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물결 휘날리는 3.1절 효창공원을 가다

시민기자 이선미

발행일 2021.03.03. 14:30

수정일 2021.03.03. 17:30

조회 854

효창공원 앞 나무에 태극기 꽃이 피었다. 코로나19 때문에 기념식을 갖지 못하는 마음을 바람결에 실어보내기라도 하듯, 공원 앞 28그루의 나무에 태극기가 펄럭였다. 효창공원역까지 이어지는 길에도 꼬마태극기들이 연이어 나부끼고 있다. 
용산구가 제102주년 3·1절을 맞아 효창공원앞역~효창공원까지 600미터 구간에 ‘만세운동 태극기 거리’를 조성했다.
용산구가 제102주년 3·1절을 맞아 효창공원앞역~효창공원까지 600미터 구간에 ‘만세운동 태극기 거리’를 조성했다. ⓒ이선미

102번째 맞이하는 3.1절, 효창공원을 찾았다. 길을 지나는 시민들은 곳곳에서 태극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용산구가 제102주년 3·1절을 맞아 지하철 6호선 효창공원앞역에서 효창공원까지 600미터 구간에 ‘만세운동 태극기 거리’를 조성했다. 효창공원 앞 ‘만세운동 태극기 거리’는 3월5일까지 운영된다. 
효창공원 앞 나무 28그루가 태극기 나무가 되었다.
효창공원 앞 나무 28그루가 태극기 나무가 되었다. ⓒ이선미

효창공원 정문인 창열문에는 '1919. 3. 1. 그날의 함성!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쓴 현수막도 달았다. 효창공원에 묻힌 김구 선생과 삼의사(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그리고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이동녕, 차리석, 조성환 선생의 사진과 여전히 유해를 모시지 못한 안중근 의사의 사진도 함께 있었다. 

창열문 좌우 화단에는 태극기 바람개비가 바람결에 돌고 있었다. 경사로를 올라 공원으로 들어섰다. 필자보다 앞서 한 청년이 한아름 하얀 국화꽃 다발을 안고 걸었다.
창열문 좌우에는 태극기 바람개비가 돌고 있다.
창열문 좌우에는 태극기 바람개비가 돌고 있다. ⓒ이선미

원래 이곳은 묘지였다. 조선 정조 임금의 장남 문효세자가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임금은 가까운 곳에 무덤을 조성했다. 소나무가 울창하고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이었다. 몇 개월 후 문효세자의 어머니 의빈 성씨도 함께 묻혔고, 순조 때 후궁 숙의 박씨와 영온옹주의 묘소까지 들어서 도성에서 가장 가까운 왕가의 묘역이었다. 1870년에는 고종이 ‘묘’에서 ‘원’으로 격상해 19세기 말까지 왕실 묘역으로서 존재했다. 

일본은 조선 왕실의 무덤까지 유린했다. 일본 군대의 숙영지로 삼기도 하고, 비밀 병참기지로 활용하기도 했다. 심지어 1921년에는 유원지로 개발하려는 계획으로 골프장을 개장하기도 했다. 결국 1944년 효창원이 고양 서삼릉으로 이장되고 빈자리만 남았다.
백범기념관에는 삼의사와 임정 요인들의 유해 봉환 과정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백범기념관에는 삼의사와 임정 요인들의 유해 봉환 과정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선미

해방 후 백범 김구 선생이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삼의사의 유해를 모셔와 독립지사의 묘로 조성했다. 1948년에는 임시정부 요인인 이동녕, 차리석, 조성환 선생도 모시게 되었다. 일본이 왕실 묘역을 침탈하고 강점했던 곳을 독립운동가 유택으로 마련하는 일은 그만큼 상징적인 의미이기도 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역. 한걸음 앞서던 청년이 하얀 국화를 묘지에 헌화했다. 청년 옆으로 어르신도 오래 묵념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역. 한걸음 앞서던 청년이 하얀 국화를 묘지에 헌화했다. 청년 옆으로 어르신도 오래 묵념했다. ⓒ이선미

1949년에는 김구 자신이 이곳에 묻혔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김구의 묘지를 참배하는 것도 막았다고 한다. 심지어 1956년에는 독립운동가의 묘소를 옮기고 체육관과 운동장을 지으려다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심산 김창숙은 ‘효창공원을 통곡함’이라는 시를 짓고, 묘역을 훼손하려는 불도저 앞에 드러눕기도 했다. 여론이 들끓자 계획을 축소해 현재 크기의 축구장을 짓는 걸로 마무리했다. 오늘날의 ‘효창운동장’이다. 

