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의 그림 '청풍계'는 서울 어디일까?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3.04.12. 15:53

수정일 2023.04.12.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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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교수
안동 김씨가 세도 정치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건 왕실과의 혼인이었다. 사진은 순원왕후의 부 김조순의 묘.
안동 김씨가 세도 정치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건 왕실과의 혼인이었다. 사진은 순원왕후의 부 김조순의 묘.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44) 세도정치의 중심 안동 김씨

조선의 역사에서 19세기 초·중반은 흔히 세도정치(勢道政治) 시기로 불리고 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한 후 순조(純祖:1790~1834, 재위 1800~1834)는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였고, 순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을 때 헌종(憲宗:1827~1849, 재위 1834~1849)의 나이는 8세였다. 철종(哲宗:1831~1863, 재위 1849~1863)은 즉위 시 나이는 19세였지만, 선대에 역모 혐의를 받아 강화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왕이 될 수업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왕의 권위가 실추된 상황에서 외척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세도정치의 시대가 왔고, 세도정치의 중심에 있던 성씨가 바로 안동 김씨였다. 순조, 헌종, 철종 3대에 걸쳐 왕비를 배출한 안동 김씨의 전성기가 시작되었고, 그들이 기반으로 삼았던 세거지와 별장의 흔적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

안동 김씨의 세거지, 청풍계

19세기 안동 김씨가 세도 정치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은 왕실과의 혼인이었다.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는 김조순(金祖淳)의 딸이었으며, 헌종의 왕비 효현왕후는 김조근(金祖根)의 딸이었다. 강화도에 있다가 왕이 된 후에 혼례를 치룬 철종의 왕비 또한 안동 김씨 김문근(金汶根)의 딸이었다.
안동 김씨가 정치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건
왕실과의 혼인이다. 
순조, 헌종, 철종의 왕비가 
안동 김씨 집안의 딸이었다.

19세기에 이르러 안동 김씨는 이름에 ‘순(淳)’ 자, ‘근(根)’ 자가 들어가는 항렬에 이어 ‘병(炳)’ 자 항렬까지 그야말로 전성기를 이루었다.

시조 김선평(金宣平)이 고려 태조 왕건을 하사받아 안동을 본관으로 탄생한 안동 김씨는 16세기 서울에 기반을 두게 된다. 사헌부 장령(掌令)을 지낸 김영수(金永銖)의 둘째 아들 김번(金璠:1479~1544)의 후예들이 백악산 아래 장동(壯洞:현재 서울 종로구 청운동 일대)에 자리를 잡으며, 장동 김씨나 장김(壯金), 또는 신안동 김씨로 불리게 되었다.

김번은 1513년 문과에 급제하여 평양서윤을 지냈다. 김번의 후손 중 대표적인 인물이 인조 때 척화파의 중심이었던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1561~1637)과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1570~1652)이다.

김상용과 김상헌 형제에 이어, 김상헌의 손자 김수항(金壽恒)은 숙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김수항의 아들들은 창(昌)자 항렬로, 소위 육창(六昌)으로 불렸다. 영의정 김창집, 대제학 김창협, 사헌부 집의 김창흡, 이조참의 김창업, 왕자사부 김창즙, 김창립 형제는 정치와 학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장동 김씨가 조선후기 최고의 명문가로 자리를 잡는데 기여를 했다.

김창집의 현손 김조순의 딸이 순원왕후가 되면서 왕실과의 혼인도 굳건히 이어갔다. 김조순은 국구로서 영안부원군에 봉해졌고, 헌종의 왕비 효현왕후, 철종의 왕비 철인왕후에 이르기까지 세도 가문이 되었다.
겸재 정선의 ‘청풍계’
겸재 정선의 ‘청풍계’

장동 김씨, 정선을 후원하다

장동 김씨의 세거지가 된 곳은 김상용이 거처했던 청풍계(淸風溪)로서, 원래 푸른 단풍나무가 많은 계곡이라는 의미의 ‘청풍계(靑楓溪)’라고 불리다가 김상용이 이곳에 집터를 물려받으면서 맑은 바람이 부는 계곡이라는 의미인 ‘청풍계(淸風溪)’로 바뀌었다.

청풍계의 모습은 장동 김씨가 후원한 화가 정선의 그림을 통해 그 실체가 눈에 들어온다. 18세기 ‘창(昌)’ 자 항렬인 장동 김씨들은 인근에 살던 화가 정선(鄭敾:1676~1759)을 적극 지원했다. 인왕산 인근에 살던 정선은 김창협, 김창흡, 김창업의 문하에 드나들면서 성리학과 시문을 수업받았고, 이들 집안과 깊은 인연을 쌓아갔다.
인왕산 수성동 계곡. 겸재 정선의 그림에 등장할 정도로 아름다운 계곡이다.
인왕산 수성동 계곡. 겸재 정선의 그림에 등장할 정도로 아름다운 계곡이다.

장동 김씨 가문은 정선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보고 학문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15~17세기 피렌체를 실질적으로 지배한 메디치 가문이 수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을 후원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를 만든 모습과도 유사점이 발견된다. 정선은 인왕산을 비롯하여 인왕산 일대의 주요 공간을 그림으로 남겼는데, ‘청풍계’는 더욱 정성을 다하고 여러 번 작품을 남겼다. 자신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장동 김씨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던 것으로 보인다.

