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소매' 성덕임과 그의 아들의 묘가 '효창공원'에?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3.02.08. 16:00

수정일 2023.02.21. 10:30

조회 4,370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애국선열들의 영정을 모신 의열사의 문 '의열문'
애국선열들의 영정을 모신 의열사의 문 '의열문'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40) 문효세자와 효창원

2021년 11월부터 2개월 정도 방송된 사극 ‘옷소매 붉은 끝동’은 사극의 새로운 모습을 제시하면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 사극의 배경이 되던 시대는 정조와 후궁 의빈(宜嬪) 성씨(成氏) 성덕임(成德任)의 로맨스가 극의 중심을 이루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탄생한 문효세자(文孝世子:1782~1786)는 5세의 나이로 요절하였기에 별다른 존재감이 없지만, 정조가 그를 위해 조성한 무덤 효창원(孝昌園)은 현재까지 효창동, 효창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이어지고 있다.

문효세자의 짧은 생애

정조는 왕비 효의왕후(孝懿王后:1753~1821)의 사이에서 자식을 보지 못했기에 후계 문제로 고민을 많이 했다. 이 과정에서 정조의 후궁으로 들어온 의빈 성씨(1753~1786)가 1782년에 낳은 아들이 문효세자였다.

정조가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御製宜嬪墓誌銘)」에 의하면, “의빈 성씨는 처음 승은을 내렸을 때 내전(효의왕후)이 아직 귀한 아이를 낳아 기르지 못했다며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이에 감히 명을 따를 수 없다며 죽음을 맹세했다. 나는 마음을 느끼고 더는 다그치지 못했다. 15년 뒤에 널리 후궁을 간택하고 다시 명을 내렸으나 빈은 또 거절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정조의 승은을 두 번이나 거절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의빈이 낳은 문효세자는 정조에게는 첫 자식이었고, 왕실에서는 최대의 경사였다. 당시의 기쁨을 1782년(정조 6) 9월 7일의 『정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왕자가 탄생하였다. 왕이 승지와 각신(閣臣)들을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궁인(宮人) 성씨(成氏)가 태중(胎中)이더니 오늘 새벽에 분만하였다. 종실이 이제부터 번창하게 되었다. 내 한 사람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이 나라의 경사가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으므로 더욱더 기대가 커진다. ‘후궁은 임신을 한 뒤에 관작을 봉하라.’는 수교(受敎)가 이미 있었으니, 성씨를 소용(昭容)으로 삼는다.” 하니, 신하들이 경사를 기뻐하는 마음을 아뢰었다. 왕이 이르기를, “비로소 아버지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하였다.
궁인 성씨가 태중이더니 오늘 새벽에 분만하였다.
종실이 이제부터 번창하게 되었다. 
비로소 아버지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정조실록』중에서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정조는 자신이 이제야 아버지라는 호칭을 듣게 된 것에 대해 너무나 감격하고 있다. 1782년 11월 27일에는 원자의 호칭을 정하였고, 1783년 2월 19일에는 소용 성씨에게 의빈 성씨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소용이 정 3품이고, 빈이 정 1품으로 후궁의 최고 품계인 점을 고려하면 문효세자의 출생으로 의빈은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고 볼 수 있다. 의빈이 후궁 출신임에도 그녀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한 것은 효의왕후에게서 아들의 출산을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1784년 7월 2일에는 원자를 책봉하여 세자로 삼았다. 당시 문효세자의 나이는 3세로, 2세에 세자로 책봉된 사도세자에 이어 매우 이른 세자 책봉이 단행되었다. 7월 6일에는 세자의 이름을 정하였으며, 8월 2일 정조는 창덕궁 인정전에 나아가서 책봉사(冊封使)를 떠나보내고, 왕세자로 하여금 중희당(重熙堂)에서 책문(冊文)을 받게 하였다. 왕세자 책봉을 선포하는 의식을 거행한 것이다.

이처럼 빠른 기간에 정조의 후계자가 되었던 문효세자의 생애는 그리 길지 못했다. 1786년 4월부터 전국에 유행병 홍역이 돌았고, 결국 홍역의 희생양이 되었다. 5월 11일의 『정조실록』은 “왕세자가 훙서(薨逝)하였다. 세자의 병 증세가 갈수록 심해지자, 시약청을 설치하고 대신을 파견하여 재차 사직과 종묘에 기도하였다. 이날 미시(未時)에 창덕궁의 별당에서 훙서하였다.”고 이제 겨우 5세가 된 세자의 죽음을 알리고 있다.
세자의 병 증세가 갈수록 심해지자, 
시약청을 설치하고 대신을 파견하여 
재차 사직과 종묘에 기도하였다. 
『정조실록』중에서 

