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부터 철종까지, 수난 많은 경희궁과 왕들의 이야기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2.12.22. 17:25

수정일 2022.12.22. 18:35

조회 10,598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37) 경희궁과 숙종, 영조, 정조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눈 내린 경희궁
눈 내린 경희궁

경희궁은 광해군 때인 1617년 공사를 시작하여, 1620년(광해군 12)에 완공됐다. 광해군이 창건한 이래 경희궁은 조선후기 역대 왕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왕들의 즉위식이 여러 차례 이루어졌고, 창덕궁, 창경궁 못지않게 왕이 거처하는 궁궐이 되었다. 조선후기 숙종, 영조, 정조와 경희궁과의 인연을 알아보자.

숙종, 영조, 정조와 인연이 깊은 궁궐

『궁궐지』의 기록에 의하면 창건 때 정전, 동궁, 침전, 별당 등 1,500여칸에 달하는 건물이 있었으며, 1620년에 완공됐다. 그러나 완공의 당사자 광해군은 1623년의 인조반정으로 경희궁에 입궁하지 못한 채, 왕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관련기사] 광해군이 경희궁을 지은 사연…왕의 기운 얻고자 했으나 몰락 불러와

인조반정으로 창덕궁의 전각이 소실되고,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 공주로 피난을 한 후에는 거처를 경희궁으로 옮겼다. 1624년(인조 2) 인조는 종묘에 나아가 신주를 봉안하고 돌아와서는 경희궁에서 순직자의 직위를 추증하고 순절자에게 정표를 내렸다.

1627년(인조 5) 후금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피난을 한 후 한양으로 돌아온 후에도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에 번갈아 머물렀다. 『승정원일기』 1632년(인조 10) 10월 27일의 “내년 봄 경덕궁(경희궁의 옛 이름)으로 돌아올 것이니 긴요하지 않은 아문을 창경궁에 들이라.”고 한 지시에서 인조가 경희궁과 창경궁에 번갈아 거처를 정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인조 이후 경희궁에 거처한 왕은 현종이다. 현종은 재위 기간을 주로 경희궁에서 보냈는데, 1661년(현종 2) 현종과 명성왕후 사이에서 적장자 숙종이 회상전에서 태어났다.
경희궁 숭정문, 이곳에서 경종과 정조가 즉위식을 올렸다.
경희궁 숭정문, 이곳에서 경종과 정조가 즉위식을 올렸다.

경희궁과 특히 인연이 깊은 왕은 숙종이다. 숙종은 1661년 회상전에서 탄생하였고, 재위 46년간 창덕궁과 경희궁을 오갔다. 1680년 10월 도성 안에 천연두가 크게 유행하고, 왕비 인경왕후가 천연두에 걸리자 거처를 창경궁으로 옮겼다.

1688년(숙종 14)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하여 민심이 흉흉해지자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1717년(숙종 43)에는 왕세자(경종)에게 정사를 맡기고, 경희궁에서 여생을 보내던 숙종은 1719년(숙종 45)에 보령 60세의 헌수 하례를 숭정전에서 받았고, 4월에는 경현당에서 기로연을 베풀었다.

1720년(숙종 46) 6월 8일 숙종은 융복전에서 승하하면서 경희궁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숙종의 승하 후 경종은 경희궁의 정문인 숭정문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경희궁에서 즉위식을 올린 최초의 왕이 된 것이다.

숙종처럼 경희궁에 많이 거처했던 왕은 영조이다. 영조는 1760년(영조 36)에 궁궐 이름을 경덕궁에서 경희궁으로 개칭하였는데, 원종(인조의 생부)의 시호에 ‘경덕’이 들어가 있어서, 이를 피해 궁궐 이름을 고친 것이다.

경희궁은 광해군 8년에 지은 것인데 처음에 이름을 경덕궁이라고 하였으나, 영조 36년(1760)에 장릉(원종)의 시호와 같다고 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가 금상 을축년(1865, 고종2)에 철거하여 경복궁의 역사(役事)에 사용하였다.
-이유원, 『임하필기(林下筆記)』13권, 문헌지장편

1776년(영조 52) 3월 영조가 경희궁 집경당에서 승하하자, 정조는 1776년 8월 숭정문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태녕전을 선왕의 혼전으로 삼았다. 

