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죽 먹으며 살고 있소이다"

시민기자 시민리포터 이승철

발행일 2012.08.09. 00:00

수정일 2012.08.09. 00:00

조회 3,080

[서울시 하이서울뉴스] "그분은 사법의 화신이며 우리 법조계의 큰 스승이십니다."

어느 현역 법조인이 가인 김병로 선생을 일컬었던 말이다. 초대와 2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은 청빈과 강직, 의연한 자세로 우리 사법부의 독립과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가인은 1887(고종 24)년에 전북 순창에서 사간원 정언을 지낸 아버지 김상희와 어머니 장흥고씨 사이에서 3남매 중 셋째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우리나라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원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경제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일제의 수탈과 6·25 한국전쟁으로 국토는 초토화 되었고, 백성들의 삶은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시절이었다. 공무원들의 급여도 생활급에 미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공직사회는 부정이 만연했다.

입법 사법 행정부의 중앙부처는 물론 지방의 일선행정기관까지 부정부패가 없는 곳이 없었다. 공직사회의 부정부패가 어쩌면 당연시 되던 시절이었다. 많은 공무원들이 월급이 아닌 부정한 재물로 살았다. 그런 흙탕물 공직사회에서 버티기 힘든 사람들은 부정부패를 모르는 청렴한 공직자들이었다.

"대법원장님, 저희 판사들의 생활도 좀 살펴주십시오. 지금의 월급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형편입니다." 어느 날 대법원장을 찾아온 판사 한 사람이 궁핍한 살림을 하소연했다. 당시 급여수준은 판사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견디다 못해 대법원장을 찾아 판사들의 처지를 하소연 한 것이다.

"그렇습니까? 충분히 이해합니다. 나도 양식이 부족하여 밥을 먹지 못하고 죽을 먹으며 살고 있으니까요.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봅시다." 판사는 할 말이 없었다.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원장도 밥을 못 먹고 죽을 먹으며 살고 있다는데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었겠는가. 가인 김병로 선생은 평생 그렇게 살았다. 청렴결백하고 강직하며 부정부패나 불의와는 타협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사법부 독립의 기틀을 마련한 법조인

그렇다고 모든 고위공직자들이 그렇게 가난한 삶을 산 것은 아니었다. 일부 고위 공직자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외제 생활용품을 사용하며 호화생활을 누렸다. 집무실도 마찬가지였다. 겨울철 다른 고위공직자들의 집무실은 난로를 피우거나 난방을 하여 따뜻했다. 그러나 가인의 집무실은 잉크병이 얼어서 사용할 수 없을 만큼 추웠다. 섭씨 영하 5도 이하로 기온이 떨어지지 않는 한 절대 난방시설을 가동하거나 난로를 피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라를 찾은 지 얼마나 됐다고, 국록을 먹는 우리가 아끼지 않으면 산업을 어떻게 키웁니까?" 그는 국록을 먹는 공직자로서 생활의 절제와 청렴을 잊지 않고 살았다. 국가예산으로 배정된 돈도 쓰지 않고 반납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한다. 그 흔한 양복도 입지 않고 살았다. 그의 옷차림은 항상 평범한 광목으로 지은 한복과 두루마기 차림에 하얀색 고무신이었다.

대법원장으로 재임한 9년 3개월 동안 그는 외부 권력으로부터 오는 모든 압력과 간섭을 단호하게 뿌리쳤다. 그의 강직한 성품이 사법권독립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사법권독립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대통령 이승만과 잦은 마찰을 빚기도 했다.

"폭군적인 집권자가 마치 정당한 법에 의한 것처럼 형식을 갖춰 입법기관을 강요하거나 국민의 의사에 따르는 것처럼 조작하는 수법은 민주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를 억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법부의 독립뿐이다." 1952년 임시 수도 부산에서 대통령 이승만의 재선과 독재정권의 기반을 굳히기 위해 대통령직선제 정부안과 내각책임제 국회안을 발췌, 혼합한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강제로 통과시킨 정치파동이 있은 후 가인이 법관들에게 강조한 말이다. 그에게 있어 법은 국가를 올바로 세울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절대 명제였던 것이다.

가인 김병로선생은 유년시절 부모가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에 전북 순창의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다. 13세 때 담양 정씨와 결혼했다. 17세 때 당시 유명한 유교학지였던 전우에게서 한학을 배웠으며, 18세 때는 담양의 일신학교에서 서양인 선교사로부터 산술과 서양사 등 신학문을 공부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에는 순창의 용추사를 찾아온 면암 최익현을 만나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20세 때인 1906년 7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순창읍 일본인보좌청을 습격하기도 했다.

