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세에 즉위한 헌종, 가장 닮고 싶었던 왕은 누구?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3.03.29. 15:30

수정일 2023.03.29.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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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교수
헌종은 정조의 뜻을 이어받아 소주합루를 승화루로 개칭했다. 사진은 삼삼와 및 승화루.
헌종은 정조의 뜻을 이어받아 소주합루를 승화루로 개칭했다. 사진은 삼삼와 및 승화루.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43) 헌종, 정조를 롤모델로 삼다

조선의 왕 중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즉위한 왕은 헌종(憲宗:1827~1849, 재위 1834~1849)이다. 1834년 8세의 나이로 왕이 되었지만, 재위 기간은 15년으로 짧지가 않았다. 그러나 왕으로 있던 시기는 대부분 10대의 나이로서, 대비인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15세 무렵 친정(親政)을 하기 시작한 헌종은 특히 증조부 정조를 닮고자 노력을 했다. 창덕궁에 있는 소주합루(小宙合樓)와 낙선재(樂善齋), 그리고 낙선재를 구성하는 건물 중의 하나인 석복헌(錫福軒)은 헌종이 정조를 롤모델로 삼았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헌종은 8세에 왕위에 올라
15세가 되던 해 친정(親政)을 하게 된다. 
헌종은 특히 정조를 닮고자 노력했다.

승화루와 헌종의 서화 사랑

헌종은 효명세자(孝明世子)와 신정왕후(神貞王后)의 장자로서, 이름은 환(奐), 호는 원헌(元軒)이다. 1827년 7월 18일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태어났다. 경춘전은 증조부 정조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헌종 즉위 후 대비인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고, 1841년 15세가 된 헌종은 친정(親政)을 하게 되었다. 왕이 20세가 될 때까지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8세에 즉위하여 수렴청정이 너무 길었기 때문에 5년을 단축한 것이다.

헌종은 정조의 뜻을 이어받고자 하는 의지를 담아 소주합루(小宙合樓)를 승화루(承華樓)로 개칭하고, 정조가 세운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의 정신을 적극적으로 계승하려고 하였다. 정조는 1776년 즉위 직후 개혁의 공간으로 규장각을 건립하였는데, 규장각의 2층이 바로 주합루(宙合樓)였다.
창덕궁 내 주합루의 모습, 정조는 중희당 근처에 주합루를 모방한 소주합루를 세웠다.
창덕궁 내 주합루의 모습, 정조는 중희당 근처에 주합루를 모방한 소주합루를 세웠다.

정조는 1782년(정조 6) 세자의 공간으로 중희당(重熙堂)을 건립하였으며, 바로 이웃한 곳에 주합루를 모방한 소주합루를 세운 것이다. 1층에는 세자가 읽을 책을 보관하는 서고인 의신각(儀宸閣)이 있었고, 소주합루는 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하는 2층 공간이었다.

헌종은 1847년 낙선재를 지으면서 소주합루의 이름을 승화루로 바꾸었다. ‘승화(承華)’는 ‘정화(精華)를 잇는다.’는 뜻으로, 많은 책과 글, 그림을 수집하여 그 빼어난 정화를 이어받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승화루 뜰엔 큰 돌을 움푹 파서 만든 작은 연못인 ‘향천연지(香泉研池:향기나는 샘과 벼루같은 연못)’가 있어서 운치를 더해 주었다. 헌종은 정조가 그랬던 것처럼 승화루에 많은 서책을 보관했다.
헌종은 승화루에 서책을 보관했다. 
정조가 그랬던 것처럼 
장서를 보관하고 서책을 연구하려는 
헌종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낙선재는 창덕궁과 창경궁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낙선재는 창덕궁과 창경궁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낙선재를 짓고 올린 상량문에는, “동벽(東壁)에는 온갖 진귀한 서책들 빛나고, 서청(西淸)에는 묵은 나무 휘날려 창이 영롱하다. 잘 꾸며진 서적들이 많고 아름다운 비단 두루마리는 성상이 을야(乙夜: 밤 10시경)에 볼 자료로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정조를 계승하여 장서들을 보관하고 서책을 연구하려는 헌종의 의지를 엿볼 수가 있다.