정조와 경희궁과의 인연은 세손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정조는 1759년(영조 35) 왕세손으로 책봉된 뒤, 1762년 아버지 사도세자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지만, 왕세손의 신분으로 선왕인 영조가 있는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세손 정조는 1776년 왕위에 오를 때까지 경희궁에서 생활하였는데, 이때 경희궁 흥정당 동남쪽의 친현각을 2층 건물로 개축하였다. 

정조는 이 건물의 위층을 주합루, 1층을 존현각으로 이름을 붙이고, 서연의 중심 공간으로 삼았다. 『일성록』의 모태가 된 「존현각일기」는 이 무렵 정조가 쓴 일기이다.

정조는 즉위 후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겼다. 존현각에는 자객으로 의심되는 도적이 자주 나타나는 등 왕의 신변 경호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 정조가 암살 위협에 시달리던 상황에 착안하여 만든 영화가 2014년에 개봉된 영화 ‘역린’이었다. 정조는 1776년 8월 숭정문에서 즉위식을 올린 후에, 1777년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겼다. 

경희궁보다는 창덕궁이 궁궐로서의 격을 갖추고 있고, 특히 후원 영역이 잘 조성이 되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경희궁 자리에 건립된 서울역사박물관. 정문 앞에 남아있는 금천교
경희궁 자리에 건립된 서울역사박물관. 정문 앞에 남아있는 금천교

19세기 이후 경희궁의 운명

정조 이후 순조, 헌종, 철종도 경희궁에 일정 기간 머물면서 경희궁을 키워갔다. 그러나 순조 대 경희궁은 큰 화재로 건물 일부가 크게 훼손되었다. 

1829년(순조 29) 10월 3일에 창건 이래 가장 큰 규모의 화재가 발생하여 왕의 침전인 융복전과 왕비의 침전인 회상전, 편전인 흥정당, 사현합, 월랑 등 주요건물이 불탔다. 순조 대에는 1829년의 경희궁에 이어, 1830년 창경궁, 1833년 창덕궁에 화재가 일어났다. 

순조는 경희궁의 대규모 화재 이후 영건을 지휘하여 1831년(순조 31) 4월 공사를 마쳤으며, 영건도감에서는 1831년 6월부터 의궤 편찬에 착수하여 1832년 4월 『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를 완성했다. 

경희궁 중건에 쓰인 목재는 강원도에서 300주, 공충도(충청도의 옛 이름)에서 6,600주, 전라도에서 700주, 통영에서 600주, 황해도에서 7,000주(주로 서까래로 활용됨)였으며, 길이 20척이 넘는 큰 목재는 강원도에서 사 왔다. 

공사에 참여한 800여 명의 장인들에게는 정조 대의 화성 공사처럼 품삯을 지급했다. 순조는 1832년 7월 20일 새로 중건된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2년 후인 1834년(순조 34) 11월 13일 회상전에서 승하하였다.

헌종이 1834년 11월 18일 숭정문에서 즉위식을 가졌고, 철종은 1859년(철종 10) 9월 26일 창덕궁에서 경희궁으로 옮겼지만, 1861년(철종 12) 4월 12일 창덕궁으로 환어(還御)를 하면서, 경희궁 시대는 그 막을 내리게 된다. 고종 대인 1868년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경희궁은 궁궐로서 기능을 실질적으로 마감하게 되었다.

경희궁 건물이 크게 수난을 당하게 된 것은 고종 대인 1868년 경복궁 중건 사업을 하면서였다. 경희궁의 숭정전, 회상전, 사현합, 흥정당 등 건물 일부를 제외하고, 상당수의 전각을 경복궁 공사에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경희궁은 일제강점 시기에도 훼손되었다. 일제는 경희궁 자리에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를 설립하였다. 해방 후 경성중학교를 이은 서울고등학교가 자리하였고, 서울고등학교가 1980년 서초구로 이전한 후에는 서울역사박물관이 이 자리에 들어섰다. 

빈 공터에 1993년에서 1997년까지 박물관 건립 공사에 들어간 후 유물 수집 절차 등을 거쳐 2002년 5월 서울역사박물관으로 개관을 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원래 경희궁이 있던 자리에 건립한 만큼 경희궁 복원에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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