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검이 연기한 '효명세자', 그가 아버지 위해 지은 건물은?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3.02.22. 16:20

수정일 2023.02.23.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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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교수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부친 순조를 위해 지은 건물이다.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부친 순조를 위해 지은 건물이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41)순조와 연경당 그리고 인릉

정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순조(純祖:1790~1834, 재위 1800~1834)는 특히나 존재감이 약한 왕이다. 순조의 즉위와 함께 안동 김씨로 대표되는 외척 세도 가문들이 권력의 중심에 서는 세도정치가 전개되면서 왕의 위상이 한없이 추락했기 때문이다.

순조는 34년간이나 재위했고, 그를 기억하는 공간들도 서울 곳곳에 남아 있는데, 창덕궁 안에 위치한 연경당(演慶堂), 그리고 현재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인릉(仁陵)이 대표적이다.

순조와 집복헌, 연경당

순조는 정조와 수빈(綏嬪) 박씨(朴氏) 사이에서 1790년 6월 창경궁 집복헌(集福軒)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공(玜), 호는 순재(純齋)이다. 

정조는 왕비인 효의왕후와의 사이에서 후사를 보지 못했고, 의빈 성씨 사이에서 문효세자(1782~1786)를 얻었으나, 5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문효세자가 요절하자, 정조는 수빈 박씨에게 많은 애정을 쏟았고 순조를 얻게 되었다.
집복헌은 창경궁 영춘헌 본채 서쪽에 이어져 있는 서행각이며 ㅁ자 형태의 건물이다.
집복헌은 창경궁 영춘헌 본채 서쪽에 이어져 있는 서행각이며 ㅁ자 형태의 건물이다.

순조가 태어난 집복헌은 ‘복을 모으는 집’이라는 뜻으로 주로 후궁들의 처소로 사용되었다. 집복헌에서는 사도세자가 출생하기도 했는데,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瑛嬪) 이씨 역시 영조의 후궁이었다. 집복헌은 창경궁 영춘헌(迎春軒) 본채 서쪽에 이어져 있는 서행각(西行閣)이며 ㅁ자 형태를 한 건물이다.

정조는 1800년 영춘헌에서 승하했는데, 후궁의 처소에서 승하한 점도 흥미롭다. 1800년 1월 정조는 11세의 순조를 효의왕후의 양자로 삼고 세자로 책봉하였다.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하자 순조는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올리고 왕위에 올랐다.

창덕궁에서 순조와 인연이 깊은 또 다른 공간은 연경당(演慶堂)이다. 연경당은 효명세자(효명세자:1809~1830, 익종으로 추존됨)가 부친 순조를 위해 지은 건물이다. 효명세자는 2016년 방송된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박보검 배우가 그 역을 맡아 인지도가 높아진 인물이다.

헌종 때에 편찬한 『창덕궁지』에는 연경당에 대해 “개금재(開錦齋)의 서쪽에 있고, 남쪽이 장락문(長樂門)인데 바로 진장각(珍藏閣)의 옛터이다. 순조 28년(1828년) 익종(翼宗)이 춘처(春邸:세자)로 있을 때에 다시 건축하였고, 지금은 익종의 초상을 모시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종 때에 편찬된 『동국여지비고』의 경도(京都) 항목에는 “연경당은 어수당 서북쪽에 있다. 순조 27년 익종이 동궁에 있을 때에 진장각 옛터에 창건하였다.”고 하여 창건 연대는 1827년과 1828년으로 차이를 보인다. 이어서 “그때 대조(大朝: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경사스런 예(禮)를 만났고 마침 연경당을 낙성하였으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고 하여, 연경당이라는 이름은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경사에서 비롯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연경당은 단청을 생략한 것이 특징이다.
연경당은 단청을 생략한 것이 특징이다.

연경당은 이 집 전체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사랑채의 당호이기도 하다. 연경당은 남녀의 공간을 사랑채와 안채로 구분한 형태이며, 단청을 생략한 것도 특징이다. 단청이 없는 대표적인 건물로는 경복궁의 건청궁과 창덕궁의 낙선재가 있다.

연경당 앞으로 흐르는 명당수를 지나면 정문인 장락문(長樂門)이 보인다. 장락문은 장락궁에서 빌려 온 이름으로, 신선처럼 아무 걱정과 근심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염원을 담았다.

1820년대에 제작한 「동궐도」의 모습을 보면, 1827년경에 창건한 연경당과 고종 때에 새로 지은 것으로 보이는 현재의 연경당은 건물 구성에 차이가 있다. 현재의 연경당의 부속 건물로는 선향재(善香齋)와 농수정(濃繡亭)이 있다.

선향재는 서재 겸 응접실 역할을 한 건물로 벽돌로 쌓은 것이 특징이다. 가운데에 넓은 대청을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앉혔으며, 지붕 위로는 햇볕을 막는 차양을 설치하였다. 선향재가 서향이어서, 오후에 햇볕이 들어와 책을 훼손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연경당 영역의 정자로 선향재의 동북쪽에 있다.
농수정은 ‘짙은 빛(濃)으로 수(繡)를 놓는다’는 뜻의 정자이다.
농수정은 ‘짙은 빛(濃)으로 수(繡)를 놓는다’는 뜻의 정자이다.