헌종은 특히 김정희의 글씨를 좋아했다. 김정희의 제자인 소치 허련(許鍊:1809~1892)은 “낙선재로 들어가니 바로 상감이 평상시 거처하시는 곳으로 좌우의 현판 글씨는 완당(阮堂:김정희의 호)의 것이 많았습니다. 향천(香泉), 연경루(硏經樓), 유재(留齋), 자이당(自怡堂), 고조당(古藻堂)이 그것이었습니다. 낙선재 뒤에는 평원정(平遠亭)이 있었습니다.”고 하여 헌종의 부름을 받아 낙선재에 들어가 김정희의 작품을 직접 본 모습을 『소치실록』에 기록하고 있다.
평원정은 낙선재의 서북쪽에 있는 정자로, 현재에는 상량정(上凉亭)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평원정은 낙선재의 서북쪽에 있는 정자로, 현재에는 상량정(上凉亭)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당시 헌종이 제주도로 유배를 가 있던 김정희의 안부를 물었던 것도 기록으로 나타난다. 평원정은 낙선재의 서북쪽에 있는 정자로, 현재에는 상량정(上凉亭)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승화루에는 보관한 서책 목록을 정리한 『승화루서목(承華樓書目)』이 있다. 서목에 의거하면 책이 총 3,742책이며 서화가 총 665점에 이른다. 승화루 서고에는 수많은 그림과 도서 그리고 인장을 수집해서 보관했는데, 『승화루서목』에 실린 목록을 보면 양과 질 모두 당대 최고 수준의 작품이 보관되어 있었음이 나타난다. 『승화루서목』은 고종, 순종 연간에 편찬되었지만, 헌종의 서화 컬렉터로서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는 자료이다.

경빈 김씨와 석복헌

헌종은 재위 9년인 1843년 8월 25일 헌종의 첫 번째 왕비 효현왕후 김씨가 창덕궁 대조전에서 16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헌종의 나이도 이제 17세. 새로운 왕비를 맞이해야 했고, 왕비 승하 후 1년여만인 1844년 10월 18일 남양 홍씨 홍재룡의 딸을 계비(효정왕후)로 맞이하였다.

그런데 효정왕후가 계비로 간택된 지 3년 만인 1847년(헌종 13) 7월에 대왕대비인 순원왕후는 언문 교지를 내려, 중전에 병이 있다는 이유로 헌종의 후궁을 간택하게 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내린다.

“국조(國朝)의 전례를 따라 사족(士族) 가운데에서 처자(處子)를 가려 빈어(嬪御:후궁)에 둔다면 저사(儲嗣:왕위를 이음)를 널리 구하는 도리가 오직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제 언문으로 조정에 하교하는 것은 매우 미안하나 이것은 실로 국가의 대계(大計)이므로 어쩔 수 없이 이처럼 누누이 하니, 경(卿)들은 종사의 큰 경사가 있을 도리를 생각해야 한다.”고 하여, 후궁의 간택이 왕의 후계자를 만들게 하는 조처임을 알렸다.

14세부터 19세까지 처녀에 대한 금혼령이 내려졌고, 이해 10월 20일 주부 김재청(金在淸)의 딸을 간택하여 경빈(慶嬪)으로 책봉하였다. 경빈 김씨(1832~1907)의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광산 김씨는 조선후기 송시열의 스승인 김장생과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를 배출한 명문 가문이었다.

후궁을 간택하면서 가례청(嘉禮廳)을 설치하고 가례를 행한 것도 특별한 일이었다. 그만큼 경빈에 대한 예우와 후사를 잇게 하려는 기대가 컸던 것이다. 헌종과의 가례 이후 경빈 김씨는 순화궁(順和宮)이라는 궁호를 받았다.
낙선재는 낙선재만을 지칭하기도 하고, 낙선재·석복헌·수강재의 3개 건물을 함께 지칭하기도 한다.
낙선재는 낙선재만을 지칭하기도 하고, 낙선재·석복헌·수강재의 3개 건물을 함께 지칭하기도 한다.

헌종이 후궁인 경빈 김씨를 총애한 상징적인 공간이 낙선재 동쪽에 지은 석복헌(錫福軒)이다. 현재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에 위치한 낙선재는 낙선재만을 지칭하기도 하고, 낙선재, 석복헌, 그리고 수강재(壽康齋)의 3개 건물을 함께 지칭하기도 한다.

