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면 의외로 많아요! 우리 주변 6.25 기념비

시민기자 정인선

발행일 2021.06.03. 13:00

수정일 2021.06.03. 15:06

조회 2,090

 ‘워커 대장 전사지’ 금속 표지판
‘워커 대장 전사지’ 금속 표지판 ⓒ정인선

월튼 해리스 워커 대장 전사지

우연히 표지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 자리는 1950년 12월 23일 오전 10시 45분 경 주한 미 8군 초대 사령관 월튼 해리스 워커 대장이 전사한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596-5번지이다'라는 첫 문장이었다. 

이날 워커 장군은 중서부전선의 미 24사단 19연대와 영국군 27여단을 둘러보기 위해 의정부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서울 도봉동을 지날 때 반대편에서 내려오던 한국군 트럭과 충돌해 어이없이 운명했다. 그의 나이 61세였다. 이곳은 6·25 동족상잔의 비극을 조명하는 장소로 영구 보존되었다. 그러자 잠시 잊고 지내던 6.25, 호국보훈이란 단어들이 머릿속에 남아서 집에 와서 검색해 보았다. 

워커 장군(1889~1950)은 6·25전쟁 때 일사천리로 밀고 내려온 북한군을 낙동강 방어선(워커 라인)에서 목숨을 걸고 막아낸 장군이다. 포항 영천 대구 창녕 마산 통영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이 뚫렸으면 북한군이 부산까지 내려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워커 장군은 미 8군사령부를 대구에 그대로 두면서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한국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스탠드 오어 다이(Stand or Die), 사수하느냐 죽느냐 뿐’이라며 부하들을 독려해 방어선을 지켜냈다. 우리나라의 엄청난 은인인데 사유지라 추모비를 세울 수 없어 한전에 협조를 구해 전신주에라도 표지판을 부착한 것이라고 한다. 워커 장군은 1983년 대한민국 국방부에 의해 6.25 전쟁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친 4대 명장으로 선정되었다. 미군이 M41 워커 불독이란 경전차를 개발했는데,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워커힐호텔, 워커 전투화가 어원도 워커 장군이다.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미 해군대위, 고 윌리엄 해밀턴 쇼(한국이름 서위렴)를 추모하는 추모공원인 은평평화공원 ⓒ정인선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미 해군대위, 고 윌리엄 해밀턴 쇼(한국이름 서위렴)를 추모하는 추모공원인 은평평화공원 ⓒ정인선

은평평화공원

'은평평화공원'은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미 해군대위 고 윌리엄 해밀턴 쇼(한국이름 서위렴)를 추모하는 추모공원이다. 해군은 쇼 대위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한국 사랑을 기리기 위해 인천상륙작전 60주년을 맞는 2010년 6월 현충일에 건립했다. 
미국 해군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한국명 서위렴) 동상과 비석
미국 해군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한국명 서위렴) 동상과 비석 ⓒ정인선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는 1950년 9월 22일 은평구 녹번리 전투 중 매복해 있던 적의 총탄을 맞고 사망해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선교사로 활동했던 윌리엄 얼 쇼의 외아들인 쇼 대위는 1922년 평양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한국에서 지내 한국어가 유창하고 한국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진해 해군사관학교에서 민간인 교관으로 함정운용술을 가르치고 한국해안경비대 창설에 기여하는 등 대한민국 국군 태동기를 이끌었다. 이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자 고민 끝에 제2의 조국인 한국의 평화와 자유를 지키고자 해군에 재입대 했다. 쇼 대위는 맥아더 장군을 보좌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나서도 미 해병대 5연대 소속으로 서울탈환작전에 참가해 김포반도, 해산성, 신촌 노고산 전투 등에서 승리했으나 녹번리에서 후방 정찰에 나섰다가 적의 기관총 사격을 맞고 28세의 젊은 나이에 전사했다.
연희동 해병대104고지전적비
연희동 해병대104고지전적비 ⓒ정인선

연희 104고지 전적지

연희 104고지 전적지는 서울미래유산이자 현충시설이다. 연희동 주택가의 오르막길을 올라가니 작은 공원이 있다. 1982년에 세워진 ‘해병대104고지전적비’가 위엄 있고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다. 6.25 전쟁 때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갔던 국군과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 후, 북한군은 서울 사수의 최후 방어선으로 연희동 104고지 일대를 강력하게 방어를 했다. 이때 한강을 건너 온 한국 해병대가 1950년 9월 공격을 해서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격퇴시키고 104고지를 탈환함으로써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했으며 이로 인하여 수도 서울 탈환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곳에서 3일 주, 야간의 혈전으로 1개 중대 중 26명만이 생존하는 처절한 전투 끝에 이 고지를 탈환했다. 수도 서울 탈환 작전에서 전사 젊은 해병대원들의 명복을 길이 추모하기 위해 서대문구 연희동 궁동산의 끝자락에 이 비를 건립했다.
해병대 수도탈환 작전 내용 알림판
해병대 수도탈환 작전 내용 알림판 ⓒ정인선

대한민국 해병대는 상륙작전을 주 임무로 1949년 4월 15일 창설됐다. 해병대는 창설된 지 1년 뒤인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하자 장항, 군산, 이리 지구에 투입되어 적의 남진을 지연시켰고 통영상륙 작전에서는‘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영원한 애칭을 얻는 등 연전연승했다. 인천을 방어하던 북한군을 격파하고 인천 시가지와 해안을 확보함으로써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 작전을 실시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고 수도 서울을 조기에 탈환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해안을 확보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미군은 9월 18일부터 서울 방향으로 진격하여 11일 동안 작전을 전개한 끝에 서울 외곽 지역과 시가지에서 저항하던 북한군을 무찌르고 서울을 탈환했다.
해병대가 104고지룰 탈환하고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는 사진
해병대가 104고지룰 탈환하고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는 사진 ⓒ정인선

104고지의 총성이 시작된 지 1주일 뒤 수도탈환기념식에 개선부대로 참석한 해병대 청년들의 사진이 있었다. 인민군은 최후까지 이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어린 병사들이 끝까지 저항하게 했다. 하지만 서울을 탈환하려는 아군의 의지는 그보다 강했다. 아군 전사자 178명, 인민군 사망자 1750명의 치열한 전투였다. 한미 해병이 안산 일대의 주요한 봉우리들을 모두 점령한 것은 9월 25일이다. 그리고 마침내 9월 27일, 한국 해병대 청년들이 중앙청에 걸려 있던 인공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달았다. 전적비 옆에 있는 ‘해병대 수도 서울 탈환 작전’ 안내판에는 그 사진이 중앙에 가장 크게 게시되어 있다. 

필자가 자주 탑승하는 버스정류장 이름이 ‘연희104고지앞’이다. 궁금해하면서도 그냥 지나치기만 하다가 6월이 되니 문득 가보고 싶어졌다. 찾아서 올라가서 사진과 지도를 꼼꼼히 읽으며 머릿속에만 있는 6·25 전쟁이 마음으로 내려왔다. 사진의 군인들이 보고 있으니까 얼마나 애써서 목숨을 내 놓고 지킨 자리에 서 있네 하면서 마음이 먹먹해졌다. 직접 둘러본 동네는 평화로워 보였다. 누군가가 목숨을 바쳐 지켜준 서울이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주변에 전적비가 있으면 둘러보면서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겠다.

■ ‘워커 대장 전사지’ 금속 표지판

○ 위치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596-5번지

■ 은평평화공원

○ 위치 : 서울특별시 은평구 서오릉로 47 (6호선 역촌역 4번 출구 44m)

■ 연희104고지전적비

○ 위치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산100-1

시민기자 정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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