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혜화문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시민기자 조시승

발행일 2022.12.02. 09:20

수정일 2022.12.02. 18:29

조회 2,002

혜화문은 홍화문으로 불리다가 창경궁의 정문과 이름이 같아 변경됐고 위치도 옮겨졌다.
혜화문은 홍화문으로 불리다가 창경궁의 정문과 이름이 같아 변경됐고 위치도 옮겨졌다. ©조시승

흔히 역사와 관련된 전시는 딱딱하고 어렵다고 여긴다. 하지만 아이들도 이해하기 쉽게 애니메이션으로 스토리를 전개한 기획전으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전시가 있어 소개해 본다. 바로 한양도성박물관 2층에서 전시하고 있는 기획전 <그날, 혜화문에서는>이다. 

<그날, 혜화문에서는>에서는 시청각 자료를 활용하여 소문(小門)이면서도 대문(大問) 역할을 한 혜화문이 어떻게 세워지고 소실되고 다시 중건되어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였는지 연대별로 알기 쉽게 정리해 주고 있다. 또한 성문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을 경우 어떠한 처벌이 내려졌는지도 쉽게 알려주는 친근하고 재미있는 전시다. 
'그날, 혜화문에서는' 전시 포스터
'그날, 혜화문에서는' 전시 포스터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일반인들에게 4대문과 4소문을 알리기 위해 2017년부터 매년 도성의 4대문과 4소문 여덟 성문을 주제로 기획전시를 하고 있다. 올해는 <그날, 혜화문에서는> 전시를 마련해 '동소문(東小門)'이란 이름으로도 잘 알려진 '혜화문'의 건립과 그 역할, 그리고 변화상과 문의 개폐에 관한 에피소드를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다. 
동소문 방향에 혜화문으로 명기된 '한양도'. 한양도성 8문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동소문 방향에 혜화문으로 명기된 '한양도'. 한양도성 8문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조시승

서울 도성(都城) 소문 중 하나인 동북 쪽의 '동소문'은 '혜화문(惠化門)'으로 바뀌며 동소문동과 혜화동의 유래가 된다. 한양도성을 따라 지어진 4대문과 4소문은 조선 건국 초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수도인 한양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성곽의 문이다. 한양의 경계를 따라 쌓은 한양도성의 성문들은 백안산, 낙산, 남산, 인왕산의 지형에 조화를 이룬다. 

18.627㎞의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600여 년 세월 동안 서울시민의 삶을 지켜왔다. 한양도성은 전쟁을 목적으로 산 위에 쌓은 요새가 아니다. 조선왕조를 상징하고 수도 한성부를 구별, 그 영역을 관리하기 위하여 쌓은 도시 성곽이다. 왕조의 중심인 궁궐과 종묘를 보호하고 도시의 안과 밖을 엄격히 구별하면서 사산(四山)의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다. 
혜화문의 역사와 역할을 시청각 자료와 에피소드로 쉽게 알려주는 기획전시장 전경
혜화문의 역사와 역할을 시청각 자료와 에피소드로 쉽게 알려주는 기획전시장 전경 ©조시승

혜화문의 이름은 원래 '홍화문(弘化門)'이었는데, 이후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과 이름이 같아 혼동을 피하려고 '혜화문'이라고 변경했다. 혜화문은 어떻게 북대문인 숙정문이 있음에도 북대문 역할을 하였을까? 한양도성의 북쪽 4대문이었던 숙정문(肅靖門)이 풍수적 이유(음(陰)의 기운이 들어오는 통로라 이 문을 열어두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 진다는 설)로 폐쇄되는 바람에 사실상 한양 이북인 강원도, 함경도 등으로 가는 관문(북대문) 역할을 창의문(자하문)과 함께 하게 되었다. 

이 문을 나서면 수유현(지금의 수유리)을 거쳐 의정부·양주로 도로가 이어졌다. 혜화문을 통과하는 옛 사람들은 도성이북으로 머나먼 장도에 오르거나 여정을 마치고 귀경하는 문무관리들 또는 각지의 농산품을 운반하는 일반 백성들이었다. 죄를 짓고 유배를 떠나는 사람들도 이곳 혜화문을 거쳐 함경도나 철원 등 강원도로 떠나는 통한의 문이기도 했다. 또한 멀리 여진(女眞)의 사신들도 이 문을 통해 출입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 통치자 왕이 계신 수도 한양은 조선팔도 각지의 문물과 수많은 사람이 구름처럼 모이고 만나고 거래하고 헤어지며 훗날을 기약하는 장소였다.  
1783년 도성에 승려가 몰래 들어 온 사건을 구성한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1783년 도성에 승려가 몰래 들어 온 사건을 구성한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조시승

<그날, 혜화문에서는>은 지금으로부터 5백여 년 전 혜화문을 건설하고 임진왜란으로 소실, 중건을 거치는 과정과 함께  그 위상에 걸맞은 관리 방법을 안내한다. 문의 개폐 과정에서 있었던 일화들도 소개한다. 전시는 '혜화문을 열다'와 '그날, 혜화문' 두 부분으로 나뉜다.   

'혜화문을 열다' 부스에서는 홍화문으로 건설되어 혜화문으로 이름이 바뀐 이유와 도성문의 역할, 임진왜란 이후의 중건까지 혜화문의 역사와 위상 그리고 변화상을 소개한다. 옛 혜화문의 모습을 묘사한 겸재 정선의 <동소문도>를 비롯해 관련 문헌과 지도도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고려대박물관, 서울시 등 자료를 근거로 재구성했다.