농수정은 ‘짙은 빛(濃)으로 수(繡)를 놓는다.’는 뜻으로 연경당 동북쪽에 선향재와 비슷한 시기에 세운 정자이다. 문이 설치되어있는데, 문짝은 위로 들어 올릴 수 있어서 문을 올리면 사방이 트인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1834년(순조 34) 11월 13일 순조는 
부스럼을 앓다가 해시에 
경희궁 회상전(會祥殿)에서 승하하였다.
『순조실록』 중에서

순조와 순원왕후의 인릉

순조가 승하한 것은 대리청정을 맡긴 효명세자가 운명한 지 4년 만에 일이었다. 1834년 10월 28일 순조는 두통과 대소변이 불통하는 증상으로 약방에서 입진을 청한 이후 매일같이 약원(藥院)과 의관들이 왕을 진찰하였다. 이전부터 앓았던 종환(腫患)에 의한 것으로서 의관들이 직숙하며 순조를 살폈으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11월 13일 순조는 조만영 등 대신들을 불러 옥새를 왕세손(헌종)에게 전할 것과 궁성의 호위를 명한 후에 45세의 생을 마감했다.

순조가 승하한 지 6일 후 시호를 ‘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이라 하고 묘호는 ‘순종(純宗)’, 능호는 ‘인릉(仁陵)’이라 하였다. 헌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던 순원왕후는 남편이 승하한 당일 이최응을 수릉관으로 임명하고 그해 12월 28일 인조의 능인 파주 장릉(長陵) 언덕을 산릉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순원왕후는 파주 장릉의 언덕이 흙빛이 흡족하지 못하고 뇌석(腦石)이 깨져 상할 염려가 있으니 산릉 역사를 정지하고 다시 길지를 정하게 하였다.
순조와 순원왕후의 합장릉인 인릉
순조와 순원왕후의 합장릉인 인릉

이후 기존의 산릉 위치를 옮겨 장릉과 같은 국내(局內)로 옮기도록 하였다. 산릉의 위치를 정한 후에 다시 다른 곳을 정하는 일을 대비가 결정한 것은 이례적인 일로서, 그만큼 순원왕후의 위상이 컸음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이 해 4월 19일 순조를 인릉에 장사 지냈다. 순조를 인릉에 장사지낸 과정은 『순조인릉산릉도감의궤(純祖仁陵山陵都監儀軌)』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헌종 대인 1835년(헌종 1) 순원왕후의 의지로 파주 장릉 왼쪽 산줄기에 위치했던 순조의 인릉은 21년 만인 1856년(철종 7) 현재의 서울 서초구 내곡동 태종의 헌릉(獻陵) 옆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1856년 2월 지사(地師)와 대신들이 파주 인릉을 살펴본 후 철종을 면담한 자리에서, 인릉은 풍수적으로 길지가 아니어서 천릉을 해야 함을 보고하였다.

이에 철종은 직접 천릉(遷陵) 예정지인 헌릉을 살펴보았고, 1856년 2월 헌릉의 오른편 언덕을 천릉의 장소로 정하였다. 천릉을 하게 되면 새롭게 결정된 능지에 산릉을 조성하는 일과 기존의 능에 묻힌 재궁(梓宮) 등을 옮기는 일이 함께 진행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 두 개의 도감(都監)이 설치되어 동시에 천릉이 진행되었다.

2월 22일 천릉의 하교 이후 3월 4일 내수사에서 비용을 차출하여 천릉 역사(役事)를 시작하였고, 10월 6일에 발인하여 8일에 대여가 새로 조성한 산릉에 도착하였다. 10월 11일 현궁을 내리고 우제(虞祭)를 지낸 후 10월 15일 인릉의 천릉 작업을 완료하였다.
1857년(철종 8) 8월 4일
순원왕후는 69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헌종과 철종 2대에 걸쳐 수렴청정을 한 순원왕후도 
죽음만큼은 피할 수가 없었다.

인릉을 천릉할 시기 순원왕후(1789~1857)의 나이는 68세의 고령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따라서 순원왕후는 서둘러 인릉의 천릉을 완성하려고 했다. 결국 천릉은 완료되었고, 10개월 후인 1857년(철종 8) 8월 4일 69세의 나이로 순원왕후는 승하하였다. 순조, 헌종, 철종 3명의 왕이 재위하던 기간에 정국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고, 헌종과 철종 2대에 걸쳐 수렴청정을 한 순원왕후도 죽음만큼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승하 후에도 그녀의 재궁에는 은정과(銀釘:은으로 만든 못) 옻칠이 수차례 더해지면서, 사후에도 권력자임을 증명시켰다. 순원왕후의 무덤은 이미 천릉되어 있던 인릉에 합장하였다. 순원왕후의 인릉 합장은 9월 1일 공사를 시작하여 12월 모든 작업을 완료하였다. 순원왕후의 합장에 대한 내용은『순원왕후인릉산릉도감의궤(純元王后仁陵山陵都監儀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는 태종과 원경왕후의 쌍릉인 헌릉과 순조와 순원왕후의 합장릉인 인릉이 조성되어 있어서 ‘헌인릉’이라고도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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