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량'의 이순신 장군, 태어난 곳은 서울 어디일까?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3.12.27. 16:05

수정일 2024.02.20. 15:19

조회 7,316

사심 가득한 역사 이야기 타이틀
이순신 장군을 떠올릴 때 바다와 연관된 모습을 생각하지만, 서울과도 깊은 인연이 있다.
이순신 장군을 떠올릴 때 바다와 연관된 모습을 생각하지만, 서울과도 깊은 인연이 있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61) 이순신 장군과 서울

2023년 12월 영화 ‘노량 - 죽음의 바다’가 개봉되었다. 2014년의 명량, 2022년의 한산에 이어 이순신 장군의 해전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이다.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는 해전에서 불패의 신화를 이룬 탁월한 업적으로 인하여 주로 바다와 연관된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서울과도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1545년 서울에서 태어나다

이순신(李舜臣:1545~1598)은 1545년 음력 3월 8일 한성부 건천동(현재의 서울 중구 인현동 1가 31-2번지)에서 덕수(德水) 이씨 아버지 이정(李情:1511~1583)과 어머니 초계(草溪) 변씨(卞氏:1515~1597)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서울 건천동(乾川洞:마른내동)에서 출생하였다.

위로는 희신(羲臣), 요신(堯臣)의 두 형과 동생으로는 우신(禹臣)이 있다. 희신, 요신, 순신, 우신의 이름은 중국 역대의 성군인 복희(伏羲), 요, 순, 우 임금의 신하가 되리라는 뜻을 담고 있다. 탄생일은 양력으로 4월 28일이 되는데, 1967년 1월 6일 공보부가 4월 28일을 ‘이충무공 탄신기념일’로 고시했고 1973년 3월 30일 법정기념일로 정했다. 2013년에는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70년에는 이은상 작사, 김동진 작고의 ‘충무공의 노래’도 만들어져 기념일을 전후로 널리 애창되었다.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 TV에서 영상과 함께 울려 퍼지던 ‘보라!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그의 모습/ 거북선 거느리고 호령하는 그의 위풍’으로 시작하는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노래 마지막 부분은 ‘충무공 오 충무공/ 민족의 태양이여/충무공 오 충무공 역사의 면류관이여/일생을 오직 한 길 정의에 살던/그이시다 나라를 구하려고/피를 뿌리신 그이시다.’라고 하여 장군에 대한 찬양으로 맺고 있다.

현재 이순신의 탄생과 관련된 안내판은 두 군데에 있다. 1985년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중구 초동 명보아트홀 앞에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 표지석을 세웠고, 2017년에는 이곳에서 골목으로 들어간 곳, 생가의 위치와 가까운 인현동 31-2번지 신도빌딩 앞‘충무공 이순신 생가터’라는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서울시에서는 생가 주변에 이순신 장군 기념관 건립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 사업이 완료되면 이순신과 서울의 인연은 널리 기억이 될 것이다.
신도빌딩 앞에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라는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신도빌딩 앞에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라는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이순신 하면 항상 떠오르는 인물 류성룡(柳成龍:1542~1607)도 이순신 생가와 가까운 현재의 남산 한옥마을 근처에 살았다. 충무로역 1번 출구 앞 인도에는 ‘류성룡 집터’라는 표지석이 보인다.

류성룡의 『징비록』에는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추천하면서,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담력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유난히 능숙한 사람이다.”고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이순신을 지켜보았음을 회고한 것이다.

1597년 1월 정유재란이 시작되고, 그해 2월 이순신은 선조의 왕명을 거역했다는 이유로, 의금부(義禁府)에서 조사를 받고 전옥서(典獄署)에 투옥되었다. 다행히 4월 1일 감옥에서 풀려났고, 백의종군에 나서게 된다. 이순신이 석방된 후에도 제일 먼저 찾은 사람이 류성룡이었다.

1597년 4월 2일의 『난중일기』에는 “저물 무렵에 성 안으로 들어가 류정승(류성룡)과 이야기를 하다가 닭이 울어서야 헤어져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순신이 조사를 받던 의금부와 투옥된 감옥 전옥서는 현재의 종각역 근처에 위치했다. 종각역 1번 출구 앞에는, ‘의금부터’, 5번 출구 앞에는 ‘전옥서터’ 표지석과 안내판을 세워 놓았다. 종각역 1번 출구에는 이곳이 이순신의 백의종군로의 출발임을 알리는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 출발지’ 안내판을 2019년에 설치하였다.

훈련원에서 실시된 무과 시험

이순신은 28세 되던 1572년(선조 5)에 이르러 처음으로 무과에 응시하였지만, 낙방하고 말았다. 훈련원(訓鍊院)에서 실시된 말타기 실기 시험에서 말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다. 1795년(정조 20)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의 행록(行錄)에는 “임신년(1572년) 훈련원 별과 시험에서 말을 달리다 떨어져 왼쪽 다리가 골절되었다. 보던 사람들은 공이 이미 죽었는가 했는데, 공이 한쪽 다리로 일어났다. 버드나무 가지를 잘라 껍질을 벗겨서 다리를 감쌌다. 과거 시험장의 사람들이 장하게 여겼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큰 부상 속에서도 끝까지 완주했지만 결과는 낙방이었다. 이순신은 재수 끝에 1576년 무과에 합격하였는데, 병과 4등으로 전체 12등에 해당하는 성적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식년 문과의 경우에는 33명을 선발하고, 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으로 순위를 정하였다. 갑과 1등이 수석인 장원이었다. 무과는 28명을 선발하였는데, 갑과 3명, 을과 5명, 병과 20명을 최종 선발하였다. 문과 합격자에게는 합격증서로 홍패(紅牌)를, 무과 합격자에게는 백패(白牌)를 수여하였다. 

