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한강을 건넌 후 잠시 쉬어가던 정자, 용양봉저정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3.01.26. 15:29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39) 정조와 용양봉저정
‘용양봉저정’의 옛 이름은 ‘망해정’
“나루를 배로 건너자면 그 역사가 너무 거창하고 비용도 너무 과다하기 때문에 노량강(鷺梁江)에다 주교를 설치하고 관사를 두어 그 일을 맡게 했으며, 강가의 작은 정자 하나를 구입하여 임시로 머무는 곳으로 삼았다. 그 정자의 옛 이름은 망해(望海)였는데, 그 이름의 유래는 발돋움을 하고 서쪽을 바라보면 허명(虛明)한 기운이 떠오르고 거기가 바로 우리나라의 서해(西海)이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면 그 정자가 먼 곳을 바라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만하다.”고 하여, 용양봉저정은 처음 ‘망해정’으로 불렸음을 알 수가 있다.
이어서 “지금 보면 북쪽에는 높은 산이 우뚝하고, 동에서는 한강이 흘러와 마치 용이 꿈틀꿈틀하는 것 같고, 봉이 훨훨 나는 듯하다. 찌는 듯한 광영(光榮)이 상서로운 기운으로 엉기어 용루(龍樓)와 봉궐(鳳闕) 사이를 두루 감싸고 있으면서 앞으로 억만년이 가도록 우리 국가 기반을 공고히 할 것이니 그렇다면 그 상서가 어찌 얼음이나 오색화 따위 정도이겠는가?” 하고는 “그 자리에 나온 대신에게 ‘용양봉저정’이라고 크게 써서 문지방 위에다 걸게 하고, 이어 그 내용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라고 하여, 정조가 직접 ‘용양봉저정’으로 이름을 고친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망해정은 원래 영의정을 지낸 이양원이 소유한 별장이었으나, 정조가 이를 구입했다고 한다. 1790년 12월 7일 『정조실록』에는 “현륭원(顯隆園:사도세자의 묘소)의 행차를 위하여 주교를 설치하게 되는데, 듣건대 다리가의 주정소를 노량에 정하고 이승묵(李承默)의 선조 때부터 대대로 살던 집을 사서 수리한다고 한다.
또 경연관에게 들으니, 이 집은 고 정승 이양원(李陽元)의 교외 정자인데 그는 노량에 터를 잡고 살면서 노저(鷺渚)로 자기의 호를 지었고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사적이 있다고 하기에, 그의 문집을 가져다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 그런데 지금 그 정자가 관청으로 넘어가고 옛 사실을 기념하는 조치가 없으니 이것이 어찌 노래를 지어주면서 총애한 뜻을 계승하는 것이겠는가. 또 선왕조 을유년에 이 정자에서 생각이 나서 특별히 제사를 지내게 하고 술을 내린 거룩한 뜻을 어기는 일이다. 주인집에 이 뜻을 알리고 별도로 그 곁에 정자 하나를 지어 옛모습을 없애지 말고 편액도 옮겨서 걸게 하라.”고 하여, 정조가 직접 이곳을 주정소로 활용할 것을 지시한 내용이 보인다.
정조의 화성 행차 중 가장 대규모의 행렬이 동원된 1795년 윤2월의 행차에서, 정조는 용양봉저정에서 점심 수라를 드셨음이 나타난다. “이해 윤 2월 9일에 자궁(慈宮·어머니)을 모시고 출궁하였는데, 가마를 따르는 관원이 129명, 장관(將官)이 49명, 각 차비가 43명, 장교가 236명, 원역(員役)이 1108명, 군병이 3,410명, 내관(內官)이 12명, 나인이 31명, 액속(掖屬)이 113명이었다.”고 『홍재전서』의 기록에는, 다수의 인원이 용양봉저정에서 휴식을 취했음을 알 수가 있다. 윤2월 16일 창덕궁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정조는 이곳에서 점심 수라를 드셨음이 기록으로 보인다.
서울로 돌아오는 2월 1일에도 “왕이 화성 행궁을 떠나 장안문 안에 이르러 성안의 부로(父老)들을 불러 위로하였다. … 지지대(遲遲臺)에 이르러 잠깐 머물렀다가 사근행궁(肆覲行宮)과 안양 역참을 지나 시흥 행궁의 주정소에 들러 경기 관찰사 이면응(李冕膺)과 지방관 김사희(金思羲)를 불러 보았다. 용양봉저정에 이르러 주교사(舟橋司) 당상 정민시(鄭民始)를 불러 보고 주교사에 소속된 장교와 이속(吏屬)과 선인(船人) 등에게 상을 내렸다. 저녁에 창덕궁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정조가 창덕궁으로 환궁을 할 때도 용양봉저정에서 휴식을 취했음을 알 수가 있다. 특히 주교사 당상 정민시 이하 주교사 소속 관리들을 격려한 모습에서는 용양봉저정이 주교가 설치된 노량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공간임을 보여준다.
정조 이후의 용양봉저정...헌종, 고종이 머물렀다 간 기록 남아
임금의 호위 대열은 난간 주위를 둘러쌌네 / 鹵簿分頭擁迊欄
용양봉저정 정자 아래에는 / 鳳翥龍驤亭子下
봄추위 풀리면서 버드나무 눈이 트네 / 嫩黃煙柳解春寒
고종도 용양봉저정을 주정소로 활용했음이 나타난다. 『고종실록』 1867년(고종 4) 9월 9일 기록에는 “용양봉저정 행궁에 행차하여 수조(水操:수군의 조련)를 행하였다. 밤에는 횃불을 올리는 것을 관람하였다.”고 하여, 용양봉저정에서 수군의 훈련 모습을 직접 참관했음이 나타난다. 1867년 9월 12일에는 “남한산성의 행궁에서 돌아와 용양봉저정으로 나아가 잠깐 머물러 있다가 주교로 강을 건너 환궁(還宮)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현재 용양봉저정은 한강대교 남쪽 노량진 수원지 건너편 언덕에 북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데 정면 6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도 한강의 물굽이가 흘러가는 모습이 잘 내려 보이는 용양봉저정을 찾아, 부친에 대한 효심을 지켜나간 정조의 모습을 기억해 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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