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만 입양아의 주치의이자 어머니
admin
발행일 2010.07.28. 00:00
봉사하는 소아과 의사를 꿈꾸던 소녀 … 어린 시절, 병으로 두 명의 동생을 잃었고 저 역시 몸이 약했거든요. 아픈 동생들을 위해 의사선생님이 왕진오시거나, 몸이 아파 병원에 갔을 때 이름이 불릴 때면 어린 마음에도 ‘이제 저 분이 살려주시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소아과의사를 꿈꾸었죠. 어려운 아이들을 돌보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장로이셨던 외할아버지와 목사이신 친할아버지께서 전도여행을 다녀오실 때마다 집없는 아이들을 데리고 오시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에요. 그 덕분에 어려서부터 수많은 언니, 동생들과 함께 지내면서 어울려 사는 삶을 직접 배울 수 있었어요. 가장 낮은 곳에 선 의사, ‘나는야, 평생 레지던트’ … 소아 사망률을 낮추는 의사가 되겠다는 의지로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자마자 동부시립병원 소아과에서 근무를 시작했어요. 이후 1963년 소아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고 시립병원과 홀트아동병원 등 상황도, 근무지도 바뀌었지만, 매번 버려진 아이들이 찾아드는 새로운 상황의 연속이었기에 하루하루 레지던트라는 마음으로 살아왔어요. 전 만년 레지던트인 셈이에요. 처음 동부시립병원으로 발령받고 보니 넘쳐나는 환자들이 몇 달 째 초진 때 처방받은 약을 먹고 있더군요. 햇병아리 의사 주제에 감히 “양심상 차마 이런 진료는 못하겠다!”고 선언했죠. 그랬더니 제게 단독처방을 내릴 수 있게 해주셨어요. 어렵던 시절인지라 약을 충분히 공급해줄 수는 없었지만, 환자의 증상에 맞게 처방해준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어요. 홀트 병원과의 인연 …
그러던 중 홀트 병원에 6개월간 실습을 나가게 되었죠. 홀트 병원은 당시 국내 여느 아동병원들과는 의료환경 면에서 사뭇 달랐어요. 전염병 어린이들은 격리 수용하고 아이들을 전문적으로 케어하는 모습을 보니, 기저귀 채울 고무줄이 없어 링거액 줄로 묶는 바람에 연한 피부가 새까맣게 타들어가던 동부시립병원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리더군요. 다시 시립아동병원에 파견되었는데요. 첫 출근하던 겨울날, 4세 미만인 2300명 아기들이 병상 80개에 수용된 방안에 연탄난로가 피워져 연탄가스가 가득하고, 기저귀 지린내가 진동하고 있었죠. 이게 과연 병원인지 고아원인지, 다 같은 어린 생명인데, 이 아이들은 왜 이렇게 버려져야 하나 싶어 눈물이 핑 돌더군요. 사망진단서를 13장 쓰던 날을 떠올리며 … 그만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어요. 어느 월요일 사망진단서를 13장 쓰던 날, ‘도대체 내가 의사인가? 시체처리사인가?’라는 의구심이 들더군요. 하지만 제 손길을 기다리는 아이들을 보며 보살피면 살릴 수 있는 생명들인데 싶어 다시 마음을 다잡았지요. 차마 할 수 없는 일도 많이 했어요. 한번은 폐렴에 걸린 아이를 안고 찾아온 부모에게 “아이를 복도에 버리라”고 했어요. ‘기아’로 발견되면 어떻게든 치료를 받을 수 있으니 아이를 병원에 버리고 나중에 영아원에서 찾아가도록 권유한 것이죠. 급히 수술을 받아야만 하는 아이는 미8군 병원에서 수술을 받도록 주선한 일도 있었죠. 열악한 의료 환경 탓에 당시 미숙아들은 대부분 영양실조였는데 그걸 막아야겠다는 생각에 월급날이면 달걀을 100알씩 사서 아이들의 이유식에 조금이라도 섞어 먹이곤 했지요. 물론 늘 턱없이 모자랐구요. 의사만이 아니라 사회복지가, 심지어 경찰관, 재판관 노릇도 해야 했죠. 국제 거지와 불평 많은 여자라는 두 개의 별명 …
물론 내 선에서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해서라도 아이들을 살리겠다!’고 마음먹었죠. 당시 정부와 국내기관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기에, 직접 아이들을 안아들고 각국 정부와 입양관련 기관들에 우리의 상황과 아이의 상태를 영어로 설명하며 도움을 요청하고 다녔어요. 룩셈부르크, 노르웨이, 미국, 스위스 등에 아이들의 수술과 치료에 필요한 의료 기부를 호소하고 다녔죠. 덕분에 '국제거지'라는 웃지 못할 별명까지 얻기도 했습니다. 이런 저의 행보가 모두에게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었어요. 군사정권 시절에는 ‘제일 불평 많은 여자’로 낙인찍혀 민정반에 소환되어 3일 동안 집중조사를 받았던 적도 있고, “외국 사람들에게 손벌리지 말라.”, “열악한 국내 고아의 현실을 밝히지 말라”는 외압도 많이 받았지요. 하지만 일평생 억척같이 일하며 말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대변해 호소하고 길러낼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입양의 빛과 그림자, 그곳에서 발견한 희망 … 입양된 아이들이 각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고국을 찾거나, 자신이 받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다시 입양을 실천하는 것을 볼 때만큼 감동적인 순간이 또 있을까요. 하지만 구석에서 입양의 상처를 떠올리며 흐느끼는 이들을 보면 끌어안고 울고 싶어집니다. 아픈 상처와 고통을 이겨내고 당당하게 자란 그들을 보면 한없이 감사하면서도, ‘오늘이 있기까지 자신의 노력과 부모의 정성이 얼마나 축적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지거든요. 그런데 그 아픔과 고통의 시간을 견뎌낸 이들의 인생을 ‘해외 입양은 곧 고아 수출’이라는 식으로 매도하는 걸 보면 서글퍼집니다. 한 생명이라도 구해야 하기에 절박한 심정으로 해외입양을 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외면하고 무작정 비판만 하는 것은 그 아이들이 죽는 것을 손놓고 지켜보라는 것밖에 안되거든요. 그래서 저는 고국을 찾아오는 수잔 콕스 등 수많은 입양아들에게 “이제 너희들의 목소리를 내라. 난 그저 도와주는 사람에 불과하기에, 너희들의 깊고 정직한 마음을 알지 못한다. 너희들의 정직한 목소리를 듣고서 국내 입양이 늘고, 해외 입양이 줄어들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게 또 어디 있겠느냐?”하고 당부하곤 합니다. 무조건 비판만 하기보다는 입양을 둘러싼 우리의 부정적 인식부터 개선하고 직접 실천하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더 이상 부모 없는 아이들이 없는 세상을 꿈꾸며 …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목숨이 붙어있는 한, 다른 사람 신세 안지고 남을 돕다가 조용히 떠나는 것이죠. 좀 더 큰 바람이라면 부모 없는 아이들이 없는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덜할 뿐, 요즘에도 버려지는 아이들이 참 많습니다. 제 아이만 소중히 여기지 말고 우리 사회의 부모 없는 아이들도 소중히 보듬어 안아주어야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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