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이 깊어가는 계절에 만난 '딜쿠샤(DILKUSHA)'
발행일 2021.05.12. 12:50
2021년 3월 1일 개관한 ‘딜쿠샤’는 사전예약제로 한정된 인원만 관람할 수 있다. 3월 초 개관 소식을 접하고 공공예약시스템에 접속해보니, 3월 한 달 모든 날짜의 예약이 완료된 것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서울시민기자의 기사들로 위안을 삼았다.
딜쿠샤의 기원이 된 권율 장군의 은행나무가 초록 옷을 갈아입어 더욱 멋진 날, 이 아쉬움을 대신하기로 했다. 4월에 이어 5월에도 사전예약은 이미 다 완료된 상태다. 딜쿠샤에 문의한 결과, 개관 초와 달리 선착순 현장접수가 가능하다는 기쁜 답변을 얻었다. 선착순이라 조금 서둘렀다. 나무 둘레 6.8m, 높이 24m 거대한 권율 장군 은행나무가 신록을 흔들며 쉬엄쉬엄 오라는 듯했다. 다행히 두 번째로 현장예약자 명단에 이름을 적고 관람에 앞서 딜쿠샤 외관부터 살펴보았다.
생소한 단어인 딜쿠샤(Dilkusha)는 산스크리스트(Sanskrit)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 (Palace of Heart’s Delight)’이란 뜻이다. 딜쿠샤는 일제강점기인 1924년 앨버트 테일러와 메리 테일러 부부가 은행나무골(행촌동)에 짓고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추방당하기까지 살았던 곳이다. 1917년 신혼집을 오늘날 서대문구 충정로7길 부근에 마련한 테일러 부부는 한양도성을 따라 산책하다가 권율 장군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노거수가 있는 땅을 발견한다. 은행나무에 매료된 메리는 이곳에 집을 짓고 싶어 했고, 땅 주인이 사망하자 앨버트는 그 부지를 매입,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짓는다. 서울에도 기쁜 마음의 궁전, ‘딜쿠샤(DILKUSHA)’가 생긴 것이다.
2년 후(1919년) 앨버트 테일러는 연합통신(Associated Press)으로부터 고종의 장례식 취재 요청을 받는다. 당시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세브란스 병원에서 태어났고(1919년 2월 28일), 병원에 있는 아내와 아들을 보러 갔던 앨버트는 우연히 침대 속에 감춰져 있던 독립선언서를 발견한다. 즉시 3・1운동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 앨버트는 독립선언서와 함께 동생 윌리엄에게 전달한다. 윌리엄은 이 기사를 구두 뒤축에 숨겨 일본 도쿄로 가서 전신으로 미국에 보냈고, 이 기사는 1919년 3월 13일자 뉴욕타임스에 “서울. 3월 12일(Associated Press) - 한국의 독립선언서에 2천만 민족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정의와 인도의 이름으로 말한다.”라는 내용으로 보도된다. 이외에도 앨버트는 연합통신원으로 제암리 학살사건, 독립운동가의 재판 등을 취재한다.
1941년 미국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당신 식민지 조선에 거주하던 적국 국민들을 수용소에 구금한다. 앨버트도 1941년 12월 수용소에 구금되고 이듬해 5월 풀려났지만 조선총독부에 의해 추방, 미국으로 돌아간다. 항상 한국을 그리워하며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던 앨버트는 1948년 6월 심장마비로 갑자기 숨을 거두고, 아내 메리는 남편 유해와 함께 1948년 9월 인천으로 입국한다. 앨버트의 유해를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치한 메리는 한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딜쿠샤를 방문한다.
