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떠나올 때 제 운명을 예감했습니다

admin

발행일 2010.07.21. 00:00

수정일 2010.07.21. 00:00

조회 2,977

이번 주 '인터뷰 서울인'에서는 독도 문제 전문가로 잘 알려진 호사카 유지 세종대 독도종합연구소 소장을 만났다. 일본에서 태어나 도쿄대 금속공학부를 졸업한 호사카 유지 교수는 ‘명성황후시해사건’을 접하고 한국으로 건너온 이후 왜곡된 한일 근대사와 정치적 사안들을 깊이 있게 연구해왔다. 2003년 귀화한 후에도 일본으로 인해 뒤틀린 한일정치사의 진실을 바로 잡기 위해 저서 집필 및 열린 강연, 학술세미나 등으로 연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는 행동하는 지성인이자 자랑스러운 한국인이었다.

엘리트 출신 공학도가 한일 정치사를 공부하게 된 계기는 …

원래 역사를 좋아했어요.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아야 했고, 수학을 곧잘 했기 때문에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해야 했지만요. 대학에 진학한 후 곧 제 적성과 전공이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웃음). 그래서 대학시절 내내 전공과 상관없는 역사, 철학, 종교 등 인문학서적을 가까이 했지요.

한국에 대한 관심은 …

어렸을 때부터 역도산, 장훈 같은 재일한국인 선수나 연예인들을 좋아했거든요. 그들은 여느 일본인들과는 달랐어요. 정말 뛰어났죠! 그런데 어느 날 책을 읽다가 가네다 마사이치, 마쯔자카 게이코, 사이죠 히데끼 등도 한국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거예요. 이들은 제게 슈퍼맨이나 선녀처럼 느껴졌어요. 또 다른 영향은 한국어의 매력 때문인데요. 청소년 시절 일본에서 라디오를 켜면 한국 방송의 주파수가 잡혔거든요. 방송을 진행하는 여성 아나운서의 한국어 소리가 제 귀에 음악처럼 아름답게 들리는 거예요. 그때부터 한국어에 흠뻑 빠져 교재를 구해 재일교포 친구들과 공부했지요. 요즘으로 치면 일본 한류팬 1세대인 셈이죠. 그래서인지 제 주변에 재일교포 친구들이 많았어요. 그러다보니 그 친구들이 창씨개명 때문에 자신의 한국 이름을 쓰지 못하는 현실을 알게 되고, 차별당하는 실상을 알게 되었지요.

보다 구체적으로 한일 관계를 공부하게 된 계기는 …

대학생 때 일본의 한 시사 잡지에서 명성황후시해사건을 알게 된 후 너무 큰 충격을 받았어요. ‘한 나라의 국모를 죽이다니… 만약 한국인이 일본 천황의 모친을 죽인다면 일본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까?’라는 생각에 뒤틀린 한일관계를 바로 잡기 위해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거죠.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야 했기에 제 꿈을 곧장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다가 가업이 기울자 아버지께 허락을 구하고 한국으로 올 수 있었죠. 이건 일종의 예감 같은 건데, 사실 이미 일본을 떠나 올 때 다시 일본에 돌아갈 생각이 없었어요. 전 한국에 오게 된 게 제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본격적으로 반일문제를 연구하게 된 까닭은 …

‘개인적으로 만나는 일본 사람들은 착한데, 집단화된 일본은 왜 이토록 무자비한 침략국가가 되었는가?’ 하는 점이 늘 궁금했어요. 그 근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니 일본의 잔인한 침략성의 배후에 막부정치, 특히 오다 노부나가 같은 이들의 잔혹성이 버티고 있음을 알게 되었어요. 하지만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근본적으로 일본에는 애초에 평화사상이 없었다는 걸 알 수 있었죠. 일본의 고사기에 보면 일본 건국신화에서 신이 지상을 다스릴 때 ‘칼’을 주거든요. 이러한 칼의 정치가 천황중심주의와 결합되어 제국주의의 침략성으로 드러나게 되었다고 봐요. 또 하나의 궁금증은 ‘한국은 도대체 어떤 나라이며, 일본과의 관계는 어떠한가?’였어요. 이를 알아내기 위해 당시 일본의 지배정책이 어떻게 펼쳐졌는지 살폈죠. 일본이 펼친 한일 동화정책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니 신라시대에 일본 신화 중 아마테라스 오미가미의 난폭한 남동생인 스나노가 추방당해 고조선의 단군이 되었다는 대목이 나오는 거예요. 일본이 한일합방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신화까지 동원해가며 역사를 왜곡한 거죠.