백범은 삼의사와 안중근 의사의 가묘를 조성하고, 묘단 아래 돌에 ‘流芳百世(유방백세)’라는 네 글자를 새겨 넣었다. '꽃다운 이름들이여, 백세에 영원하소서'라는 뜻이다. 김구 자신을 포함한 선열들은 그 말처럼 영원히 우리 역사에 살아있다.

삼의사 묘역에 서면 늘 마음이 무겁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집행을 앞두고 "내가 죽은 후에 내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달라"고 유언했다. 안 의사가 순국한 지 110년이 지나고 해방이 된 지 7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는 그의 가묘 앞에 선다. 시신은커녕 유골의 행방도 찾지 못한 상태라고 한다. 
의열사에서 만나는 안중근 의사
의열사에서 만나는 안중근 의사 ⓒ이선미

1990년에야 일곱 선열을 기리는 사당 ‘의열사’가 효창공원 안에 지어졌다. 그후 매년 추모행사를 가졌지만 평소에는 문을 닫아두다가, 2016년부터는 시민들에게도 의열사가 개방되었다. 
1990년에야 선열들을 기리는 의열사가 세워졌다.
1990년에야 선열들을 기리는 의열사가 세워졌다. ⓒ이선미

사실 오랫동안 효창공원은 그저 하나의 공원, 유원지로만 알려져 왔다. 무엇보다 효창운동장을 기억하는 어르신들이 많을 것이다. 김구 선생 묘지에서 내려오는 길에 한 어르신이 물었다. 

“여기 백범 동상이 어디쯤 있어요?”
효창공원에는 백범의 동상이 없다. 백범기념관 안에는 그의 조각상이 있지만 효창공원 내부에는 없다. 아마 어르신도 처음으로 효창공원에 오신 모양이었다. 
백범기념관 중앙홀 김구 선생 좌상
백범기념관 중앙홀 김구 선생 좌상 ⓒ이선미

효창공원을 순국선열을 기리는 공간으로 조성하려는 시도는 번번이 무산돼 왔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서울시와 국가보훈처는 효창공원을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고 예우하여 ‘효창독립 100년공원’으로 조성할 것을 밝혔다. 

백 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지금 효창공원은 우리 역사의 복잡다단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원래 무덤이었던 곳에 독립운동가들이 묻혀 있는가 하면, 효창운동장과 대한노인회, 반공투사기념탑 등 여러 의미들이 담겨 있다. 그 많은 요소들은 우리 역사의 갈등도 포함하고 있다. 
의열사에서 내다보이는 효창운동장 조명탑
의열사에서 내다보이는 효창운동장 조명탑 ⓒ이선미

새로운 백 년을 시작한 지금, 효창공원이 그 많은 이질적인 요소들을 잘 아울러 진정한 의미의 기억의 공간, 시민들의 일상에 늘 함께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한다. 무엇보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아 ‘사의사 묘’로 완성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백범기념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사진
백범기념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사진 ⓒ이선미

여전히 곳곳에 청산하지 못한 오욕의 역사가 우리 앞에 있다. 서울도서관 외벽에 붙은 '3.1운동은 하루로 끝나지 않았습니다'라는 문장이 뼈저리게 다가온다. 어쩌면 진정한 의미의 독립운동은 여전히 진행 중인지도 모른다. 
서울도서관 외벽에 걸린 '3.1운동은 하루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서울도서관 외벽에 걸린 '3.1운동은 하루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선미

■ 효창공원

○ 위치 : 서울 용산구 효창동
○ 홈페이지 : https://www.hyochangpark.com/
○ 문의 : 02-458-3315

시민기자 이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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