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혜의 요새 '북한산성' 어떻게 지어졌을까?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2.04.18. 14:29

수정일 2022.04.19. 09:14

조회 2,999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22) 숙종과 북한산성 수축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숙종은 재위 기간 기존의 한양도성을 개축하고 북한산성을 수축했다.
숙종은 재위 기간 기존의 한양도성을 개축하고 북한산성을 수축했다.

숙종(肅宗:1661~1720, 재위 1674~1720)은 14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46년 간 재위하였다. 52년을 재위한 영조에 이어 두 번재로 재위 기간이 길었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도 많다. 아직까지 숙종은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왕 영조나 정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존재감이 약하지만, 숙종의 업적을 살펴보면 충분히 이들과 그 업적을 견줄만하다.

1. 한양도성을 개축하다

병자호란 때 왕이 직접 오랑캐 황제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한 치욕을 씻어야 한다는 것은 인조 이후 조선의 왕 누구에게나 절실하게 다가온 과제였다. 숙종 역시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왕위에 올랐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당시 최고의 정객 송시열의 예송(禮訟)에서의 잘못을 지적하는 등 예사롭지 않은 카리스마를 보였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숙종은 도성의 방어를 강화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였다. 숙종은 재위 기간 기존의 한양도성을 개축하고 새롭게 북한산성을 수축하는 사업에 착수하였다. 한양도성은 태조 때 정도전의 주도로 처음 건설된 이래, 세종 때 개축되었다가 이후 200여 년간 대대적인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양도성의 개축에는 선대와는 다르게 규격화된 돌이 사용되었는데, 한양도성을 직접 찾아보면 태조와 세종, 그리고 숙종 때 쌓은 돌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북한산성 수축 논의는 숙종 즉위 직후인 1674년(숙종 즉위) 11월 13일 유혁연(柳赫然)에 의해 제기되었다. 유혁연은 “만일 사변(事變)이 있으면 왕이 머무실 만한 곳이 없습니다. 북한산은 산세가 험하고 견고하며 사면이 막혀 있는데 유독 동 어귀의 한길만 있어서 쌓는 공사도 많을 것이 없습니다. 

또 이는 도성과 지척 사이라서 비록 창졸간의 변이 있더라도 군병과 기계, 그리고 백성과 비축한 식량 등은 남김없이 모두 피하여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형세의 편리함이 이와 같은 곳이 없사오니, 속히 수축할 계책을 강구하여 결정짓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라고 건의했고, 숙종은 이를 검토해 볼 것을 지시했다. 11월 26일에는 형조판서 오정위(吳挺緯)가 차자(箚子)를 올려 이덕형(李德馨)의 문집에 있는 말을 인용하여 중흥산성(中興山城)을 수축하기를 청하였는데, 중흥산성은 곧 북한산성을 뜻한다. 숙종은 이 일을 비변사에서 검토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런데 그 사이에 개성의 대흥산성이 수도 방어의 대안으로 제시되었고, 북한산성 축성 작업은 유보되게 된다.
북한산성 수축 논의와 함께 북한산과 도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의 수축 작업도  추진됐다.
북한산성 수축 논의와 함께 북한산과 도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의 수축 작업도 추진됐다.

2차 북한산성 수축 논의는 한양도성을 새로 쌓는 논의와 함께 제기되었고, 북한산과 도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의 수축 작업도 추진되었다. 1702년(숙종 28) 8월 11일 우의정 신완(申琓)은 8조의 계책을 올리면서 일곱 번째로 성지(城池)의 수축을 건의하였다. “우리나라 산천이 험한 것이 천하에 으뜸인데, 병자년에 청나라가 승리를 거둔 것은 모두 서쪽 변방을 지키지 못하고, 도성을 포기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위급한 변란이 벌어졌을 때 의지할 만한 곳은 남한산성과 강화도가 아니라 한양도성임을 강조했다.

신완은 “창의문 밖에 있는 탕춘대의 옛터는 사면이 험준하고 절벽이 깎아지른 듯이 서 있으니, 산세를 따라 돌을 포개어 치성(雉城)을 덧붙여 쌓되, 창고의 곡식을 예치해 두고 먼저 무기를 쌓아 두어 경성(京城)과 안팎이 되어 서로 응원하게 하고 힘을 합쳐서 굳게 지킨다면, 나라에는 파천할 근심이 없고 백성은 견고한 뜻이 있게 될 것인데, 가까운 거리에 있는 천연의 험준한 곳을 오히려 지금까지 비어둔 채 버려두었으니, 그 애석함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숙종은 신완이 제기한 도성 방어책을 수용했지만, 도성 수축이 우선이냐 북한산성 수축이 우선이냐의 논의는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704년(숙종 30) 8월부터 본격적인 도성 수축 공사가 시작되었다. 도성의 군영이었던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에서 구역을 나누어 분담하였다. 3월 25일에는 도성 수축에 앞서 북한산에 고유제를 지냈다. 오군문(五軍門)에서 각각 장교(將校)를 보내어 노원(蘆原)과 주암(舟巖) 등지에서 돌을 뜨게 하였으며, 밥을 짓고 기계(機械)에 소용되는 나무는 사산(四山)의 벌레 먹은 나무를 베어다 쓰게 하였다. 도성은 석성을 위주로 한 기존의 돌이 작아서 잘 무너지는 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사방 2척 정도의 장방형 석재를 사용하였다. 각 군영의 감독관과 석공의 이름 및 날짜를 돌에 새겨 책임 소재를 분명히 밝히게 했다.