조국의 잘못을 지적해야 하는 힘든 갈등 때문에 …

학자로서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고통스럽지 않을 수 없었죠. 하지만 고려대학교에서 정치학 석박사과정을 공부할 때 은사님이셨던 조정남 교수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하나의 이정표가 되어주었지요. “연구를 해가다보면 일본의 죄상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파하고 좌절하지 마라. 극복해 나가야 한다." 그 말씀이 제게 큰 힘이 되었고 이후 어떤 난관을 만나도 ‘절대 객관적 입장에서 보자’고 스스로 굳게 결심하게 되었죠.

또 하나의 조국 대한민국을 찾아서 …

귀화는 생각보다 제게 어려운 결정은 아니었어요. 한국은 일본이 상실한 평화, 동양적 아름다움, 정체성 등의 장점을 많이 갖고 있는 나라였고, 언제나 일본의 뿌리는 한국이라고 생각해왔기에 끌리는 느낌을 뿌리칠 수 없었지요. 오히려 일본에 돌아가는 게 후퇴라고 생각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2년 귀화 결정을 형제들에게 이야기하자 형제들이 “당분간 부모님께는 말씀드리지 말라”고 하더군요. 1년 후에 아버지께 사실을 말씀드리자 예상보다 순순히 이해하시더군요. 사실 아버지는 저 못지않게 한국을 좋아하던 분이셨어요. 어렸을 적 아버지께서 기업을 경영하고 계셨는데 어느날 서울대 교수님 한분을 만나고 돌아와 “일본사람 중에는 그만한 인격자가 없다”고 격찬하실 정도였고, 어린 시절 아버지 덕분에 한국 기업가의 연회에서 봤던 부채춤과 삼고무 등은 아직도 눈에 선해요. 제가 한국을 좋아하게 된 데는 한국에 우호적이셨던 아버지의 영향도 컸던 셈이지요.

귀화 후 한일관계 악화 …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어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일본이 원인제공자이니, 일본이 벌인 문제는 반드시 그들이 풀어야 한다는 겁니다.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한일문제를 체험하고 연구하다보니 이젠 일본이 어떻게 도발해서 사건을 전개하고 어떤 행동을 취할지 예측이 됩니다. 2005년 다께시마의 날을 제정한 것도 명백한 일본의 도발이지요. 더욱 큰 문제는 사회의 무게중심이 되어주어야 할 일본의 지식인들마저 그런 왜곡에 힘을 실어준다는 것입니다. 외무대신이던 아소 전 총리의 “창씨개명은 한국인이 원하던 것”이라는 망언에 구체적 자료를 제시해달라고 직접 전화를 걸어 잘못된 근거를 밝혀내거나, 독도 문제로 하토야마 총리를 만나고, 국내외 언론에 자발적으로 기고하는 등 적극적인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건 이런 일본의 만행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죠.

가깝고도 먼 이웃, 한일문제의 해법은 …

비단 독도문제만이 아니라 창씨개명, 신사참배, 역사교과서문제 등 일본의 역사 왜곡은 대단히 조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우리도 전문적이고 논리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이게 약한 것 같아요. 대부분 독도가 원래 우리 땅인데 우리가 왜 그 사실을 납득시킬 필요가 있냐고들 하시거든요. 그건 분명 맞는 이야기지만 이미 독도를 둘러싼 현실적 이해가 역사적으로 잘못되어 있잖아요. 그렇다면 구체적 근거를 제시해서 바로 잡아야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절대 감정적으로 대응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대응이나 폭력은 일본을 더 유리하게 만들어주는 거예요. 그건 일본의 의도에 휘말려들게 되는 것이죠.

현재 가장 큰 고민은 …

좀 동떨어진 답변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전 한국의 저출산 문제가 참 걱정스러워요. 물론 일본의 저출산 문제가 심각하긴 하지만……. 한국은 제가 좋아서 선택한 나라인데 그 나라가 나중에 인구가 없어 지도에서 사라진다면 하늘나라에서도 가슴이 아플 것 같아요. 하하!

시민기자/안혜련
gardencirc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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