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대한제국 선포…서울 한복판 호텔 속에 가려진 그곳은?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3.08.23. 15:20

수정일 2023.08.23.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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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교수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이미 건설해 놓은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이미 건설해 놓은 환구단(圜丘壇)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53) 고종과 대한제국의 현장들

1895년 10월의 을미사변과 1896년 2월의 아관파천은 일제와 서양 열강의 세력 각축장이 된 조선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러시아 공사관에서의 생활이 1년이 되어갈 무렵 고종은 스스로 지위와 위엄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방안을 준비했고, 이것은 1897년 10월의 대한제국의 선포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조선은 이제 왕의 나라가 아니라, 황제국이 되었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배경과 그 역사 속 현장으로 들어가 본다.

대한제국을 선포하기까지

1896년 2월 고종은 궁녀가 타는 가마에 몸을 싣고 경복궁을 몰래 빠져나와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했다. 당시 러시아를 아라사(俄羅斯)라고 불렀기에 ‘아관’이라 한 것이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을 임시 거처로 선택한 것에는 정동에 미국, 영국 등 서양의 공사관들이 위치한다는 것과 더불어 새로운 왕궁으로 삼을 수 있는 경운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896년 2월 고종은 경복궁을 몰래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1896년 2월 고종은 경복궁을 몰래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경운궁으로의 환어(還御)를 염두에 두고, 고종은 경운궁의 중축을 지시했다. 기존의 건물인 석어당(昔御堂)과 즉조당(卽阼堂) 이외에 함녕전(咸寧殿)과 준명당(浚明堂) 등이 새로 건축되면서 경운궁은 궁궐의 위상을 갖추어 나갔다.

아관파천의 시기에 고종은 특히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러시아 총영사로 있던 베베르와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고 군사 및 재정 분야에서 러시아의 지원을 받았다. 베베르(1841~1910)는 1885년 조선 공사로 한양에 부임했고, 1894년 잠시 청나라로 파견됐다가 동학농민운동 이후 조선의 정세가 급변하자 다시 조선으로 파견되었다.

이후 러시아 총영사가 된 베베르는 고종의 깊은 신뢰를 받았다. 1896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민영환을 특명전권대사로 임명하여 파견한 것에도 고종의 친러시아적 성향을 볼 수 있다. 고종이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열강의 견제 속에서 조선의 자주성을 회복하고 ‘민국(民國)’을 건설한다는 구상이었다.

1897년 1월 20일에는 태의원 도제조 정범조에게 “경장(更張) 후에 옛 규정과 새 규례가 상호 충돌하여 곤란한 점이 많은데 옛 규례를 기본으로 하고 새 규례를 참조한다면 이런 폐단이 줄어들 것이다.”고 하여, ‘구본신참(舊本新參:옛것을 근본으로, 새로운 것을 참작한다.)’에 입각하여 정책을 추진해 나갈 것을 지시하였다.
고종은 1897년 2월 20일 거처를 경운궁으로 옮겼다. 경운궁의 출발은 정릉동 행궁이었다.
고종은 1897년 2월 20일 거처를 경운궁으로 옮겼다. 경운궁의 출발은 정릉동 행궁이었다.

러시아 공사관에서의 불편한 생활을 1년여 지속한 고종은 1897년 2월 20일 거처를 경운궁으로 옮겼다. 경운궁의 출발은 정릉동 행궁이었다. 성종의 형인 월산군의 사저로 활용되다가, 임진왜란 이후 모든 궁궐이 불탄 상황에서 선조가 이곳에 머물면서 궁궐로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선조의 거처 이후에 광해군과 인조는 경운궁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광해군 대에 경희궁이 새로 조성되고, 인조 대에 창덕궁과 창경궁이 중건이 되면서, 경운궁은 전혀 궁궐로서 사용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광해군 시대에 인목대비가 핍박을 받으면서 거처했던 공간으로 기억이 남은 곳이었다. 고종 대에 경운궁이 다시 재조명된 곳은 지리적 이점이 컸다. 고종에게는 여전히 일제의 영향력이 큰 경복궁이나 창덕궁보다는 러시아를 비롯한 서양 세력의 지원을 쉽게 받을 수 있는 경운궁이 큰 매력으로 다가왔던 것이었다.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구본신참’에 입각하여, 근대국가 수립을 위한 방안들을 추진해 나갔다. 1897년 8월 14일 연호를 새롭게 정하여 ‘광무(光武)’라 한 것도 자주국의 면모를 과시하기 위한 의지의 표시였다. 김홍집 내각이 만든 ‘건양(建陽)’이라는 연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고종은 새로운 연호를 지시했고, 신하들이 광무와 경덕(慶德) 두 가지 연호를 아뢰자 광무로 할 것을 명하였다.

조선, 황제국의 위상을 갖추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이미 건설해 놓은 환구단(圜丘壇)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왕과 황제의 위상에서 가장 큰 차이가 나는 부분은 왕은 토지와 곡식의 신인 사직단에 제사를 지내지만, 황제는 직접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점이다.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평평함)의 원리에 따라, 황제가 하늘에 직접 제사를 지내는 제단인 환구단을 둥글게 조성하였다.
황궁우는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1897년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2년 후에 준공되었다
황궁우는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1897년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2년 후에 준공되었다

현재의 웨스턴 조선호텔 자리에 위치했던 환구단 건물은 사라지고, 그 부속 건물인 황궁우(皇宮宇)는 원형대로 남아있다. 팔각의 황궁우는 신위를 봉안하던 건물로 환구단의 북쪽 모퉁이에 세워졌다. 환구단 입구에 있는 석고(石鼓)는 1902년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하여 세운 석조물로서, 몸체에는 화려한 용무늬가 새겨져 있다.
환구단 입구에 있는 석고(石鼓)는 1902년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하여 세운 석조물로 화려한 용무늬가 새겨져 있다.
환구단 입구에 있는 석고(石鼓)는 1902년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하여 세운 석조물로 화려한 용무늬가 새겨져 있다.

