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청망청'의 유래가 된 연산군, 그가 만든 사치와 쾌락의 공간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1.09.29. 16:27
창덕궁 인정전 월대 위에 왕의 시선으로 바라본 조정의 모습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8) 사치와 쾌락의 공간을 만든 연산군
1494년(연산군 즉위년) 12월 19일 연산군이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연산군은 창덕궁에서 즉위식을 올린 최초의 왕이기도 하다. 성종의 적장자라는 프리미엄 속에서 즉위했지만, 연산군은 철저하게 독재군주의 길을 걸어갔다.
왕과 신하들의 공부 자리인 경연을 폐지하고, 왕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기능을 가진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 대한 탄압도 심해졌다. 자신의 독재에 걸림돌이 되는 장치들을 배제한 후에는 사치와 쾌락을 추구하는 왕으로서의 존재감을 과시해 나갔다. 경복궁, 창덕궁과 같은 궁궐을 비롯하여 서울 일대의 주요 명승지가 사치와 쾌락의 중심공간이 되었다.
『연산군일기』에는 경복궁 경회루에서 연산군이 자주 잔치를 베푼 모습들이 나타나 있다. “경회루 연못가에 만세산(萬歲山)을 만들고, 산 위에 월궁(月宮)을 짓고 채색 천을 오려 꽃을 만들었는데, 백화가 산중에 난만하여, 그 사이가 기괴 만상이었다. 그리고 용주(龍舟)를 만들어 못 위에 띄워 놓고, 채색 비단으로 연꽃을 만들었다.
그리고 산호수(珊瑚樹)도 만들어 못 가운데에 푹 솟게 심었다. 누각 아래에는 붉은 비단 장막을 치고서 흥청·운평 3천여 인을 모아 노니, 생황과 노랫소리가 비등하였다.”는 기록이나, “횃불 1천 자루를 늘어 세워 밤이 낮처럼 밝은데, 흥청(興淸) 수백 명이 늘어 앉아 풍악을 연주하였다.”는 기록에서는 이 사람이 일국의 왕인지 영화나 연극의 감독이자 주연 배우인지를 헷갈리게 한다. “군인을 뽑아서 서호(西湖)에 있는 배 수십 척을 끌어 경회지(慶會池)에 띄웠다. 배 한 척을 육지로 운반하는데, 민정 5백여 인이 들면서 외치는 소리가 성안을 진동하였다.”는 기록에서는 개인의 욕망을 위해 국고를 탕진하는 왕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들어온다.
잔치에 흥을 돋우기 위해 채홍사(採紅使)를 전국에 파견했다. 임사홍과 임숭재 부자는 채홍사로 활약하며 연산군의 신임을 얻었다. 이때 뽑힌 기녀들은 운평(運平), 가흥청(假興淸), 흥청(興淸)이라 하였다. 흥청들이 입는 옷인 아상복(迓祥服)과 홍단장(紅丹裝)에 드는 비용을 백성들로부터 거두어서 백성들의 살림이 탕진될 지경에 이르도록 했다.
장녹수(張綠水)는 흥청 출신이었다가 연산군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어 국정 농단을 주도하기도 했다. 흥이 나면 연산군은 흥청들 사이에서 춤까지 추었다. “그때 왕은 처용(處容) 가면을 풍두(豐頭)라고 불러 금·은·주옥으로 장식하고, 왕이 매양 술이 취하여 발광할 때마다 스스로 풍두를 얼굴에 걸고 경복궁으로 갔는데, 흥청 수백 명에게 풍악을 치며 따르게 하여 대비 앞에서 희롱하고 춤도 추었다.”는 기록에서는 그야말로 엽기적인 왕의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다. 연산군이 흥청을 끼고 노는 것을 한탄한 백성들은 ‘흥청망청(興淸亡淸)’이라는 말을 유행시켰고, ‘흥청망청’은 지금까지도 경계의 언어로 이어지고 있다.