혜화문은 조선왕조가 건국되고 5년 뒤인 1397년(태조 5)에 도성을 에워싸는 성곽을 축조하면서 함께 세웠다. 이때 도성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이 설치되었는데, 소문 가운데 동문과 북문 사이에 위치하였으므로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한다. 이 문을 나서면 수유현(지금의 수유리)을 거쳐 의정부·양주로 도로를 거쳐 강원도와 함경도로 가는 길로 연결되었다. 당시 북대문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혜화문은 양주·포천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출입구 구실을 하였다. 
겸재 정선의 <동소문도>. 그림 속 혜화문은 문루 없이 육축만 남아있다.
겸재 정선의 <동소문도>. 그림 속 혜화문은 문루 없이 육축만 남아있다. ©조시승

처음에는 문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으로 했다가 1483년(성종 14)에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을 역시 홍화문이라고 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해 1511년(중종 6)에 이름을 '혜화문'으로 고쳤다. 건물은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쳐 마지막으로 1684년(숙종 10)에 문루를 새로 지었다. 

그 뒤 구한말까지 동북 방면의 성문으로 보존되어 오다가 1928년에 도시의 확장과 더불어 헐렸다. 지금은 문이 있던 위치만이 알려져 있고 문과 관련된 유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문의 모습은 아래 쪽에 하나의 아치형 출입구를 둔 돌로 쌓은 육축(陸築)이 있고, 그 위에 누각을 올린 것으로, 전형적인 소규모 성문의 형태를 취하였다.
수문군이 성문관리를 소홀히 한 경우 곤장을 맞는 모습의 애니메이션
수문군이 성문관리를 소홀히 한 경우 곤장을 맞는 모습의 애니메이션 ©조시승

새로 지은 혜화문은 실제 위치에서 약 13m 떨어진 곳에 세워졌다. 기존에 혜화문이 있던 곳은 전차 노선 공사 때문에 지면을 낮춰 지어서 성곽과 같은 높이로 복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10m 정도 더 높은 언덕 위에 있었는데 도로공사로 평탄화하여 지형 자체가 변해 원래 있던 곳과는 7m정도 낮은 곳에 위치하게 되었다. 새로 건립한 혜화문 천장에는 봉황을 그려 넣었다. 인근에 새로 인한 피해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날, 혜화문' 부스에서는 18세기 어느 날 혜화문에서 있었던 다양한 사건·사고들을 통해 조선시대 혜화문 관리의 모습을 살펴본다. 승정원 기록에 등장하는 일화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애니메이션 영상을 통해 어린이들을 포함한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는다. 
궁중을 지키던 금군들이 밤에 성문을 출입할 때 사용하던 출입증인 ‘부험’
궁중을 지키던 금군들이 밤에 성문을 출입할 때 사용하던 출입증인 ‘부험’ ©조시승

혜화문 관리는 어떻게 했을까? 문은 어영청에서 보낸 6명의 수문군이 교대로 지켰다. 수문군은 인정(人定: 밤 10시경에 28번의 종을 쳐서 성문을 닫고 통행 금지를 알림)과 파루(罷漏 : 통행금지를 해제하기 위해 새벽 4시경에 종각의 종을 33번 쳤다) 시간에 맞춰 성문을 열고 닫았고, 부험(符驗: 금군들이 밤에 성문 출입시 사용하던 출입증)을 관리하였다.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파루시간이 되면 병조에 반납한 성문의 열쇠를 받아와 문을 열었고, 인정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수문군들은 성문을 닫고 빗장을 가로지른 후 문의 위와 아래를 각각 자물쇠로 잠갔다. 성문의 열쇠는 병조(兵曹)에 반납했다가 다음 날 새벽에 받아와 파루가 되면 다시 문을 열었다. 
기획전을 관람하는 시민들 모습. 가족 단위의 관람객도 많았다.
기획전을 관람하는 시민들 모습. 가족 단위의 관람객도 많았다. ©조시승

그런데 만일 문을 열려고 했다가 성문을 늦게 열었거나 잊어버렸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이에 대한 해설이 ‘1700년, 성문을 늦게 열다’, ‘1740년, 성문열쇠를 잃어버리다’라는 애니메이션으로 알 수 있다. 

또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4대문 안에 승려 출입이 금지되었는데, 시주받으러 다니는 승려들이 발각된다면 어찌 되었을까? 수문군이 폭행을 당하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한 이야기는 ‘1783년 승려가 몰래 들어오다’, ‘1790년 수문군이 폭행을 당하다’ 애니메이션에서 확인시켜준다. 

왕의 비서역할을 하는 승정원 일기에 의해 확인된 내용으로 대명률(大明律)에 의거, 문제가 생기면 엄하게 처벌받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주말에 방문한 전시장에는 관람객들이 대부분 가족 단위로 아이들과 함께 역사를 배우며 알아가는 모습이 흐뭇했다. 서울을 다녀간 조선시대 사람들의 사연이 담긴 혜화문의 시절과 혜화문을 지켰던 수문군들의 이야기를 재미있는 애니메이션으로 엿볼 수 있는 한양도성박물관 기획전시회를 가족 나들이로 추천하고 싶다.

한양도성박물관 기획전 <그날, 혜화문에서는>

○ 주소 :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283
○ 교통 : 1호선 동대문역 1번 출구, 4호선 동대문역 10번 출구 방향
○ 전시장소 : 한양도성박물관 2층 기획실
○ 관람일시 : 화~일요일 09:00~18:00
○ 휴관일 : 매주 월요일(공휴일 제외), 1월 1일
○ 관람료 : 무료
누리집
○ 문의 : 02-724-0243

시민기자 조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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