청풍계인왕산 동쪽 기슭의 북쪽 현재의 청운동 일대의 골짜기로, 김상용의 고조부가 살던 집터를 김상용이 별장으로 확장한 것이다. 병자호란 때인 1637년 1월 청나라군이 강화도를 함락시킬 때 김상용은 남문을 지키다가 폭약을 안고 자결하였다. 동생 김상헌은 남한산성에서 끝까지 척화론을 주장하면서, 김상용, 김상헌은 병자호란 이후 충절의 아이콘으로 기억되었다. 그만큼 가문의 위상도 높아졌다.
바위에 새겨진 백세청풍(百世淸風)
바위에 새겨진 백세청풍(百世淸風)

김상용의 후손 김양근(金養根)이 1766년(영조 42) 청풍계의 규모와 경치를 자세하게 기록한 ‘풍계집승기(楓溪集勝記)’는 영조 시대 청풍계의 모습을 생생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청풍계는 우리 선세의 옛 터전인데 근래에는 선원(仙源:김상용의 호) 선생의 후손이 주인이 되었다.”는 기록에 이어, “석벽 위에 백세청풍(百世淸風) 네 글자가 새겨져 있으므로, 또한 청풍대(淸風臺)라고 한다.”는 기록이 보인다.
석벽 위에 백세청풍(百世淸風) 
네 글자가 새겨져 있으므로
청풍대(淸風臺)라고 한다.
- ‘풍계집승기(楓溪集勝記)’ 중에서

현재에도 청운초등학교를 끼고 들어가는 골목길의 어느 주택 안 담벼락에 ‘백세청풍’ 네 글자가 새겨진 바위를 만날 수가 있다. 그림 속 청풍계의 바위에 새겼던 글씨가 현재의 우리 눈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청풍계가 위치했던 곳에는 한국 현대사를 대표하는 기업가 정주영(鄭周永:1915~2001) 회장이 생전에 살았던 저택이 있다. 그만큼 이곳이 시대를 초월하여 거주지로서의 가치가 큰 곳임을 보여주고 있는데, 정주영 회장은 매일 새벽 6시면 청운동 자택에서 계동에 위치한 현대사옥까지 걸어 다녔던 일화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가 되고 있다.

김조순의 별장 옥호정

현재의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133-111번지 주변에 표지석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옥호정 터’라는 표지석은 이 근처에 옥호정(玉壺亭)이 있었음을 알려주는데, 옥호정은 순조의 장인으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전성기를 연 인물 김조순(金祖淳:1765~1832)의 별장이었다.

옥호정은 사라졌지만 그 모습은 ‘옥호정도(玉壺亭圖)’라는 그림으로 남아 있어서, 당시의 화려한 저택의 모습을 실감이 나게 한다. 특히 옥호정도의 북쪽에 그려진 ‘일관석(日觀石)’이라고 새긴 바위가 현재 백악 동쪽 산 중턱에 남아 있어서 옥호정의 위치를 짐작하게 한다.
옥호정도, 작자 미상
옥호정도, 작자 미상

‘옥호정도’의 작자는 미상이며, 역사학자 이병도(李丙燾:1896~1989)가 문교부 장관으로 재직할 당시부터 보관해 오던 것을 그의 손자 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국립중앙박물관장에 기증하여 전해져 오고 있다.

옥호정도를 보면 옥호정은 백악 중턱 아름다운 산록에 둘러싸여 있고 넓은 후원과 정자각을 비롯하여, 텃밭과 벌통까지 그려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본체는 기와 지붕을 하고 있으며, 행랑채와 하인들의 거처까지 보인다. ‘옥호산방’이라 쓴 편액이 걸린 건물은 바깥 사랑채로 보이며, 숲 사이에 죽정(竹亭), 산반루(山伴樓), 첩운정(疊雲亭) 등이 나타난다. 

석벽에 새겨진 ‘을해벽(乙亥壁)’이라는 글씨는 옥호정을 조성한 시기가 을해년인 1815년(순조 15)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옥호정사에 도착한 뒤로 
열흘 남짓 시를 짓지 않다가 
단오일에 우연히 꾀꼬리 소리를 듣고 
내키는 대로 방옹의 시체를 모방해 짓다
풍고집(楓皐集)

김조순이 옥호정을 자주 들렀던 모습은 그의 문집인 『풍고집(楓皐集)』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다. 눈 속에 옥호정으로 들어와 시를 짓고, 늦봄에 옥호정에 와보니 바위 위에 두견화가 비로소 피었기에 시를 지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옥호정사에 도착한 뒤로 열흘 남짓 시를 짓지 않다가 단오일에 우연히 꾀꼬리 소리를 듣고 내키는 대로 방옹의 시체를 모방해 짓다.’, ‘봄날 밤에 옥호정사(玉壺精舍)에서 잤다.’ ‘옥호정사에서 시사(詩社)의 벗들과 함께 짓다.’라는 기록 등을 통하여, 사시사철 옥호정에 들러 시를 짓곤 하던 김조순의 모습을 만날 수가 있다. ‘옥호정사에 영산홍이 만발하다.’는 시를 통해서는 영산홍으로 가득 찬 옥호정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조선전기의 학자 성현(成俔:1439~1504)이 쓴 수필집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서울에서 경치가 뛰어난 곳을 언급하면서, ‘삼청동이 가장 좋다.’고 했다. 최고의 풍광을 자랑하는 곳에 대저택을 지은 김조순의 모습을 통해서, 19세기 세도정치 시기 화려한 삶을 살았던 장동 김씨의 모습을 접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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