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을 서로 바꾸어서 가르친다
김별아(소설가)
발행일 2014.03.07. 00:00
역자이교지(易子而敎之)
--맹자 |
[서울톡톡] 한동안 젊은 엄마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엄마표'라 불리는 학습 지도 방법이 화제가 되었다. 엄마가 직접 만음식이나 물건뿐이 아니라 자식을 가르치는 일까지도 남에게 맡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조기교육 열풍으로 몸살을 앓는 영어 '공부'를 시키는데 '엄마표'가 도입되었고, 교재 선정과 학습법에 대한 정보를 나누는 인터넷 카페들도 여럿 생겨났다.
'엄마표'의 애초 의도는 좋다. 부담스러운 사교육비를 줄이고 내 아이의 수준에 맞는 차별화된 교육을 실행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능력 있고 적극적인 엄마가 되기에 아무래도 모자란, 그리고 그들보다 조금 앞서 시행착오 속에 아이를 길렀던 나로서는 그 방법이 최선의 것인가에 대해 얼마간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자식은 마지막 욕망이다. 스스로 성공해 남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로부터 인간의 평범한 욕망을 끊었다고 자부하는 도인들까지도 자식이란 존재에서 쉽게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자식들은 내가 했던 일을 다 해야 한다. 적어도 나만큼은 살아주어야 한다. 또한 내가 하지 못했던 일까지도 해야 한다. 자식들만큼은 나처럼 후회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다 보니 자식이라는 분신(分身) 앞에서 부모의 어리석은 욕심은 줄어들 줄 모르고 커지기만 한다.
아이를 직접 가르쳐본 사람은 알 것이다.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정답이 뻔한 문제를 번번이 틀리는, 아무리 가르쳐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어쩌면 부모의 노고에는 아랑곳없이 배울 생각마저 없어 보이는 자식을 볼 때 마치 세상 최고의 부정의를 목도한 듯 피가 거꾸로 치솟는 느낌을.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오고 잘못하면 주먹까지 뻗칠 지경이다. 사실 그 모두가 아이 때문이 아니다. 나 때문이다. 아이의 삶과 내 삶이 별개의 것이라는 사실, 어이없이 폭발하는 분노는 내 욕망을 자식에게 투사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기 때문이다.
맹자와 제자 공손추의 대화에서 비롯된 '역자이교지'라는 말은 자기 자식은 부모가 가르치기 어려우므로 자식을 남과 서로 바꾸어서 가르친다는 뜻이다. 공자가 자기 아들 이(鯉)를 직접 가르치지 않았던 사실에 대해 공손추가 그 이유를 물으니, 맹자는 대답했다.
"형편이 그렇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사람은 반드시 바르게 하라고 가르친다. 바르게 하라고 가르쳐도 그대로 실행하지 않으면 자연 노여움이 따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도리어 부자간의 정리를 상하게 된다. 자식이 속으로 생각하기를, 아버지는 나보고 바른 일을 하라고 가르치지만 아버지도 역시 바르게는 못 하고 있다 한다. 이것은 부자가 다 같이 정리를 상하게 하는 것이 된다. 그러기에 옛날 사람들은 자식을 바꾸어 가르쳤다. 결국 부모가 직접 자기 자식을 가르치지 않는다. 부자 사이에는 잘못한다고 책하지 않는 법이다. 잘못한다고 책하게 되면 서로 정리가 멀어지게 된다. 정리가 멀어지면 그보다 더 불행한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
'엄마표'가 위험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2천여 년 전에도 있었다. 자식은 부모의 말을 듣고 배우는 게 아니라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는 말이 통렬하다. 내가 가르치려는 의도를 버릴 때, 아이는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배울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아이가 고3이 되어 맞은 새 학기에, 여느 엄마와 하등 다를 바 없는 미련한 내게 하는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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