그 해 담양 창평의 창흥학교에 입학했으며,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 전문부 법학과와 메이지대학 야간부 법학과에 입학하여 동시에 두 학교를 다니다가 폐결핵으로 중단하고 귀국했다. 1912년에 다시 도일하여 메이지대학 3학년에 편입하여 이듬해 졸업하고, 1914년 귀국했다. 일본 유학중에는 잡지 '학지광'의 편집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금연회를 조직하여 조선유학생들의 학자금 돕기에 앞장서기도 했다.

독립지사들을 위해 헌신한 변호사

귀국한 후엔 경성전수학교(경성법률전문학교의 전신)와 보성법률상업학교(보성전문학교의 전신)의 강사로 형법과 소송법 강의를 맡았으며, 1919년 경성지방법원소속 변호사로 개업했다. 변호사 시절 그는 수많은 독립운동 관련사건에 관한 무료변론을 담당했다.

1923년에는 허헌, 김용무, 김태영 등과 서울 인사동에 형사공동연구회를 개설했는데 겉으로는 연구 단체였으나 실제로는 항일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변호사들의 모임이었다. 항일운동에 뜻을 같이하는 변호사들이 법정 변론을 통해 '조국의 독립운동이 무죄'임을 주장하는 독립운동후원단체였다. 회원들은 독립투사들에 대한 무료변론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을 돕는 일까지 했다.

10여 년 동안 그가 맡았던 사건 중에는 여운형, 안창호 등에 대한 치안유지법 위반사건, 김상옥 의사 사건, 광주항일학생운동 사건, 6·10만세운동 사건, 정의부·광복단 사건, 조선공산당 사건 등이 있다. 1927년에는 이상재의 뒤를 이어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고, 광주학생 사건 때는 진상조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보성전문학교의 이사로 활동하던 1932년에는 학교운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인촌 김성수에게 학교 인수를 알선했다. 신간회가 해체되고 독립운동 사상사건의 변론도 제한을 받게 되자 1932년부터 경기도 양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광복될 때까지 13년간을 은둔했다. 그는 일제의 창씨개명에도 참여치 않아 성을 바꾸지 않았고, 일제로부터 배급도 받지 않았다.

그는 1945년 광복 후 잠시 한민당 창당에 참여해 중앙감찰위원장이 되었고, 1946년 남조선 과도정부에서는 사법부장을 지냈다. 1948년 초대 대법원장, 1953년 제2대 대법원장이 되어 1957년 70세 정년으로 임기를 마쳤다. 6·25한국전쟁 때 부상으로 한쪽 다리가 절단되었으나 의족을 짚고 등원할 만큼 강인하고 강직한 성품이었다. 1964년 1월 13일 간염으로 서울 인현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가인 김병로 선생의 묘역을 찾은 날도 찌는 듯한 가마솥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이었다. 신익희 선생의 묘역에서 내려와 왼편으로 작은 다리를 건너면 허술한 음식점이 나타난다. 그 음식점을 지나면 다시 왼편으로 오르는 산길이 나타나는데, 대동문과 진달래능선, '김병로선생묘역' 이정표가 나타난다.

그길로 들어서 조금 걷노라니 마침 무더위 속에 꽃을 피우기 시작한 누리장나무 두 그루가 길 양쪽에서 피어나 특유의 향기가 감미롭다. 안내판에는 '애국선열 김병로 선생, 전북 순창출신 법조인 정치가였으며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로 지배하던 시기에 고통 받는 동포들에게 법률적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 일본에서 법률공부를 하고, 1927년에는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냈고, 1919~1945년에는 변호사로서 독립운동사건이나 독립을 위해 앞장섰던 민족지도자들의 무료변론을 맡았으며 광복 후에는 초대와 제2대 대법원장을 역임하였다'라고 쓰여 있다.

묘역은 단아했다. 무덤 앞의 상석과 길가 오른편 옆에 서 있는 묘비, 그리고 양쪽의 장명등이 무더운 날씨 속에 의연했다. 일제의 강압과 독재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강직하고 올곧게 살아온 그의 성품처럼 8월의 뜨거운 태양빛이 그의 묘역에 이글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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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김병로 #대법원장 #사법부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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