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과 아관파천으로 이어진 긴박했던 그날의 이야기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3.08.09. 15:10

수정일 2023.08.09.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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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교수
'고종의 길'은 덕수궁 돌담길에서 정동공원과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지는 총 120m의 길이다.
'고종의 길'은 덕수궁 돌담길에서 정동공원과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지는 총 120m의 길이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52)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일본이 조선에 대해 확실한 우위를 가져온 대표적인 사건이 1894년의 청일전쟁이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청나라는 종이호랑이로 전락했고,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여기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항한 인물이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였다. 외교적 역량을 갖추고 있던 왕비는 러시아와의 협력을 통하여 일본의 견제에 나섰다. 조선의 지배에 가장 걸림돌이 명성황후로 판단한 일본은 왕비의 제거에 나섰고, 그 목표를 실현하였다. 1895년의 을미사변(乙未事變)1896년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근대사는 그렇게 긴박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운현궁은 조선 제26대 왕인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의 저택이다.
운현궁은 조선 제26대 왕인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의 저택이다.

격동의 근대사와 명성황후의 선택

1873년 최익현의 상소가 계기가 되어 흥선대원군이 하야하고, 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면서 조선의 대내외 정책에는 큰 변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친정의 과정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황현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박규수(朴珪壽:1807~1877, 박지원의 손자)는 관청 일에 통달하고 문학으로도 이름이 나 당시 쓸만한 인재로 추앙받았다.

다만 운현(흥선대원군) 시절에는 서양 세력을 배척하자고 힘껏 주장하다가, 갑술년(1874년) 이후로는 왜국과 외교를 트자고 주장하여 시류에 영합하였다.”거나, “그때 민영위, 민영규, 민영상 등이 모두 화려한 요직에 있었으며, 밖으로는 방백과 수령에 이르기까지 좋은 자리는 모두 민씨가 아니면 민씨의 사돈들이 차지하였다.”라고 하여, 개항으로의 정책 변화와 함께 왕비의 외척들이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곤녕합 옆 옥호루(玉壺樓)에서 명성황후가 피살되었다.
곤녕합 옆 옥호루(玉壺樓)에서 명성황후가 피살되었다.

1876년의 강화도 조약으로 원산, 부산, 인천의 개항장을 확보한 일본은 조선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신식 군대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였고, 구식 군대들의 여건은 갈수록 열악해졌다. 1882년 6월 구식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다.

일본공사관을 습격하여 불태우고 선혜청 당상 민겸호(閔謙鎬:1838~1882)를 처단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명성황후는 충주 장호원으로 피신을 했고, 왕비의 반대편에 있었던 흥선대원군이 다시 권력을 잡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의 국장을 선포하면서, 며느리의 존재를 없애려고까지 했다. 이에 청나라가 조선의 내정에 적극 개입하였고, 흥선대원군을 청나라 톈진으로 압송해 갔다.

고종의 친정 체제가 회복되면서, 명성황후는 장호원에서 돌아오게 되었는데, 장호원에서는 무당 진령군(眞靈君)과 인연을 맺었다. 진령군은 왕비가 자신과 만난 날로부터 50일 이내에 환궁할 것이라며 희망적인 정보를 알려줬는데, 예언한 그 날짜에 환궁하게 되자 명성황후는 진령군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명성황후가 돌아온 후 고종과 왕비는 일본을 견제할 수 있는 청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1884년 갑신정변을 전후하여 서양의 나라들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1882년 미국을 시작으로 1884년 영국과 독일, 1885년 러시아, 1886년 이탈리아, 1887년 독일과의 수교가 이루어졌다.

서양과의 통상은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독점하려는 청과 일본에 대한 견제하는 조처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에 대한 청나라와 일본의 경쟁은 심화 되었고, 1894년 일본군의 선제공격으로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후 시모노세키 조약이 맺어졌는데, 청나라는 일본에 타이완과 랴오뚱 반도를 할양하는 굴욕을 당하였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에서 일본의 우위는 더욱 확고해졌고, 명성황후는 청나라를 견제할 수 있는 대체 세력으로 러시아를 주목하였다.
명성황후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던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
명성황후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던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

1895년 을미사변

1895년 4월 일본의 중국 진출을 우려한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협력하여 일본에 압력을 가하여 랴오뚱 반도를 다시 반환하게 한 삼국협상도 고종과 왕비에게는 호재로 작용하였다. 고종과 왕비는 1895년 8월 이범진, 박정양, 이완용 등 친러파 인물을 기용하며 반일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이러한 움직임에 크게 반발한 일본은 왕비 살해라는 전대미문의 만행을 계획해 나갔다.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 공사 미우라와 전임 공사 이노우에는 일본인 수비대와 경찰, 기자 등을 합류시켜, 암호명을 ‘여우 사냥’으로 하고, 건청궁(乾淸宮)의 곤녕합(坤寧閤)에 기거하던 명성황후 살해하였다. 일본 낭인의 기습에 곤녕합 옆 옥호루(玉壺樓)에 피신했던 왕비는 잔인하게 피살되었다. 시신은 불살라져 인근의 녹산(鹿山)과 향원정(香遠亭) 연못에 버려졌다.