효창원의 조성

문효세자의 묘소가 처음 조성된 곳은 당시의 고양군 율목동(현재의 용산구 효창동)이었으며, 1786년 윤7월 19일의 『정조실록』에는 “문효세자를 효창묘(孝昌墓)에다 장사지냈다. 이날 새벽에 발인을 하였는데, 왕이 홍화문(弘化門) 밖에 나와서 곡하고 전별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문효세자가 죽고 5개월 뒤인 9월 14일, 의빈 성씨가 이름 모를 병으로 사망하였다. 정조는 연이어 아들과 부인을 잃는 아픔을 겪은 것이다. 정조는 의빈 성씨를 문효세자의 묘소 왼쪽 언덕에 묻어주었다. 『정조실록』 1786년 11월 20일의 기록에는 “의빈 성씨의 장사를 치렀는데, 효창묘의 왼쪽 산등성이였다.”고 기록을 하고 있다. 의빈묘와 효창묘는 한곳에 있고 두 묘의 거리가 백 걸음 떨어져 있는데, 정조가 의빈의 생전 소망을 들어준 것이었다.
고양 서삼릉에 위치한 문효세자의 ‘효창원’
고양 서삼릉에 위치한 문효세자의 ‘효창원’

의빈과 세자의 묘소가 있는 이곳에 정조가 자주 거둥(왕의 행차)을 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고개에는 ‘거둥고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가 있는 현륭원에 행차 후 서울로 돌아올 때 고개가 마지막 보이는 곳에서 천천히 천천히 가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현재 수원시 노송 지대에 있는 ‘지지대(遲遲臺) 고개’의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하였으니, 정조는 고개 이름과도 인연이 깊은 왕이다.

효창묘가 있는 곳에는 이후에 순조의 후궁인 숙의 박씨와 그녀의 딸 영온옹주의 묘소가 들어서면서 왕실 묘역으로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고종 때인 1870년(고종 7)에는 ‘효창묘’에서 ‘효창원’으로 승격되었다. 원(園)은 왕이 되지 못한 왕의 사친(아버지와 어머니)이나 세자의 묘소에 붙는 호칭이다. 효창원은 일제강점 시기에 일제에 의해 경기도 고양시의 서삼릉으로 강제 이장되었다. 의빈묘는 1940년에 후궁 묘약으로, 문효세자의 효창원은 1944년에 이장되었다. 이로 인해 문효세자는 어머니 의빈 성씨의 무덤과는 2km 정도 떨어지게 되었다. 모자가 100보 가까이 나란히 묻히게 한 정조의 뜻이 일제에 의해 훼손되게 된 것이었다.

근, 현대 시기의 효창원

일제는 1921년 효창원 등이 있는 조선 왕실의 묘역에 최초의 골프장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만철)를 세워 조선철도국을 위탁 경영한 일제는 조선에서도 골프장을 세울 것을 모색하였다.

조선철도국은 환구단 옆에 있던 조선철도호텔과 경성역에서 가깝고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효창원을 낙점하였다. 조선 왕실의 묘소가 있던 곳이어서 자연환경도 뛰어났고, 토지 확보가 수월한 국유지였기 때문이었다.
효창원에 조성된 최초의 골프장
효창원에 조성된 최초의 골프장

9홀 코스로 효창원에 조성된 최초의 골프장은 1924년에 폐장되었고,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이재민들의 천막촌이 들어선 수용소가 들어섰다. 1927년 이후에 일제는 이곳의 절반 이상을 공원으로 만들었다. 1940년 총독부 고시로 ‘효창원’을 ‘효창공원’으로 고시하였고, 1944년에는 효창원 등 대부분의 왕실 묘소를 서삼릉으로 강제 이전시켰다. 이곳에 침략전쟁으로 희생된 희생자들의 충령탑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1945년 해방 후 김구 선생은 효창원이 있던 곳에 독립운동가 묘역을 조성하였다.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안장한 삼의사묘(三義士墓)와 이동녕, 조성환, 차이석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임시정부 요인 묘역이 그곳이다. 안중근 의사의 가묘(假墓)까지 만들었으나, 안중근의 유해는 아직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1949년 서거한 김구 선생의 묘소도 이곳에 조성되었다.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안장한 삼의사묘(三義士墓)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안장한 삼의사묘(三義士墓)

1960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용 운동장인 효창운동장이 조성되어, 주요 국제, 국내 경기를 개최하였다. 필자에게는 1970년대 효창운동장에서 개최한 실업 축구 중계방송이 기억 속에 남아있다. 2002년에는 백범 김구 기념관이 건립되어, 이제 효창공원은 독립운동가들의 넋을 기리고, 독립정신을 함양하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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