라고 한다. 광화문 월대 복원과 함께 조선왕조 오백 년의 자취를 더욱 가까이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시민기자 이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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