그러나 “경기 백성으로 군문(軍門)에 예속된 사람들은 이 공사 때문에 농사를 폐하였고, 돌을 운반하는 공사에서는 사상자가 상당히 많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원망하였다.”는 기록에서도 보이듯 도성 수축에는 많은 후유증이 따르기도 했다. 우여곡절 속에 1712년 무렵 완성을 본 한양도성은 둘레 9,975보 성첩 7,081개에 달하는 규모였다.
탕춘대성의 성문인 홍지문
탕춘대성의 성문인 홍지문

2.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의 수축

3차 북한산성 수축 작업은 1710년(숙종 36)에 다시 논의되었다. 중국에 등장하는 해적에 대비하여 조선 연해 지방을 잘 방어하라는 청나라 강희제의 유시(諭示)가 산성 수축에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숙종은 조선에 국방시설 구축을 허락한 강희제의 유시를 명분으로 다시 북한산의 축성 작업을 지휘했다.

3차 축성 사업은 보다 신중하게 추진되었다. 북한산에 물이 부족하다는 것, 내부가 좁아 도민을 수용하기 힘들다는 것, 북한산이 험하여 군량을 들이기 어렵다는 것 등의 반대 논리에 대해, 숙종은 그 대안을 제시하고 북한산의 가치와 축성의 당위성을 피력해 나갔다. 숙종의 적극적인 의지 속에 1711년 4월 3일 북한산성 수축이 시작되었고, 10월 18일에 마침내 완성을 보았다. 도성과 마찬가지로 훈련도감, 금위영, 총융청의 삼군문 군사들이 나누어 수비했다. 훈련도감은 수문(水文) 북쪽에서 용암(龍巖)까지, 금위영은 용암의 남쪽에서 보현봉까지, 어영청은 수문 남쪽에서 보현봉까지의 구역을 담당했다. 성곽과 군량의 관리를 전담하는 경리청(經理廳)을 별도로 설치했다.

1712년(숙종 38) 10월 3일 『숙종실록』에는 “북한산성의 청사(廳舍) 이름을 품의하니, 임금이 경리청으로 정하라 명하고, 주관하는 대신은 도제조, 당상은 제조라 하고, 삼군문의 대장은 또한 제조를 겸임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정부 재정과 군정 내역을 모은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산성의 전체 둘레가 7,620보였으며 성랑(城廊)이 121개, 장대(將臺) 3개, 연못 26개, 우물 99개, 대문 4개, 암문(暗門) 10개, 창고 7개, 큰 절 11개, 작은 절 3개가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대서문(大西門), 동북문, 북문 등 13개의 성문이 있었으며, 군사 지휘 시설로는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 등이 있었다. 성안의 사찰 중 중흥사(重興寺)는 승군을 배치한 136칸의 대사찰이었다.
북한산 중성문
북한산 중성문

1713년(숙종 39)부터는 북한산성과 군량 창고인 평창(平倉)을 방어하기 위한 축성 논의가 진행되다가 1718년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蕩春臺城)의 축조가 시작되었다. 탕춘대성은 전체의 길이는 약 4킬로미터로, 성내에 군사 훈련장으로 연융대(鍊戎臺)를 설치하고, 군량 보급을 위해 평창(平倉)을 설치하였다. 평창동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총융청(總戎廳)의 군량 창고였던 평창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이후에 지어진 선혜청의 대동미를 보관하던 곳도 ‘평창’이었기에 전자를 상창(上倉), 후자를 하창(下倉)이라 부르기도 했다. 탕춘대성은 북한산 향로봉에서 남쪽으로 인왕산 북쪽으로 연결된 능선을 따라 남북으로 축조되었다.

탕춘대성은 북한산성의 외성으로,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현재의 상명대학교와 세검정 앞에 있는 홍지문(弘智門)과 오간수문은 탕춘대성의 일부이다. 홍지문은 1921년 홍수로 오간수문과 같이 허물어진 것을 1977년에 복원한 것으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한다. 북한산성은 백운대, 보현봉, 문수봉, 나월봉, 의상봉, 원효봉 등을 연결하고 있으며, 현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 우이동, 종로구 구기동, 성북구 정릉동에 걸쳐있다. 남쪽과 동쪽 성벽이 경기도와 서울을 나누는 기준점이 된다.
매일 아침을 여는 서울 소식 - 내 손안에 서울 뉴스레터 구독 신청 카카오톡 채널 구독

댓글은 자유로운 의견 공유의 장이므로 서울시에 대한 신고, 제안, 건의 등
답변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전자민원 응답소 누리집을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업성 광고, 저작권 침해, 저속한 표현, 특정인에 대한 비방, 명예훼손, 정치적 목적,
유사한 내용의 반복적 글, 개인정보 유출,그 밖에 공익을 저해하거나 운영 취지에 맞지
않는 댓글은 서울특별시 조례 및 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해 통보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응답소 누리집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