『고종실록』의 기록에는 대한제국 선포 이전부터 고종의 황제 즉위를 청하는 상소가 이어졌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황제 즉위는 법적으로도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했기에 법부 협판(協辦:대신 아래의 벼슬)으로 있던 권재형(權在衡), 유기환(俞箕煥) 등의 관리들은 『공법회통(公法會通)』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황제를 칭해도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음을 아뢰었다. 

유재형은 갑오경장 이후 독립이라는 이름만 있으나 독립의 실(實)이 없다면서, 황제를 칭하여 자주독립 국가의 길로 나아가야 함을 주장했다. 유기환은 중국과 서양에서 황제를 칭한 역사를 소개하면서 우리도 명나라의 정통을 계승했으므로 황제를 칭하여 독립의 권리를 찾을 것을 주장하였다. 중앙의 관리뿐만 아니라 지방의 유생들도 황제 즉위를 촉구하는 상소를 올리며, 고종의 황제 즉위는 완전히 대세가 되었다. 

작은 나라는 황제를 칭할 수 없다는 논리에 맞서, 우리나라는 삼한을 통합한 나라로서 육지의 강토가 4천 리이고, 인구가 2천만을 헤아린다는 논리도 동원되었다. 분위기가 조성되자 고종도 황제 즉위식을 준비해 나갔다.
중화전 내부 천장에는 왕을 상징하는 봉황이 아닌, 황제를 상징하는 용이 조각됐다
중화전 내부 천장에는 왕을 상징하는 봉황이 아닌, 황제를 상징하는 용이 조각됐다

황제 즉위식을 할 공간인 환구단의 위치는 10월 1일 회현방(會賢坊) 소공동계(小公洞契)로 정해졌다. 10월 7일에는 경운궁의 즉조당(卽阼堂)을 태극전(太極殿)으로 고쳤다. 태극전으로 이름을 고친 것은 대한제국 이후 태극기를 황제의 상징으로 사용한 것과 관련이 깊다. 태극전은 1898년 2월 13일 중화전(中和殿)으로 개칭되었으며, 1902년 새로 중화전을 지으면서 태극전은 다시 즉조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1897년(고종 34) 10월 12일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올리며 대한제국을 선포한 괴정은 『고종실록』에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다.
고유제를 지냈으니 
황제의 자리에 오르소서.
고종실록

“천지에 고하는 제사를 지냈다. 왕태자가 배참(陪參)하였다. 예를 끝내자 의정부 의정 심순택(沈舜澤)이 백관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고유제를 지냈으니 황제의 자리에 오르소서." 하였다. 신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단(壇)에 올라 금(金)으로 장식한 의자에 앉았다. 심순택이 나아가 십이장곤면(十二章袞冕:12개의 무늬가 들어간 곤룡포와 면류관)을 올리고 성상께 입혀드렸다. 이어 옥새를 올리니 상이 두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왕후 민씨를 황후로 책봉하고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심순택이 백관을 거느리고 국궁(鞠躬), 삼무도(三舞蹈), 삼고두(三叩頭), 산호만세(山呼萬世), 산호만세(山呼萬世), 재산호만세(再山呼萬世)를 창하였다.”

왕의 나라에서 황제의 나라가 된 만큼 국호에도 변화가 왔다. 조선이라는 국호 대신에 ‘대한제국’을 새로운 국호로 정한 것은 삼한(三韓)의 옛 영토와 역사를 계승하는 황제국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조선이라는 국호에는 고조선과 삼한이 남북으로 존재하던 시절 고조선에 대한 역사 계승의식을 담았다면, 이제 삼한 계승의식이 국호에 반영된 것이었다.

고종은 “짐(朕)은 생각건대, 단군과 기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 때에 이르러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삼한’을 통합한 것이다.”라고 한 고종의 발언은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정한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어서 고종은 “짐이 덕이 없다 보니 어려운 시기를 만났으나 상제(上帝)가 돌봐주신 덕택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안정되었으며 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 군사들과 장사꾼들이 한목소리로 대궐에 호소하면서 수십 차례나 상소를 올려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올리려고 하였는데, 짐이 누차 사양하다가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올해 9월 17일(양력 10월 12일) 백악산의 남쪽에서 천지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으로 정하고 이해를 광무 원년으로 삼으며, 종묘와 사직의 신위판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고쳐 썼다.

왕후 민씨를 황후로 책봉하고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이리하여 밝은 명을 높이 받들어 큰 의식을 비로소 거행하였다. 이에 역대의 고사(故事)를 상고하여 특별히 대사령(大赦令)을 행하노라.”라고 하여 대한제국의 선포와 함께 황제국이 되면서 뒤따르는 호칭 변화도 대내외에 알렸다. 이제 조선은 명실상부한 황제국으로 그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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