『연산군일기』에는 연산군 스스로가 제 명을 단축시키는 상황들이 이어진다. “또 도성 안 대궐에 가까운 인가를 철거하고 동서로 돌성을 쌓아 한계를 정하고 문묘(文廟)의 신판(神版)을 옮긴 뒤 그 안에 짐승을 길렀으며, 수리도감을 두고 크게 공사를 일으켜 사방의 공장(工匠)을 모으고 민호(民戶)를 징발, 모두 서울에 집중시켜 궁실을 넓히고, 큰 정자를 더 지어 강가나 물구비에 그들먹하게 벌여 놓으며, 높은 곳은 깎고 낮은 곳은 메워 큰길을 이리저리 내고, 밤낮으로 시녀들과 오가며 놀았다.”거나, “일찍이 강물을 끌어 텅춘대(蕩春臺) 정자 밑에 이르게 하고 또 산을 뚫어 다른 시냇물을 끌어 정자 밑에 합류시키려 했는데, 모두 이루지 못했다.”는 기록들은 서울의 명소들을 사치의 공간으로 만들어가는 상황을 증언해 주고 있다.
왕과 신하들의 공부 자리인 경연을 폐지하고, 왕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기능을 가진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 대한 탄압도 심해졌다. 자신의 독재에 걸림돌이 되는 장치들을 배제한 후에는 사치와 쾌락을 추구하는 왕으로서의 존재감을 과시해 나갔다. 경복궁, 창덕궁과 같은 궁궐을 비롯하여 서울 일대의 주요 명승지가 사치와 쾌락의 중심공간이 되었다.
『연산군일기』에는 경복궁 경회루에서 연산군이 자주 잔치를 베푼 모습들이 나타나 있다. “경회루 연못가에 만세산(萬歲山)을 만들고, 산 위에 월궁(月宮)을 짓고 채색 천을 오려 꽃을 만들었는데, 백화가 산중에 난만하여, 그 사이가 기괴 만상이었다. 그리고 용주(龍舟)를 만들어 못 위에 띄워 놓고, 채색 비단으로 연꽃을 만들었다.
그리고 산호수(珊瑚樹)도 만들어 못 가운데에 푹 솟게 심었다. 누각 아래에는 붉은 비단 장막을 치고서 흥청·운평 3천여 인을 모아 노니, 생황과 노랫소리가 비등하였다.”는 기록이나, “횃불 1천 자루를 늘어 세워 밤이 낮처럼 밝은데, 흥청(興淸) 수백 명이 늘어 앉아 풍악을 연주하였다.”는 기록에서는 이 사람이 일국의 왕인지 영화나 연극의 감독이자 주연 배우인지를 헷갈리게 한다. “군인을 뽑아서 서호(西湖)에 있는 배 수십 척을 끌어 경회지(慶會池)에 띄웠다. 배 한 척을 육지로 운반하는데, 민정 5백여 인이 들면서 외치는 소리가 성안을 진동하였다.”는 기록에서는 개인의 욕망을 위해 국고를 탕진하는 왕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들어온다.
잔치에 흥을 돋우기 위해 채홍사(採紅使)를 전국에 파견했다. 임사홍과 임숭재 부자는 채홍사로 활약하며 연산군의 신임을 얻었다. 이때 뽑힌 기녀들은 운평(運平), 가흥청(假興淸), 흥청(興淸)이라 하였다. 흥청들이 입는 옷인 아상복(迓祥服)과 홍단장(紅丹裝)에 드는 비용을 백성들로부터 거두어서 백성들의 살림이 탕진될 지경에 이르도록 했다.
장녹수(張綠水)는 흥청 출신이었다가 연산군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어 국정 농단을 주도하기도 했다. 흥이 나면 연산군은 흥청들 사이에서 춤까지 추었다. “그때 왕은 처용(處容) 가면을 풍두(豐頭)라고 불러 금·은·주옥으로 장식하고, 왕이 매양 술이 취하여 발광할 때마다 스스로 풍두를 얼굴에 걸고 경복궁으로 갔는데, 흥청 수백 명에게 풍악을 치며 따르게 하여 대비 앞에서 희롱하고 춤도 추었다.”는 기록에서는 그야말로 엽기적인 왕의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다. 연산군이 흥청을 끼고 노는 것을 한탄한 백성들은 ‘흥청망청(興淸亡淸)’이라는 말을 유행시켰고, ‘흥청망청’은 지금까지도 경계의 언어로 이어지고 있다.
