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서울문학기행'…정지용의 녹번리로 문학 소풍
발행일 2020.07.21. 10:07
서울시와 서울도시문화연구원이 함께하는 ‘2020서울문학기행’, 그 첫걸음으로 시인 정지용의 마지막 거처였던 녹번리로 떠난다. 긴장된 마음으로 '2020서울문학기행' 참여 신청을 기다렸다. 서울시 공공서비스예약 홈페이지에서 선착순 신청을 받았는데 말 그대로 빛의 속도로 신청이 끝나버렸다. 코로나19로 인해 지난해보다 더 적은 인원으로 꾸리다보니 더 치열한 상황이 된 듯싶었다.
첫 서울문학기행은 시인 정지용의 녹번리로 시작되었다. ⓒ이선미
첫 서울문학기행은 지난 11일 오후 3시 녹번역에서 시작되었다. 저마다 열 체크를 하고 유튜브를 연결해 박미산 시인의 해설을 들으며 탐방을 시작했다.
녹번역에서 만나 열 체크를 하고 간단한 준비를 마친 후 탐방에 나섰다. ⓒ이선미
바람은 산들거렸지만 아직 이른 오후 햇살이 따가웠다. 녹번산골마을로 들어서서 아기자기한 골목을 오르니 정지용의 ‘녹번리’를 쓴 시벽이 호젓하게 나타났다. 초록의 숲으로 오르는 나무계단을 몇 개 올라 작은 쉼터에서 땀을 식혔다.
녹번산골마을에서 만나게 되는 정지용의 ‘녹번리’ 시벽 ⓒ이선미
조선시대에 관료들이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신들의 녹을 일부 떼어 두고 간 데에서 ‘녹번’이라는 이름을 얻은 녹번고개는 1972년 통일로가 생기면서 양쪽으로 나뉘었다. 2012년에 녹번동과 응암동의 두 마을에 ‘산골마을’이라는 같은 이름을 붙이고, 43년 동안 끊어졌던 길에 생태다리를 놓아 지금은 두 마을이 함께 주민참여형 재생사업을 하며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는 마을을 만들어가고 있다.
옛 녹번고개에 길이 생기면서 갈라졌던 녹번동과 응암동의 두 마을이 생태다리로 연결되었다. ⓒ이선미
생태다리를 건너 백련산 전망대까지 오르는 길은 제법 가팔랐다. 계단이 잘 만들어져 있었지만 일행을 쫓아가는 게 숨이 찼다.
이날 걸은 길은 은평둘레길 구간이기도 하다. ⓒ이선미
북한산 봉우리들과 앵봉산, 봉산 등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천만 시민의 희로애락이 펼쳐지는 도심이, 그야말로 가곡 ‘그네’의 노랫말처럼 ‘사바가 발아래’ 펼쳐졌다.
백련산 전망대에 오르니 북한산, 앵봉산, 봉산 등이 한눈에 펼쳐졌다. ⓒ이선미
오후의 햇살 속에서 박미산 시인이 전해주는 정지용의 삶과 시를 만났다. 사실 필자는 그에 대해서는 가톨릭적 정서와 ‘향수’, ‘카페 프린스’ 등 몇몇 시 정도밖에 알지 못했다. 백석에 빠졌다가 뒤늦게 정지용에 심취해 정지용 산수시로 박사논문을 썼다는 박미산 시인이 자상한 해설로 정지용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바람이 한 번씩 휘몰아 스치며 낯익은 꽃냄새가 스치기도 했다.
박미산 시인의 해설을 들으며 정지용 시인의 삶과 시세계를 만났다. ⓒ이선미
초기시인 ‘향수’와 ‘바다’, 유학에서 돌아와 활동하던 시기에 아이를 잃고 쓴 ‘유리창’과 서울에서의 마지막 거처였던 녹번리에서 발표한 ‘녹번리’를 살펴보았다. 이날의 목적지인 시 ‘녹번리’를 한 참석자가 낭송했다.
“여보! 운전수 양반 여기에다 내삐리고 가믄 어떠카오! 녹번리까지만 날 데려다 주오……”
시 ‘녹번리’에서 어둡고 혼란스럽던 해방 이후에 시인이 겪었을 고뇌가 전해졌다. 힘겨운 일제강점기를 지나와 해방이 되었어도 여전히 암울하던 국내 정세 속에서 어둠을 헤매던 시인의 탄식이 들리는 듯도 했다. 녹번리 초당에서 제자들을 따라나선 게 마지막이었던 시인의 행적은 언제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 후 정지용의 시는 오랫동안 언급마저 금기시되다가 1988년에야 납북작가들의 작품이 해금되어 우리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2020 서울문학기행 참가자들 ⓒ이선미
또다시 아기자기한 응암산골마을을 지나 정지용이 살았던 초당터로 향했다.
좁은 계단길이 낯설면서도 익숙한 듯한 풍경이다. ⓒ이선미
응암산골마을은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잘 정돈된 모습이다. ⓒ이선미
땀에 젖어가며 거리를 걷다 보니 문득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좁은 길에 가까스로 앉아 담소 중인 할아버지들, 얼굴 큰 해바라기가 중천의 태양을 향해 한껏 피어오른 골목, 사람들의 일상이 이어지는 길을 따라 정지용의 마지막 거처 앞에 닿았다. 그의 자취라곤 아무것도 없는 길 위에서 보이지 않는 무엇을 기억했다. 이미 떠나버리고 이미 사라져버린 것을 기억해보고자 했다.
정지용의 마지막 거처였던 초당터 앞에는 안내 동판이 벽에 붙어 있다. ⓒ이선미
마지막 일정은 소박한 국악 공연이 펼쳐졌다. 그들의 대금과 소리가 지치고 땀에 절은 몸을 식혀주었다. 김명남 명창이 '임방울 명창'의 이야기를 담은 단가 ‘추억’으로 첫 기행을 마무리해주었다. 준비한 공연이 끝났어도 참석자들의 박수가 이어졌다. 더운 날 겹겹이 껴입은 한복으로 우리를 기다려준 명창과 연주자들의 수고가 고마웠다.
기행의 마지막은 소박한 국악 공연이 펼쳐졌다. ⓒ이선미
처음 참여해본 서울문학기행은 강행군이었다. 시를 사랑하는 시민들도, 준비하고 이끌어준 진행자들의 열정도 뜨거웠다. 그 뜨거움 안에서 만나고 싶었던 정지용 시인의 한 생이, 그의 시어들이 말을 걸고 정갈한 그의 시들이 마음에 불씨를 남겨주었다. 서울 곳곳에 배인 문학의 자취를 따라가는 2020 서울문학기행은 10월3일까지 매주 토요일에 이어진다. 서울시 공공서비스예약 홈페이지에서 서울 시민 누구나 선착순으로 신청할 수 있다. 직접 참가를 하지 못해도 유튜브(‘어반TV’)를 통해서도 문학 소풍을 떠날 수 있다.
■ 2020 서울문학기행
○ 일시 : 2020. 7. 11. ~ 2020. 10. 3.매주 토요일 15:00-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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