수강재는 대비인 순원왕후를 위해 지은 건물로, 대비에게서도 경빈 김씨와의 관계를 인정받으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낙선재는 헌종이 20대 이후 본격적으로 왕권 강화를 시도하던 시기인 1847년 헌종에 의해 건립되었다.

「동궐도」 를 보면 낙선재는 창경궁 영역에 속해 있지만, 현재는 창덕궁으로 입장을 해야 볼 수 있다. 헌종의 문집인 『원헌고(元軒稿)』에 수록된 「낙선재 상량문(上樑文)」에는 순(舜) 임금의 ‘선(善)을 즐거워했다.’는 것과 화려함을 쫓지 않고 소박함을 내세우고자 한 뜻을 담아서 낙선재에 단청을 칠하지 않았음 파악할 수 있다.

낙선재 건립 이듬해인 1848년(헌종 14) 8월 11일, 헌종은 경빈 김씨의 공간인 석복헌을 지었다. 석복헌은 ‘복(福)을 내리는 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복(福)은 왕세자를 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헌종이 후궁 경빈 김씨를 총애한 공간이 
낙선재 동쪽에 지은 석복헌이다.

정조를 멘토로 삼았던 헌종은 후궁을 맞이하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행보를 이어갔다. 정조가 정미년인 1787년(정조 11)에 후궁인 수빈(綏嬪) 박씨를 들이고 그녀를 집복헌(集福軒)에 거처하게 한 것과 같이, 헌종은 꼭 60년만인 1847년 10월 경빈을 후궁으로 맞이했고, 그녀를 위해 석복헌을 조성했다. 

수빈 박씨가 집복헌에서 순조를 낳은 것과 같이 경빈 김씨가 석복헌에서 자신의 아들을 낳기를 간절히 고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헌종의 기대와 달리 경빈은 후사를 두지 못했고, 경빈을 맞이한 지 불과 2년도 되지 못한 1849년 6월 6일 헌종은 창덕궁 중희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경빈 김씨가 말년을 보낸 순화궁

헌종이 승하한 후 경빈 김씨는 궁궐 밖을 나가야 했고, 이때 그녀가 거처한 곳이 순화궁(順和宮)이다. 순화궁은 한성 중부, 현재의 인사동에 있었던 궁이다. 능성(綾城) 구씨(具氏) 집안에서 이곳에 대대로 살다가 19세기에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의 중심이었던 김조순의 조카 김흥근의 소유로 넘어갔다. 경빈 김씨가 헌종 사후 김흥근의 집에 머무르게 되면서, 경빈의 궁호인 순화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경빈은 1907년 76세로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 살았다. 『고종실록』 1907년 6월 1일에는 “경빈 김씨가 졸(卒)하였다. 이에 대해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경빈은 연세가 높아도 아직 정력이 강건하였으므로 병환이 깊긴 해도 내심 회복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는데 문득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경빈 사후 순화궁은 1908년 궁내부 대신이던 이윤용에게 넘어갔고, 곧 이완용이 이곳을 차지했다. 이후 이완용은 순화궁을 전세로 내놓았고, 이곳에 들어온 명월관 사장은 분점 태화관(太和館)을 세웠다.
순화궁에는 이완용이 살았고
이후 태화관이 들어섰다.  
이곳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로 보인다.

태화관에서 3·1독립선언서가 낭독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이완용이 한때 거처했던 곳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로 보인다. 태화관은 1921년에 감리교 선교부가 매입하여 ‘태화여자관’이라는 이름의 감리교 포교지 및 여성복지 사회재단으로 거듭 태어났다.
태화빌딩 옆 '3.1운동 100주년 기념비'
태화빌딩 옆 '3.1운동 100주년 기념비'

태화관 건물은 일제강점 말기에는 징발, 해방 후에는 경찰서 청사 등으로 사용되다가, ‘태화기독교사회관’으로 운용되기도 하였다. ‘태화기독교사회관’은 1980년 도시개발계획으로 헐렸고, 현재 이곳에는 ‘태화빌딩’이 들어서면서 ‘태화’라는 이름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태화빌딩 앞에 있는 ‘순화궁터’라는 표지석은 이곳이 경빈 김씨의 거처임을 기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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