2005년 테일러 부부의 아들 브루스의 의뢰를 받은 서일대학교 김익상 교수는 2개월여 끝에 딜쿠샤를 찾았다. 2006년 브루스는 아내(조이스 핍스)와 딸(제니퍼 테일러)과 함께 방문하여 이곳이 자신이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딜쿠샤임을 확인한다. 60여 년 만의 귀향이었다. 2015년 브루스가 세상을 떠나고 딸 제니퍼 테일러는 2년에 걸쳐 테일러 가문의 자료를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한다. 이로써 테일러 일가의 '기쁜 마음의 궁전’에서 우리는 세대와 국경을 넘어선 이방인의 훈훈한 한국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딜쿠샤의 기원이 된 권율 장군의 은행나무가 초록 옷을 갈아입어 더욱 멋진 날, 이 아쉬움을 대신하기로 했다. 4월에 이어 5월에도 사전예약은 이미 다 완료된 상태다. 딜쿠샤에 문의한 결과, 개관 초와 달리 선착순 현장접수가 가능하다는 기쁜 답변을 얻었다. 선착순이라 조금 서둘렀다. 나무 둘레 6.8m, 높이 24m 거대한 권율 장군 은행나무가 신록을 흔들며 쉬엄쉬엄 오라는 듯했다. 다행히 두 번째로 현장예약자 명단에 이름을 적고 관람에 앞서 딜쿠샤 외관부터 살펴보았다.
생소한 단어인 딜쿠샤(Dilkusha)는 산스크리스트(Sanskrit)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 (Palace of Heart’s Delight)’이란 뜻이다. 딜쿠샤는 일제강점기인 1924년 앨버트 테일러와 메리 테일러 부부가 은행나무골(행촌동)에 짓고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추방당하기까지 살았던 곳이다. 1917년 신혼집을 오늘날 서대문구 충정로7길 부근에 마련한 테일러 부부는 한양도성을 따라 산책하다가 권율 장군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노거수가 있는 땅을 발견한다. 은행나무에 매료된 메리는 이곳에 집을 짓고 싶어 했고, 땅 주인이 사망하자 앨버트는 그 부지를 매입,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짓는다. 서울에도 기쁜 마음의 궁전, ‘딜쿠샤(DILKUSHA)’가 생긴 것이다.
2년 후(1919년) 앨버트 테일러는 연합통신(Associated Press)으로부터 고종의 장례식 취재 요청을 받는다. 당시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세브란스 병원에서 태어났고(1919년 2월 28일), 병원에 있는 아내와 아들을 보러 갔던 앨버트는 우연히 침대 속에 감춰져 있던 독립선언서를 발견한다. 즉시 3・1운동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 앨버트는 독립선언서와 함께 동생 윌리엄에게 전달한다. 윌리엄은 이 기사를 구두 뒤축에 숨겨 일본 도쿄로 가서 전신으로 미국에 보냈고, 이 기사는 1919년 3월 13일자 뉴욕타임스에 “서울. 3월 12일(Associated Press) - 한국의 독립선언서에 2천만 민족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정의와 인도의 이름으로 말한다.”라는 내용으로 보도된다. 이외에도 앨버트는 연합통신원으로 제암리 학살사건, 독립운동가의 재판 등을 취재한다.
1941년 미국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당신 식민지 조선에 거주하던 적국 국민들을 수용소에 구금한다. 앨버트도 1941년 12월 수용소에 구금되고 이듬해 5월 풀려났지만 조선총독부에 의해 추방, 미국으로 돌아간다. 항상 한국을 그리워하며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던 앨버트는 1948년 6월 심장마비로 갑자기 숨을 거두고, 아내 메리는 남편 유해와 함께 1948년 9월 인천으로 입국한다. 앨버트의 유해를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치한 메리는 한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딜쿠샤를 방문한다.
2005년 테일러 부부의 아들 브루스의 의뢰를 받은 서일대학교 김익상 교수는 2개월여 끝에 딜쿠샤를 찾았다. 2006년 브루스는 아내(조이스 핍스)와 딸(제니퍼 테일러)과 함께 방문하여 이곳이 자신이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딜쿠샤임을 확인한다. 60여 년 만의 귀향이었다. 2015년 브루스가 세상을 떠나고 딸 제니퍼 테일러는 2년에 걸쳐 테일러 가문의 자료를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한다. 이로써 테일러 일가의 '기쁜 마음의 궁전’에서 우리는 세대와 국경을 넘어선 이방인의 훈훈한 한국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기상박물관 부근의 한양도성. 딜쿠샤를 짓기 전 테일러 부부의 신혼집은 서대문구 충정로7길 부근이었다. 한양도성 성곽을 따라 산책하던 테일러 부부는 한양도성 인근 은행나무가 있는 땅을 발견한 곳에 딜쿠샤를 짓는다 ⓒ양인억

