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과 흥선대원군이 머문 공간, '운현궁'에 얽힌 이야기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3.04.26. 16:57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45) 흥선대원군과 운현궁
왕위 계승의 결정권을 가진 신정왕후(神貞王后)의 신임을 얻은 이하응은 마침내 아들을 왕으로 올리는데 성공했고, 최초로 살아있는 대원군(왕의 아버지를 칭하는 호칭) 시대를 열었다. 운현궁은 고종이 태어나서 자란 잠저(潛邸: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이자, 흥선대원군이 정치적 야망을 실현시킨 공간이기도 했다.
운현궁이라고 이름을 지은 까닭?
고종이 왕의 자리에 오른 뒤에는 이곳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증축하였다. 운현궁이 준공되었을 때, 고종은 대왕대비(신정왕후)와 왕대비(철인왕후)를 모시고 운현궁에서 낙성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그리고 근처의 선비와 소년들에게 임시과거시험을 보게 하고 선비 50여 명과 소년 497명을 선발해서 시상하는 등 운현궁의 준공을 축하한 모습이 『승정원일기』, 1864년(고종 1) 9월 24일의 기록에 보인다.
운현궁이 증축되어 규모가 가장 컸을 때는 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와 옛 TBC 방송국, 일본문화원, 그리고 교동초등학교 일대까지를 포함하였다. 궁궐에 필적할 만큼 크고 웅장하였던 공간이었던 것이다.
운현궁에서 왕기가 있다는 말이 떠돌았다.
그 후 지금의 주상이 탄생했다.
흥선대원군, 개혁정치의 칼을 뽑다
흥선대원군은 신정왕후와의 밀약 속에 고종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바로 섭정(攝政) 체제로 들어갔고, 바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척결에 나섰다. 19세기 초, 중반 60년 동안 세도정치의 본산으로 기능을 하였던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부활시켰다.
1865년에는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송시열의 사당 만동묘(萬東廟)를 철폐하고, 당쟁의 온상이라는 이유를 들어서 전국의 서원 중 사액서원 47곳을 제외한 서원을 모두 정리하였다. 유림(儒林)들의 저항이 심했지만 대원군은 “백성을 해치는 자는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내가 용서하지 못한다.”는 확신에 찬 논리로 유생들의 기를 꺾고 정국을 돌파해 나갔다.
고종과 명성황후, 운현궁에서 혼례식을 하다
당시의 혼례식 과정을 기록한 의궤인 『고종명성황후가례도감의궤(高宗明成皇后嘉禮都監儀軌)』에 의거하면, 1866년 1월 1일부터 12세에서 17세에 이르는 전국의 사족 처자들에게 금혼령이 내려졌다.
『승정원일기』에는 “1866년(고종 3) 3월 21일 마침내 운현궁에서 혼례식의 가장 중요한 의식인 친영(親迎:별궁에서 신부 수업을 받고 있는 왕비를 궁궐로 모셔오는 의식)이 행해졌다.”고 전한다.
당시 혼례식의 화려함은 82쪽에 달하는 화려한 채색 친영 반차도(班次圖)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종전에 판화 기법으로 그린 것과 달리, 이 반차도는 모두 수필(水筆)로 그렸다. 다른 반차도와 특히 다른 점은 왕의 행렬 끝부분인 38면에 종부시 사령 2인과 권두(權頭) 2인을 앞세우고 대원위(大院位) 교자(轎子)가 새롭게 등장하고, 왕비 행렬의 거의 마지막 부분인 78면에는 부대부인(府大夫人) 덕응(德應:가마)이 등장하는 것이다. 대원군과 그 부인의 가마가 등장하는 것은 혼례식에서 대원군의 위상이 매우 컸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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