무과 시험을 주관한 훈련원은 무예를 훈련하고, 병서와 전진(戰陣)을 교습시키는 일을 맡았던 기관이다. 조선 건국 후 태조가 내린 즉위 교서에는 “강무(講武)하는 법은 이를 관장하는 훈련관(訓鍊觀)에서 『무경칠서(武經七書)』와 사어(射御)의 기술을 강습시켜, 그 통달한 경서의 많고 적은 것과 기술의 정하고 거친 것으로써 그 높고 낮은 등급을 정하여, 합격한 사람 33명을 출신패(出身牌)를 주고, 명단을 병조(兵曹)로 보내어 선발할 것이다.”고 하여, 훈련원은 훈련관(訓鍊觀)이라는 이름으로 출범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동대문 인근에 도심 속 아담한 공원 '훈련원공원'이 있다.
동대문 인근에 도심 속 아담한 공원 '훈련원공원'이 있다.

훈련관처음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인근에 자리했으며, 태종 때 현재의 국립의료원(중구 을지로5가)쪽으로 옮겨졌고, 세조 때인 1466년(세조 12)에는 훈련원으로 개칭하면서 제도적 기틀을 정비였다. 이순신은 무과 합격 직후에 임시직으로 훈련원 봉사를 맡았다가, 함경도 삼수(三水) 인근에 있는 동구비보(童仇非堡)의 권관(權管)으로 발령을 받고 서울을 떠나게 된다.

조선시대 내내 중요 군사 시설 기능을 유지했던 훈련원은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면서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이후 훈련원 자리에는 경성사범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농업협동조합중앙회, 헌법재판소 등이 들어섰으며, 현재 이곳은 훈련원공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광화문광장을 지키고 있는 이순신장군 동상
광화문광장을 지키고 있는 이순신장군 동상

이순신을 기억하게 하는 광화문광장

이순신은 1604녀(서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책록되었기는 했지만, 오랜 기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는 못하였다. 이순신의 공적은 효종 대 이후 재평가되었다. 효종은 1659년(효종 10) 승지 이경억(李慶億)에게 “아침에 이순신의 비문을 보았는데,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순절한 일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는 하늘이 우리나라를 중흥시키기 위하여 이런 훌륭한 장수를 탄생시킨 것이다.”라 하였고, 숙종은 이순신을 모신 사당인 현충사(顯忠祠)를 장군의 연고지가 있는 아산에 세우도록 했다.

1706년(숙종 3년)에 아산 지방 유생들이 이순신의 숭고한 호국 정신과 애민 정신을 기리자는 뜻에서 사당을 세울 것을 조정에 건의하였고, 이듬해인 1707년 왕명으로 아산에 있는 이순신의 생가에 ‘현충사(顯忠祠)’를 세웠다. 현판은 숙종이 직접 내렸는데, 장군 사후 110년 만이었다.

이순신을 특별히 존경했던 왕은 정조였다. 정조는 이순신을 영의정에 추증했고, 이순신의 신도비를 세우고,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직접 지었다. 정조는 이순신의 전집 편찬을 명하기도 하였다. 장군의 일기와 장계, 서간첩, 『임진장초(壬辰狀草)』 와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이 쓴 행록 등을 모아 완성한 것이 『이충무공전서』이다.

이순신이 쓴 임진일기, 계사일기, 갑오일기 등 전쟁 중에 쓴 일기는 이때 ‘난중일기’로 명명되었다. 역대 대통령 중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이순신 존숭 작업에 가장 큰 힘을 기울였다. 1968년 4월 27일 현재의 세종로 광화문광장에 세운 ‘충무공 이순신 동상’이 대표적이다. 구국의 영웅 이순신을 널리 기억하게 하는 작업은 최근에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광화문광장 지하에 있는 충무공이야기 전시관
광화문광장 지하에 있는 충무공이야기 전시관

2022년 8월 새롭게 개장한 광화문광장에는 장군의 동상 옆에 명량대첩의 승전을 떠올리는 ‘명량분수’를 설치했으며, 분수 물줄기 양쪽에 승전비를 세웠다. 승전비에는 승전의 기록과 함께 장군의 어록을 적어 놓았다. 이순신과 인연이 있는 서울의 역사 현장들을 찾아보면서, 임진왜란이라는 최대의 국난을 극복한 장군의 활약, 그리고 그 신념과 정신까지 떠올려 보기를 바란다.
광화문광장에 세워진 이순신장군의 승선비와 명량분수.
광화문광장에 세워진 이순신장군의 승선비와 명량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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