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독립운동가의 길, '차미리사길'을 아시나요?

시민기자 임지연

발행일 2022.04.13. 09:40

수정일 2022.04.14. 13:45

조회 1,386

차미리사길로 이어지는 덕성여대 후문 길을 안내하는 도로표지판
차미리사길로 이어지는 덕성여대 후문 길을 안내하는 도로표지판 ©임지연

서울시 도봉구에서는 몇 해 전부터 지역 주민들과 함께 우리 역사를 기억하고 상기할 수 있는 다양한 행사를 지원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독립유공자의 자택을 방문해 ‘독립유공자의 집’ 문패를 다는 일과 여성 독립유공자인 차미리사(車美理士, 1879~1955) 선생의 이름을  거리 명칭으로 제정한 일 등을 꼽을 수 있다. 

거리가 곧 독립운동의 역사와 의미가 되는 차미리사길을 찾았다. 강북구 수유역과 도봉구 쌍문역 중간 지점에 자리한 1.5km 상당의 좁고 길게 뻗은 도로다.
차미리사길과 이어진 백운시장 입구 모습
차미리사길과 이어진 백운시장 입구 모습 ©임지연

지난 2020년 ‘도봉구 여성친화도시’ 사업의 일환으로 지정돼 운영되고 있는 차미리사길의 정식 도로명은 '우이천로'다. 하지만 도봉구청의 허가를 받아 일종의 ‘명예도로명’으로 지정된 차미리사길이 이곳을 이용하는 인근 주민들에게는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덕성여대 캠퍼스 후문에서 차미리사 선생의 묘역까지 약 1.5km로 뻗은 길은 평소 조용한 산책로를 선호하는 주민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코로나19 이후 이 길을 따라 걸으며 운동하는 주민들은 길 한켠에 마련된 차미리사길 안내문과 독립운동의 내력 등을 소개한 안내문을 통해 평소 잊고 지내기 쉬운 독립운동의 역사에 대해 다시 한번 기억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차미리사길 조형물과 차미리사길로 통하는 산책로
차미리사길 조형물과 차미리사길로 통하는 산책로 ©임지연

차미리사 선생의 독립운동 역사는 여성과 아동의 교육과 인권 향상에 집중됐다. ‘섭섭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1879년 8월 21일(음력) 서울 아현동에서 출생한 차미리사 선생은 17세에 출가하면서 ‘미리사’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이후 남편의 성을 따라 김미리사로 불렸으나 남편과 사별한 이후 다시 자신의 성을 찾아 차미리사라는 이름으로 줄곧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남편과 사별한 차미리사 선생은 23살에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때가 1901년 무렵이었는데, 당시 서울에 남겨둔 어린 딸과 모친에 대한 걱정 탓에 심신이 지쳐 큰 열병을 앓았고 그 후유증으로 평생 청각 장애를 지니고 살았다. 이후 중국 유학을 마친 그는 1905년 무렵 미국으로 또 한차례 이주했고, 그곳에서 교육 구국을 목적으로 조직된 대동교육회를 발기해 첫 국권회복운동을 시작했다.

주로 미국에서 교육운동, 사회활동, 독립운동, 언론활동 등을 시작한 그는 청년 여성을 교육시켜서 우리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1912년 귀국했다. 조국을 떠난 지 10년이 훌쩍 지난 후 귀국했으나, 이 무렵 전국적인 규모의 3.1운동이 발발하자 곧바로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하고 부인야학강습소를 설치해 운영했다.
차미리사길과 인근 백운시장을 소개하는 안내문
차미리사길과 인근 백운시장을 소개하는 안내문 ©임지연

당시 차미리사 선생이 조직한 부인야학강습소는 여성이 직접 구성한 자립적인 여성교육기관이라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차미리사 선생은 당시에도 여성이 인격적으로 독립적인 인간으로 존중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남성과 동일한 수준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그가 조직한 부인야학강습소와 조선여자교육회의 가장 큰 특징은 주 교육 대상이 적령기 여학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육 시기를 놓친 모든 여성을 포괄했다는 점에서 배움의 기회에서 소외된 다수의 여성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또한 여성들로만 구성된 전국순회강연단을 통해 계몽운동을 진행했고, 이때 모금한 성금으로 부인야학강습소인 근화학원(槿花學園)을 설립했다. 근화학원은 바로 지금의 덕성여대의 시작이었다.
백운시장 안쪽으로 1분 정도 걸어들어가면, 오징어게임 체험장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백운시장 안쪽으로 1분 정도 걸어들어가면, 오징어게임 체험장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임지연

1930년 대 후반 황국신민화 정책이 노골화되면서 일제는 차미리사 선생의 교육방식이 곧 민족사상을 고취시키려는 행위라고 비난했고, 총독부의 압력으로 교육일선에서 물러났다. 이때가 차미리사 선생이 62세가 되던 해였다.

교육 일선에서 강제로 물러나야 했던 그의 교육철학은 해방 후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1955년 6월 1일,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67년이 되는 올해에도 여전히 도봉구와 강북구 일대를 잇는 도로에는 그의 이름을 그대로 딴 ‘차미리사길’을 찾는 주민들의 발길이 매일 이어지면서 그가 평생을 헌신했던 항일민족계몽운동의 정신을 계속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차미리사길 인근에는 도보로 5분여 거리에 오징어게임으로 더 유명해진 쌍문동 백운시장이 위치해 있어 함께 둘러봐도 좋겠다. 오늘날 전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킨 오징어게임도, 차미리사 선생 같은 독립운동가의 희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차미리사길을 방문한다면 편안한 운동화를 신고 시원한 생수 한병을 준비하길 권한다.

시민기자 임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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