을미년인 1895에 일어났다 해서 ‘을미사변’이라 불리는 이 사건 직전 일본은 명성황후와 정적 관계에 있던 흥선대원군을 아소정(我笑亭)까지 가서 경복궁으로 데려왔다. 흥선대원군 세력에 의해 왕비가 살해된 것으로 꾸미려 하였다.

그러나 이 장면을 건청궁 뒤편에 설치한 건물 관문각(觀文閣)에서, 현장을 목격한 인물이 있었다. 러시아 건축가 세레딘 사바틴(Seredin-Sabatin, 1860~1921)으로, 러시아 제국의 우크라이나 폴타바주 루브니에서 태어났다. 1890년 인천해관 직원으로 조선해 입국해,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로 본국으로 갈 때까지 러시아 공사관, 관문각의 건축에 참여하였다.

사바틴의 증언으로 일본의 만행임이 만천하에 드러났지만, 일본은 미우라 등 관련자에 대한 형식적인 재판을 했고, 관련자 대부분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명성황후에 대한 피습 소식도 충격적이었거니와, 을미사변 이후 일본이 단행한 단발령(斷髮令)의 실시는 조선의 온 백성들을 분노하게 했다. 국모 시해와 단발령 시행에 항거하기 위한 ‘을미의병’들이 결성되었고, 보다 조직적으로 일본에 저항하는 의병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덕수궁에서 정동공원과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지는 총 120m의 길을 '고종의 길'로 조성했다.
덕수궁에서 정동공원과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지는 총 120m의 길을 '고종의 길'로 조성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

건청궁의 장안당(長安堂)에 거처하면서 왕비가 살해되는 가까운 현장에 있었던 고종의 충격은 누구보다 컸다. 이제 다음 타킷은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고종은 경복궁을 빠져나가려는 계획을 세웠다.

1896년 병신년 2월 11일 고종은 궁녀가 타는 가마에 몸을 싣고 경복궁을 탈출했다. 최종 목적지는 러시아 공사관. 당시 러시아를 ‘아라사국(俄羅斯國)’이라 칭했기 때문에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한다.
러시아 공사관이 있던 자리는 정동공원으로 바뀌었다.
러시아 공사관이 있던 자리는 정동공원으로 바뀌었다.

사실 아관파천 이전에도 고종의 탈출 시도가 있었다. 1895년 11월에 있었던 춘생문(春生門) 사건이다. 친미, 친러파 세력의 지원 속에 1895년 11월 28일 새벽에 친위대 소속의 장교 남만리, 이규홍 등은 800명의 병력과 함께 고종이 있는 경복궁을 향하였다. 안국동을 경유해 건춘문(建春門)으로 입궐하려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자 삼청동으로 올라가 춘생문 담을 넘어 입궐하려 하였다. 그런데 이 계획에 협력하기로 했던 친위대 대대장 이진호가 서리 군부대신 어윤중(魚允中)에게 밀고하면서, 고종의 탈출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1896년 2월의 아관파천은 러시아와 친러파의 주도로 다시 진행되었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이범진, 이완용, 이윤용 등 친러세력과 함께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모셔오는 계획을 실천했다. 고종 일본과 친일내각에 둘러싸인 경복궁이나 창덕궁, 창경궁보다 미국, 영국, 독일 공사관 등이 밀집된 정동(貞洞) 일대가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일본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고종은 2월 11일 새벽 태자와 함께 궁녀가 타는 두 개의 교자(轎子)를 타고 건춘문을 나와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했다. 체면불구하고 궁녀의 가마를 탄 것은 검문검색이 소홀하다는 점을 활용한 전략이었다.

『고종실록』에는 “왕과 왕태자는 대정동(大貞洞)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주필(駐蹕)을 옮겼고, 왕태후와 왕태자비는 경운궁에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러시아 공사관 건물(현재 정동 예원학교 옆)은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되어, 탑 부분만 남았다. 현재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다.  

1896년 5월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민영환(閔泳煥), 윤치호(尹致昊) 등을 특사로 파견하여 러시아 군대와 군사 교관의 추가 파병, 3백만 엔의 차관, 전신선 설치 등을 요청하도록 하였다. 일본 군대의 존재에 여전히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당시 민영환 일행이 제물포항을 떠나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참여한 7개월간의 경험을 기록한 책, 『해천추범(海天秋帆)』은 세계 일주 기행문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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