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묘는 왜 능이 아닐까?…역사 품은 비경
발행일 2020.07.28. 14:08
연산군과 광해군은 조선을 통치한 27분의 군주 가운데 반정이 일어나 폐왕이 된 두 분이다. 사후 조성된 무덤도 신분이 격하되어 능(陵)이 아니라 묘(墓)로 불린다. 이중 도봉구 방학로에 있는 연산군묘를 찾았다.
도봉구 방학동 주택가 한 편에 자리한 연산군묘 정문 ©염승화
우이신설 경전철을 타고 종착역인 북한산우이역에서 내렸다. 이곳에서 묘소까지는 1.2km 거리다. 산책 삼아 걷거나 묘소 입구에서 내리는 버스로 환승을 하면 된다. 곧 사적 제362호라고 쓰인 표석이 서있는 정문 앞 안내박스에서 ‘연산군묘’ 리플릿을 쥐어 들었다.
1494년 왕위에 오른 제10대 임금 연산군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됨과 동시에 지위가 연산군으로 낮춰졌다.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된 지 두 달 만에 세상을 등졌고 같은 곳에 묘가 조성되었었다. 지금 묘는 1512년(중종 7)에 이장되어 온 것이다. 연산군처럼 왕후에서 폐위된 거창군부인 신 씨가 11대 임금 중종에게 이장을 간청한 결과다. 군부인 묘는 1537년(중종 32) 연산군묘 옆에 모셔졌다.
어떻게 연산군의 묘가 현 위치로 오게 되었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결론부터 살피면 거창군부인의 인맥에서 비롯된다. 묘소 자리는 군부인의 외할아버지인 임영대군의 땅이었다. 임영대군은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로 계유정난을 도와 7대 임금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는데 일조한 인물이다.
좁은 통로와 돌계단을 올라서면 바로 묘역 경내가 한 눈에 펼쳐진다. ©염승화
묘역에는 연산군 부부를 비롯해 여러 기의 무덤들이 조성되어 있다. ©염승화
연산군묘는 대군묘제에 따라 조성되었기에 아무래도 왕릉과는 많은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정문에서 묘역이 있는 곳까지도 짧고 홍살문조차 보이지 않았다. 좁은 입구 통로를 지나 돌계단을 밟아 오르니 묘역이 한 눈에 들어찬다. 안내 표지판에서 상단 끝부분까지 직선거리가 고작 50~60m에 불과하다. 일국의 왕이었던 분의 무덤이라고 보기에는 그 규모가 매우 협소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더 특이한 점은 경내에 연산군뿐만 아니라 다른 봉분들도 여럿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다. 묘역의 제일 높은 곳에 연산군 부부의 묘가 좌우로 나란히 쌍분으로 있고, 그 아래 중앙에 하나, 또 그 아래로 놓인 쌍분 등 모두 5기로 이루어져 있다.
곡장 뒤에서 내려다본 연산군 부부묘(오른쪽 연산군, 왼쪽 거창군부인) ©염승화
좌우로 나란히 조성된 쌍분이고 난간석과 병풍석 없이 석물들만 놓여있다. ©염승화
묘역을 빙 둘러 나 있는 길을 따라 연산군 부부의 봉분들을 감싸듯 안고 있는 담장인 곡장 뒤로 가서 섰다. 바로 코앞에서 내려다보니 묘역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더욱 실감났다. 왕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난간석이나 병풍석이 둘러쳐 있지 않은 맨 봉분들 앞으로 각각 표석, 상석, 장명등, 망주석 등이 놓여 있고 중앙에 향로석 1개와 좌우로 문석인 2쌍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연산군묘가 자리잡기 전 원래 무덤터의 주인공인 의정궁주묘(태종의 후궁) ©염승화
가운데 묘는 3대 임금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의 묘다. 후손이 없어 임영대군이 제사를 모셨던 까닭에 연산군과는 전혀 관계 없을 듯한 분의 묘가 연산군 일가 묘역에 함께 있는 것이다. 이 묘는 1454년(단종 2)에 같은 묘역에 있는 5기 가운데 가장 먼저 조성되었다. 표석과 상석, 문인석 한 쌍이 봉분 앞에 세워져 있다.
딸과 사위의 묘까지 같은 경내 위아래로 조성되어 있다. ©염승화
하단에 있는 쌍분의 주인공은 연산군 슬하의 2남 1녀 중 딸인 휘순공주와 사위 능양위구문경이다. 중종반정 이후 작호가 박탈된 두 사람은 이혼하려 했으나 신료들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묘를 향해 왼쪽이 부마, 오른쪽이 공주의 봉분이다. 각각의 봉분 앞에는 표석과 상석, 장명등 등이 있고, 망주석과 문인석 한 쌍이 좌우로 하나씩 놓여 있다.
곡장 아래 고즈넉한 숲이 우거져 있다. ©염승화
조그맣고 조촐해 보이는 재실이 경내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염승화
묘역을 천천히 한 바퀴 둘러본 뒤에는 발길을 경내 왼편 언덕 밑으로 향했다. 숲길을 조금 지나자 조그맣고 허름한 한옥이 한 채 나타났다. 무덤을 관리하고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이다. 색이 많이 바라 언뜻 보기에도 조촐해 보이는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훗날 영조 임금 때 연산군의 후손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고 제수를 지원해 주었다는 기록이 담긴 치제현판 등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수령 800이 넘은 노거수가 연산군묘의 수호신인양 묘역 맞은편에 우뚝 서 있다. ©염승화
연산군묘는 조선 왕릉과 달리 세계유산에 등재되지는 못했을지라도 단 두기만 있는 폐왕의 묘로 역사 문화적 의미가 결코 적지 않은 곳이다. 15~16세기 조선시대 묘제 연구에도 소중한 자료이고, 폭정과 반정에 얽힌 적잖은 스토리텔링을 간직한 무대, 즉 왕실묘역이라는 점에서도 찾아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묘역과 마주하고 있는 서울시 보호수 1호였던 은행나무 노거수, 일명 '방학동 은행나무'와 연계한 나들이 계획을 짜면 좋다.
■ 서울 연산군묘 안내
○ 위치: 서울시 도봉구 방학로 17길 46 (방학동)
○ 교통: 우이신설경전철 북한산우이역 1번 출구 > 약 1.2km 연산군묘
- 버스 환승 1144번, 노원 15번 연산군,정의공주묘 정류장 하차 (약 10분)
○ 운영: 6~8월 09:00~18:30 / 2~5월, 9~10월 09:00~18:00 / 11~1월 09:00~17:30
* 매주 월요일 휴관
○ 입장료: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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