『연산군일기』에는 연산군 스스로가 제 명을 단축시키는 상황들이 이어진다. “또 도성 안 대궐에 가까운 인가를 철거하고 동서로 돌성을 쌓아 한계를 정하고 문묘(文廟)의 신판(神版)을 옮긴 뒤 그 안에 짐승을 길렀으며, 수리도감을 두고 크게 공사를 일으켜 사방의 공장(工匠)을 모으고 민호(民戶)를 징발, 모두 서울에 집중시켜 궁실을 넓히고, 큰 정자를 더 지어 강가나 물구비에 그들먹하게 벌여 놓으며, 높은 곳은 깎고 낮은 곳은 메워 큰길을 이리저리 내고, 밤낮으로 시녀들과 오가며 놀았다.”거나, “일찍이 강물을 끌어 텅춘대(蕩春臺) 정자 밑에 이르게 하고 또 산을 뚫어 다른 시냇물을 끌어 정자 밑에 합류시키려 했는데, 모두 이루지 못했다.”는 기록들은 서울의 명소들을 사치의 공간으로 만들어가는 상황을 증언해 주고 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창덕궁 후원
창덕궁 후원 역시 사치와 쾌락의 공간으로 만들어 갔다. 연산군은 후원에 높이와 넓이가 수십 길이 되는 서총대(瑞葱臺)를 세우고, 그 아래 큰 못을 팠는데 해가 넘도록 공사를 마치지 못할 정도였다. 또 창덕궁 후원에서 경복궁·경회루까지 임시 건물 3천여 간을 이어 짓고, 망원정 아래의 조수(潮水)를 끌어들여 창의(彰義)의 수각(水閣) 아래까지 파서 통하게 하려고 도감(都監)으로 하여금 물길의 깊이와 너비·고저를 측량하게 하고, 거기에 동원될 역부(役夫) 50여만 명을 동원하였다.
기행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후원에 응준방(鷹隼坊)을 두고, 팔도의 매와 개 및 진귀한 새와 기괴한 짐승을 샅샅이 찾아 모두 가져오게 하였으며, 사나운 짐승을 생포하여 압송해 와서 우리에 길렀다.”는 기록에서는 궁궐을 동물원으로 전락시킨 행각을 볼 수가 있다. 창경궁을 동물원 창경원으로 만들어 버린 일제에 앞서 연산군이 선구적인 모습을 보인 셈이다.
궁궐과 서울 일대의 명소를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공간으로 만들어갔던 연산군의 기행은 결국에는 그의 몰락을 재촉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1506년 9월 중종반정이 일어났고, 연산군은 교동도에 유배된 지 두 달 만에 죽었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연산군일기』는 병으로 죽었다고 기록했지만, 사치와 쾌락만을 쫓는 방탕한 삶을 살다가 가시나무 울타리에 갇히게 된 스트레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기행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후원에 응준방(鷹隼坊)을 두고, 팔도의 매와 개 및 진귀한 새와 기괴한 짐승을 샅샅이 찾아 모두 가져오게 하였으며, 사나운 짐승을 생포하여 압송해 와서 우리에 길렀다.”는 기록에서는 궁궐을 동물원으로 전락시킨 행각을 볼 수가 있다. 창경궁을 동물원 창경원으로 만들어 버린 일제에 앞서 연산군이 선구적인 모습을 보인 셈이다.
궁궐과 서울 일대의 명소를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공간으로 만들어갔던 연산군의 기행은 결국에는 그의 몰락을 재촉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1506년 9월 중종반정이 일어났고, 연산군은 교동도에 유배된 지 두 달 만에 죽었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연산군일기』는 병으로 죽었다고 기록했지만, 사치와 쾌락만을 쫓는 방탕한 삶을 살다가 가시나무 울타리에 갇히게 된 스트레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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