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길에 만난 도봉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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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8.12.23. 00:00

수정일 2008.12.23. 00:00

조회 1,629



시민기자 이승철

산이 좋아 산에 오르지만 산을 오르는 길에서는 자연을 만나고 사람도 만난다. 사시사철 어느 때 올라도 산은 변함이 없지만 아무리 똑같은 산길을 따라 올라도 표정은 항상 다른 것이 산이다. 변함없이 의연한 모습이지만 철따라 날마다 다른 표정을 보여주는 산이야말로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무한한 신비요 축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을 만나는 것 못지않게 사람을 만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오를 때마다 다른 것은 마찬가지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산을 오르지만 그 사람들의 모습은 물론 생각과 행동도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은 자연과 더불어 교감하는 인간들이 자연을 배우고, 스스로의 삶을 뒤돌아보고 성찰하며 인생을 연마하는 수도장의 역할도 하는 것이다.

며칠 전 서울 도봉구에 있는 도봉산 등산길에서는 우리 조상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귀한 사적지를 만났다. 산자락 등산로 입구 오른편에 있는 도봉서원이 바로 그곳이다. 도봉서원은 도봉구가 지정한 도봉 10대 명소 중의 하나로 조선시대 유학의 대가였던 정암 조광조 선생과 우암 송시열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정암 조광조선생은 조선 중종임금 시대의 유학자이자 개혁정치가로 강력한 개혁정치와 중종반정 공신들에 대한 훈작삭제를 주장하다가 훈구정치세력에 밀려 뜻을 펴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다. 또 우암 송시열 선생은 주자학의 대가로 이황의 이원론적인 이기호발설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을 지지하여 일원론적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예론에도 밝았다. 정치의 격변기 때마다 화양동에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였으나 귀양길에서 돌아오다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 도봉서원은 1573년 조광조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는 후학들에 의해 창건되어 위패가 봉안 되었다. 이때 왕으로부터 도봉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그 후 1696년에는 이곳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우암 송시열이 함께 배향되었고, 영조 51년에 임금의 친필사액을 받았다. 1871년(고종 8년)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리게 되었고 위패는 땅에 묻었다.

1903년에 다시 단이 설치되어 향사를 봉행해오다가 6·25전쟁으로 중단되었으며, 1972년 도봉서원재건위원회에 의해 복원되었다. 지금도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서울에도 이런 서원이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참 귀한 사적지네요.” 마침 서원을 둘러보고 있던 6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신사는 도봉산 산자락에 남아있는 서원이 여간 놀랍고 신기한 모습이 아닌 듯 주변까지 찬찬히 둘러보고 있었다. 서원 앞에는 자세히 기록된 안내판이 서 있고, 담장 옆에는 노은 남궁업선생의 기념비와 수백 년 된 느티나무보호수 한 그루가 도봉서원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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