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좋은 도시, 팔기 좋은 도시

정석

발행일 2015.12.01. 14:29

수정일 2015.12.29. 13:05

조회 2,092

빛ⓒ정구민

정석 교수의 서울 곁으로 (4) 시민이 원하는 도시와 기업이 원하는 도시

2013년에 개최된 제10회 EBS국제다큐영화제에 출품되었던 작품 가운데 <얀 겔의 위대한 실험>이 있다. 덴마크의 유명한 건축가이면서 도시설계가인 얀 겔과 동료들이 해온 위대한 실험들을 소개해주는 아주 흥미진진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얀 겔은 1971년에 <라이프 비트윈 빌딩즈(Life Between Buildings – Using Public Space)>란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건물보다 건물들 사이의 공간, 즉 도시공간과 공공공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코펜하겐의 도심부에서 자동차 위주의 도로나 주차장을 하나씩 하나씩 차 없는 거리나 보행광장 같은 보행공간으로 바꾸어가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일찍이 1960년대부터 시작했다. 요즘에야 이런 일들을 당연시 하겠지만 자동차 대중화시대를 맡던 당시로서는 아주 획기적인 발상이고 모험이었다. 얀 겔은 자동차나 건물보다 사람과 도시공간을 중시하는 도시전문가였고, 코펜하겐 시민들과 세계인들의 가슴에 큰 감동을 준 사람이다.

<얀 겔의 위대한 실험>은 코펜하겐에서의 놀라운 변화를 비롯해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중국의 도시들과 뉴욕 맨해튼, 호주 멜버른, 방글라데시 다카,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등 세계 여러 도시들에서 그와 동료들이 전개해 온 흥미로운 실험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여기면서 순응하듯 살고 있는 우리 도시들의 모습이 과연 최선의 것인지를. 만족하는지를. 그리고 또 묻는다. 바꿀 생각은 없는지를.

영화 도입부에서 얀 겔은 르 꼬르뷔제를 비롯한 모더니스트 건축가와 도시설계가들을 호되게 비판한다. 길을 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도시설계를 맡겼어도 근대주의자들보다는 잘 했을 것이라며 거세게 몰아 부친다. 영화는 이어서 모더니스트들이 과거에 만들었던 것과 똑 같은 모습의 아파트 숲으로 빠르게 변하고 있는 중국도시들의 실상을 보여준다. 골목길에서 서로 만나 안부를 묻고 물건을 사고 대화를 나누며 살갑게 살던 사람들이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의 벌집 안에 홀로 갇혀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과 벗하면서 살고 있는 고독한 군상들을 보여준다.

코펜하겐과 맨해튼 그리고 다카와 멜버른에서의 실험들도 아주 감동스럽다. 브로드웨이의 차량통행을 막고 차도를 보행자를 위한 공간으로 바꾸었을 때 그곳에서 어떤 활동들이 벌어졌는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 멜버른의 삭막했던 뒷골목에 카페가 생기면서 안전하고 활력 있는 공간으로 되살아난 이야기도, 자가용보다는 보행자와 대중교통을 배려하는 방향으로 정책전환을 요구하는 다카 시민들 이야기도 공감과 감동을 준다.

영화의 절정은 2011년 갑작스런 지진으로 도심부의 거의 전부가 파괴되었던 크라이스트처치의 재건 이야기다. 프로젝트 책임을 맡은 얀 겔의 동료들은 크라이스트처치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시민들에게 물었다. 어떤 도시를 원하느냐고. 약 50만 명 정도의 크라이스트처치 시민들 가운데 무려 10만 5,000명이 의견을 보내왔다. 시민들의 의견은 다양했지만 면밀히 분석해보니 공통된 답이 나왔다. 시민들은 4층 남짓한 나지막한 저층도시를 원했다. 길가에 가게들이 늘어서있고 곳곳에 앉아 쉴 수 있는 도시, 옛 기억이 남아있는 도시를 시민들은 원했다. 그러나 시민들이 원하는 대로 도시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도시재건에 참여할 기업들은 시민과는 다른 모습의 도시, 즉 고층 도시를 원했기 때문이다.

결국 정책담당자들이 여러 번의 협의를 거쳐 계획안을 수정하였고 도시의 모습도 달라졌다. 최종 타협안은 평균 7층 내외의 도시. 크라이스트처치 시민의 5분의 1 이상이 자신들의 요구를 분명하게 표출했기 때문에 그래도 자신들이 바라는 모습에 근접한 도시를 얻어낼 수 있었다. 시민들이 힘을 모으고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는다면 우리 도시는 언제나 기업들의 바람대로 바뀌고 말 것임을 <얀 겔의 위대한 실험>은 분명하게 말해준다.

시민들은 <살기 좋은 도시>를 원하지만, 기업은 <팔기 좋은 도시>를 원한다. 기업은 목숨을 걸고 자기가 원하는 도시를 향해 달려가는데 시민들은 각자 먹고사는 일에 바빠 모래알처럼 살아간다. 결국 도시는 누구의 뜻대로 변해갈까?

좋은 시민은 누구일까? 자신이 원하는 도시가 어떤 도시인지 분명하게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시민이 바로 좋은 시민 아닐까? 좋은 도시는 어디 멀리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좋은 시민들이 살고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좋은 도시일 것이다. 서울은 그대의 손에 달려있다. 시민 당신의 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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