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서울의 모습, 누가 설계했을까?
발행일 2012.03.02. 00:00
[서울시 하이서울뉴스]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서울은 어디쯤, 어떤 모습이었을까. 시간이 흐르면서 역사 속에서 지명도 계속 바뀌었는데 삼국시대 때는 위례와 한성, 통일신라 때는 한산, 고려시대엔 양주로 불리다가 충렬왕 때 한양부로 바뀌었다. 그리고 조선의 개국과 함께 개경에서 천도한 이후에는 명실공히 한양이 되었지만, 한때 경성으로도 불리다가 해방 후 서울로 바뀌었다. 그럼 조선 개국 후 건설된 한양도성을 실제로 설계하고 만든 사람은 누굴까?
서기 1392년, 5백 년을 이어온 고려 왕조는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역사 속에서 종말을 고했다. 불교국가였던 고려를 뒤엎고 새로운 유교국가 조선 왕조가 세워진 것이다. 한양이 조선의 도성으로 정해진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새로운 도읍지를 찾아 왕사였던 무학대사와 함께 충청도의 계룡산을 둘러보고 오는 길에 왕십리에서 소달구지를 몰고 가는 백발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이곳에서 십리를 가면 도성 터’라고 넌지시 일러주고 사라졌다. 왕십리 지명유래에도 나오는 전설이다.
그렇게 도성 자리를 잡게 된 태조 이성계는 참으로 흡족했다. 그러나 문제는 왕궁을 어느 방향으로 세울 것인가가 문제였다. 당시 도참사상에 정통하고 풍수지리의 대가이며 왕사(임금의 스승)로 존경받던 무학대사와 개국공신이며 정치적인 실세 정도전의 의견이 엇갈렸기 때문이다. ‘삼한산림비기’에 의하면 무학대사가 주장하기를 ‘이곳 한양 땅에 세우는 궁궐은 반드시 동향으로 지어야 한다. 동쪽은 허하고 남쪽은 낮으니 인왕산을 등지고 동쪽을 향해 지어야 나라가 오래도록 융성한다. 그렇지 않고 백악을 등지고 남향으로 지으면 훗날 검은 옷을 입은 도적이 동쪽에서 쳐들어올까 두렵다’고 했다.
경복궁의 위치와 방향을 놓고 맞붙었던 무학대사와 정도전
그러나 정도전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유교사상에 정통했고 도참사상이나 불교를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그런 정도전이 무학대사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자고로 어느 시대 어느 제왕이나 남쪽을 보면서 정사를 폈다. 모든 궁궐은 남향이었다. 더구나 인왕산 아래 동쪽은 땅이 너무 비좁아 왕궁을 세우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백악산(북악산) 아래 터를 잡고 남향으로 세우기를 주장한 것이다. 태조 이성계는 결국 정도전의 손을 들어주었다. 지금의 경복궁이 인왕산이 아닌 북악산 아래 남향으로 세워진 역사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화기가 가득하다는 관악산이 정면으로 마주 바라보였기 때문에 그 화기를 억눌러 다스리기 위한 방편으로 광화문 앞에 커다란 돌 해치상을 만들어 세웠다. 경복궁 이후에 세워진 창덕궁, 덕수궁도 역시 남향이다. 다만 창경궁만이 무학대사의 주장처럼 동향으로 세워졌을 뿐이다.
정도전은 1342년(고려 충혜왕 3년) 경상도 영주 땅에서 밀직제학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성장하면서 목은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그 유명한 정몽주, 윤소종, 박의중, 이숭인 등이 그의 동문이었다. 20세 때인 공민왕 11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태조 이성계를 적극 도와 조선이 개국된 후 정도전의 활약은 참으로 눈부셨다.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과정을 비롯해 궁궐자리와 방향을 정하였고, 도성 건설 공사도 그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유교적 덕목이 담긴 근정전, 인정전 등 전각과 경복궁을 비롯한 성문의 이름은 물론 한성부의 5부 52방 이름도 그가 지었다. 도성의 각종 상징물에 대한 의미도 역시 유교적 덕목이나 가치관이 담긴 그의 작품들이다.
한양을 왕궁이 있는 도읍지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유교적 이상을 담은 곳으로 자리 잡게 한 것이다. 그가 남긴 위대한 작품 중 하나가 ‘조선경국전‘이다. 조선경국전은 그가 이루고자 했던 조선의 정치적인 구상, 즉 국가의 통치규범을 제시한 것으로 훗날 조선의 최고법전으로 탄생한 ’경국대전‘의 모체가 되었다.
그러나 태조의 장자방(옛 중국 한나라의 고조 유방의 책사)을 자임했던 정도전이었지만 자신과 역사의 앞날을 내다보지는 못했다. 그는 개국 후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을 세자로 적극 밀어 세웠다. 태조의 의중에 따른 것이기도 했지만 그가 방석의 사부였기 때문이다. 결과는 참혹했다. 그는 결국 1398년(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훗날 태종)이 이끄는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삼봉 정도전이 남긴 것, 이름뿐?
조선의 개국과 한양도성 건설의 설계자였던 정도전이 살았던 집터는 종로구 수송동 종로구청 앞에 있다. 구청 민원실입구 오른편 길가에 자그마한 표지석 하나가 덩그렇게 서있다. 표지석에는 '정도전 집터 조선 개국공신 삼봉 전도전이 살던 집터, 후일 사복시제용감이 이 자리에 들어섰고 일제 때에는 수송국민학교가 들어섰었다' 고 적혀있다.
구청 앞이어서 하루에도 수많은 시민들의 발길이 지나치는 곳이지만 눈 여겨 보는 사람은 별로 없어보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민들은 정도전을 이성계를 도운 조선의 개국공신이나 태조의 둘째부인 소생 왕자를 세자로 세웠다가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라는 역사 드라마의 인물로만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도전 집터에서 공평동 쪽으로 200여미터 근처에는 ‘수진궁터’라는 표지석이 길가에 세워져 있었다. 표지석에는 ‘수진궁은 조선 중기 이후에 어려서 죽은 대군이나 왕자, 출가하기 전에 사망한 공주나 옹주들의 혼을 모아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다. 그 전에는 예종의 둘째아들인 제안대군의 저택으로 사용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정도전의 집터가 있는 종로구청 앞거리가 삼봉로다. 삼봉 정도전의 호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한때 나라를 흔들던 권세가였지만 지금은 자신의 호를 딴 거리 이름으로만 남았다. 삼봉로에서 종로로 나가는 길가에는 옛날에 청계천으로 흐르던 하천인 중학천이 깨끗한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었다. 중학천을 천천히 거닐며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혁명적인 정치가이자 뛰어난 유교학자였던 정도전을 다시금 떠올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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