월암공원을 지나 딜쿠샤로 가는 길에 만난 '홍난파 가옥'. <고향의 봄>을 작곡한 홍난파가 6년간 지낸 이유로 홍난파 가옥으로 불린다. 좌측 ‘101’동 건물과 인왕산 사이의 초록은 테일러 부부를 매료시킨 은행나무다 ⓒ양인억

사직터널과 근처의 인왕산에서 알 수 있듯이 딜쿠샤는 한양이 한눈에 들여다 보이는 높은 곳에 있다. 사전예약을 놓친 시민들이 현장 예약 후 관람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양인억

“딜쿠샤 1923 시편 127편 1절 (DILKUSHA 1923 PSALM CXXVII. I)”이라고 새겨져 있는 딜쿠샤 정초석. 일제강점기 테일러 부부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출국 당하고, 반백년이 지난 후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이 집을 다시 찾을 수 있었던 이유는 명확히 남아 있는 이 정초석 덕분이다 ⓒ양인억

딜쿠샤 우측(동쪽) 언덕길에서 바라본 딜쿠샤 모습. 건립 당시 앞쪽(남향)에는 시야를 가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한강은 물론 관악산 등 서울 주변의 모든 것이 한눈에 보이는 조망 맛집이었다 ⓒ양인억

딜쿠샤는 동서로 긴 평면 구조다. 좌측 끝에 보이는 은행나무는 권율 장군이 자신의 집터에 직접 심었다고 전해지며, 동네 이름 ‘행촌동'은 이 은행나무에서 비롯되었다. 한양도성을 산책하던 테일러 부부는 이 은행나무에 매료되어 이곳에 딜쿠샤를 지었다 ⓒ양인억

현재 딜쿠샤 출입은 임시로 1층 동쪽에서 한다. 아직 진행 중인 남측 외부 복원 공사와 연결 도로 공사가 완료되면 남쪽에서 가능하다고 한다. 사진은 동쪽 출입구에서 거실로 들어설 때의 모습이다 ⓒ양인억

“일층에 있는 너비 14m의 넓은 거실은 그 앞에 있는 포치에 가려서 많이 어두웠기 때문에 벽에 황금빛이 도는 노란색 페인트를 칠했다.” 메리가 <호박목걸이>에 언급한 1층 거실에 관한 글에서 왜 노란색 페인트로 거실이 장식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양인억

거실에 마련된 계단은 2층으로 연결된다. 밝은 노란색 페인트 덕분에 계단 및 목조 가구가 눈에 잘 들어온다 ⓒ양인억

계단에 마련된 종은 딜쿠샤에서 일하는 하인들을 부르기 위한 용도로 설치했다 ⓒ양인억

각각의 딜쿠샤 공간은 난방을 위한 벽난로가 거의 모든 곳에 설치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독특한 모양의 벽난로가 인상적인 1층 동쪽 공간 ⓒ양인억

1층 동쪽 방. 벽면 한쪽에는 딜쿠샤 복원 과정과 관련된 전시물이 설치되어 있다 ⓒ양인억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딜쿠샤 벽면은 바로 ‘공동벽 쌓기’에 그 비밀이 있다. 사진은 1층 동쪽 방에서 그 비밀을 알려 주는 전시물을 실제 딜쿠샤 외부 벽면과 비교를 위해 합쳐 보았다 ⓒ양인억

서쪽 방 창문을 통해 본 1층 포치. 남쪽 복원 공사가 속히 마무리되어 테일러 가족처럼 남쪽에서 딜쿠샤를 바라보고 메인 현관으로 입장하는 날을 기대해 본다 ⓒ양인억

메리가 "딜쿠샤의 심장부”라고 언급한 2층 거실은 1층 거실보다 채광이 훨씬 좋다. 벽난로 주변에 전시된 유물을 한 관람객이 살펴보고 있다 ⓒ양인억

2층 거실은 테일러 부부가 대부분의 여가 시간을 보낸 공간이다. 남쪽으로 난 대형 유리창을 통해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양인억

‘티겔 테라스’라 불린 2층 거실 앞의 포치. "날씨가 더울 때는 대나무 기둥 위로 자라난 등나무 덩굴이 테라스 전체에 그늘을 드리우고, 하늘색으로 칠한 방도 마치 계곡처럼 초록빛이 되었다.” 메리의 글처럼 복원된 딜쿠샤 2층 포치에 등나무 그늘을 기대해 본다. 현재는 배경으로 보이는 은행나무가 그 아쉬움을 대신하고 있다 ⓒ양인억

영상실로 운영되고 있는 2층 서쪽의 한 공간. 연합통신(AP) 통신원으로 활약했던 앨버트 테일러는 '한국인들이 독립을 선언하다’는 기사를 1919년 3월 13일 뉴욕타임스 실었다. 테일러 덕분에 우리의 독립운동은 국제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양인억

테일러 일가와 딜쿠샤가 세상에 알려지고 우리 시민 곁으로 오게 된 데에는 여러 분의 노고와 헌신이 있었다. 곳곳의 딜쿠샤 공간에 소개된 많은 유물 및 자료는 테일러의 손녀 제니퍼 테일러(사진 속 여성)의 기증의 결과이다 ⓒ양인억
■ 딜쿠샤 전시관
○ 위치 : 서울 종로구 사직로 2길 17
○ 운영시간 : 09:00-18:00
○ 휴무일 : 매주 월요일
○ 입장료 : 무료
○ 관람신청: 온라인 사전 예약 및 선착순 현장접수
○ 서울공공서비스예약 페이지 바로가기
○ 운영 방식 : 사전 예약에 의한 해설관람 (일 4회, 매회 15~20명 이내)
○ 해설관람시간 : 1일 4회
- 1차 10:00~11:00, 2차 13:30~14:30, 3차 15:00~16:00, 4차 16:30~17:30
- 수요일 16:30~17:30 영어해설 가능(외국인 대상)
- 목요일 16:30~17:30 중국어해설 가능(외국인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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