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 한복판에 중종이 홀로 잠들어 있는 이유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1.11.10. 13:45

수정일 2021.11.10.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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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교수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정릉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정릉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11) 중종의 정릉(靖陵)이 옮겨진 사연

조선의 왕릉 중에서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자리를 잡은 왕릉이 있다. 성종과 정현왕후의 왕릉인 선릉(宣陵)과 중종의 왕릉인 정릉(靖陵)이 그것이다. 현재 지하철 2호선의 역명 ‘선릉’과 9호선의 역명 ‘선정릉’은 바로 두 왕의 무덤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중종의 정릉은 원래 이곳에 있지 않았다. 1544년 중종이 승하한 후 처음 묻힌 곳은 경기도 고양시 현재의 서삼릉 내, 장경왕후의 희릉(禧陵)이 위치한 곳이다. 1515년 중종의 계비로 들어왔던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다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한 후 고양에 희릉을 조성하였는데, 중종도 이곳에서 1백보쯤 떨어진 곳에 모신 것이다. 중종의 무덤이 조성된 후에 무덤 이름은 희릉에서 정릉(靖陵)으로 바뀌었다. 

첫 단계, 중종의 무덤 옮기기

중종의 정릉은 명종이 왕으로 있던 시절 현재의 강남구 지역으로 옮겨졌다. 중종의 두 번째 계비였던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을 움직여, 중종의 무덤을 옮기게 한 것이다. 문정왕후가 내세운 논리는 중종의 무덤이 아버지 성종의 무덤이 있는 선릉 곁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문정왕후 자신이 사후에 남편과 함께 묻히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당시 상황에 대해 사관(史官)은 “능침을 옮기는 것은 중대한 일이므로, 산이 무너지거나 물에 패여 나가는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능을 옮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풍수의 길흉설(吉凶說)에 끌리어 옮기는 것도 불가한데 하물며 옮길 만한 아무런 까닭도 없이 대중의 의사와 여론을 어겨가며 옮기는 것이겠는가.”라 하면서, 명종이 당시의 여론을 무시하고 천릉을 한 처사를 비판하였다. 

이어서 “중종께서 돌아가신 지가 지금까지 몇 년이었던가. 그동안 체백(體魄)이 이곳에서 편안히 지냈고 혼령도 이곳에 노셨으며 희릉과 효릉(중종의 아들 인종의 무덤)도 이곳에 있으니, 인정으로 신명의 도를 미루어 보건대 어찌 다른 곳으로 옮기고자 할 이치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번 천릉한 일은 상의 뜻이 아니고 문정왕후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백성이 모두 알고 있다. 고금을 막론하고 세상에 투기하는 사나운 여자가 어찌 없을까마는 이미 죽어 유명을 달리한 뒤까지 시기하여 남편의 무덤을 옮겨 전처(前妻)의 무덤과 멀리 떨어지게 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 하늘에 계시는 중종의 혼령이 어떻게 생각하셨을지 모르겠다. 아! 애통하다.”고 하면서, 문정왕후에 의해 중종의 무덤이 옮겨진 상황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붉은 홍살문 너머로 정자각이 보이고, 그 뒤로 중종의 능침이 보인다
붉은 홍살문 너머로 정자각이 보이고, 그 뒤로 중종의 능침이 보인다

실현되지 못한 문정왕후의 바람

조선후기의 학자 이긍익(李肯翊)의 기록 『연려실기술』에도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을 인용하여, 중종의 천릉이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큰 문제가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명종 임술 17년에 정릉을 광주(廣州)로 옮겼는데, 지세가 낮아서 보토(補土)하는 공비가 여러 만 냥에 이르렀다. 중종은 처음 고양에 장사하였다가 희릉과 동영(同塋)에 모시었었는데, 윤원형이 문정왕후를 힘써 도와서 한강가 습기가 많은 곳으로 옮기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분개하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세상에 전하는 말이, “능을 옮길 때에 광중으로부터 곡성이 났는데 일하는 사람 중에 안 들은 자가 없다.”고 하더니, 이듬해에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죽고, 2년 뒤에 문정왕후가 승하하고, 또 2년 뒤에는 명종이 승하하니, 사람들이 능을 옮긴 탓이라고 말하였다. 임진년에 이르러 정릉이 왜적들의 발굴을 당하였으니 신민들의 통분을 어찌 모두 말할 수 있으랴.」

위의 기록에서 중종의 무덤을 옮긴 이듬해(1563년)에 명종의 아들인 순회세자가 죽고, 2년 뒤에 문정왕후가 승하하고, 또 2년 뒤에는 명종이 승하한 것과 임진왜란 때 정릉이 도굴당한 것 모두가 중종의 능을 옮긴 탓이라고 인식했던 상황을 볼 수가 있다. 

중종의 무덤을 일단 옮겨 놓았지만 문정왕후는 자신의 바람대로 중종 곁에 묻히지를 못했다. 정릉은 지대가 낮아 홍수 때 재실까지 물이 차서 신하들이 이곳에 무덤을 쓰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결국 명종은 지금의 노원구 지역에 문정왕후의 무덤을 조성하고 태릉(泰陵)이라 하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태릉선수촌’, ‘태릉갈비’의 명칭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중종에게는 3명의 왕비가 있었으나, 문정왕후의 과욕으로 말미암아 1명의 왕비도 곁에 두지 못한 채 현재의 강남 빌딩 숲속에 홀로 묻히게 되었다. 그나마 아버지 성종과 어머니 정현왕후의 무덤인 선릉이 곁에 있는 것이 다행스럽다. 

태릉 곁에는 사후 명종이 이곳으로 왔다. 명종은 이례적으로 아버지 곁에 가지 않고, 어머니 무덤 쪽에 와서 묻혔는데, 강릉(康陵)이 그것이다. 그런데 1966년 태릉과 강릉 사이에 태릉선수촌이 조성되면서 두 모자의 무덤이 서로 볼 수 없는 상황이 왔다. 2016년 태릉선수촌이 충북 진천으로 이전하였고, 이제 문정왕후와 명종 모자는 사후에서나마 서로를 마주하게 되었다. 중종은 여전히 강남 한복판에 홀로 묻혀있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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