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의 미각을 매료시킨 초콜릿의 역사
서울식품안전뉴스
발행일 2016.12.01. 13:34
초콜릿에서는 서양 문물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하지만 초콜릿의 기원은 유럽이나 미국이 아니라 고대 중앙아메리카에 있다. 당시의 초콜릿은 오늘날과 같이 ‘씹는’ 음식이 아니라 카카오 열매의 씨앗으로 만든 ‘마시는’ 음료였다. 기원전 멕시코 지역에는 신비의 문명을 건설한 마야족과 아즈텍족이 살았는데 그들에게 카카오는 ‘신들의 음식’이었으며 신이 내려준 선물이었다.
정복자 스페인과 갈색 금(金) 카카오
1519년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 일행이 신대륙에 도착한 것은 엘도라도, 곧 황금 도시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아즈텍 왕실 창고에 쌓여있는 온갖 금으로 만든 치장품과 도구들을 약탈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발견한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창고에는 카카오 원두가 그득하였다. 이것은 아즈텍 왕 몬테수마가 코르테스의 출현을 예언에 따른 케찰코아틀 왕의 재림이라 믿고 마련한 환영식에서 맛본 쓰디쓴 음료의 원료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스페인인들은 카카오 원두가 새로운 황금, 곧 ‘갈색 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즈텍족에게 카카오 원두는 음식이나 음료의 원료일 뿐만 아니라 화폐로도 쓰였다. 실제로 당시에는 100개의 카카오원두로 노예 한 명을, 4개로 토끼 한 마리를 살 수 있었으며, 10개로 성적 서비스를 살 수 있었다. 이러한 갈색 금 카카오원두도 약탈을 피할 수 없었다.
나아가 스페인 정복자들은 그들이 부리는 원주민 인부에게 카카오 원두를 임금으로 지불했다. 유럽에서 초콜릿 음료가 점차 확산하자 그들은 카카오 재배지를 확대해 나가면서 음료의 원료로뿐만 아니라 화폐로서의 카카오 원두의 가치를 최대한 활용하고자 했다.
초콜릿의 스페인화
쌉쌀하고 달콤한 초콜릿은 중앙아메리카가 원산지인 카카오나무 열매의 씨앗으로 만든다. 고대 마야족에게 카카오는 신들의 양식이었으며 카카오나무는 신성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었다. 마야족은 카카오 열매 씨앗을 갈아 물에 타고 끓인 후 여러 번 다른 그릇에 따라 거품을 내어 마셨다. 14세기 멕시코 분지를 차지했던 아즈텍 사회에서는 왕족과 귀족만이 이 음료를 마실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사치품을 맛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평민은 전장에 나가는 병사들뿐이었다. 이는 초콜릿이 힘을 북돋아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즈텍족에게 있어서 초콜릿은 지혜와 힘의 원천이었다.
또한 최음 효과를 위해 결혼식 행사의 음료로 쓰여 몬테수마 왕은 하루에 50잔 이상을 마셨는데, 그는 규방에 들기 전에 반드시 한 잔의 초콜릿을 더 마셨다고 한다. 아즈텍족의 초콜릿 음료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부드럽고 풍부한 맛을 내는 걸쭉한 음료와 달리 매우 쓰고 기름진 음료였다. 신대륙에 이주한 스페인인의 자손들인 크리오요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아즈텍족의 문화를 받아들여 토착화시켰는데, 초콜릿 음료 또한 이러한 혼융과정을 거쳐 일상적 음료가 되었다. 아즈텍인들이 보통 차갑게 마시거나 아니면 실온과 유사한 온도로 마셨던 것에 반해 스페인의 백인들은 초콜릿을 뜨겁게 마셨다.
또 초콜릿의 쓴 맛을 약화시키기 위해 사탕수수 자당이나 설탕을 넣었다. 그리고 초콜릿 음료에 향을 첨가하기 위해 이미 익숙한 육계피, 아니스, 후추와 같은 향신료뿐 아니라 고추와 같은 현지의 향신료가 쓰기도 했다.
유럽을 매료시킨 초콜릿
다른 희귀한 수입품과 함께 유럽에 수입된 초콜릿은 중과세 대상이었다. 이 때문에 값이 매우 비싸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상품이었다. 따라서 초콜릿은 아즈텍에서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에서도 특권층의 음료가 되었다. 스페인으로 넘어 온 이 신비로운 식품은 원기를 북돋우고 최음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커피와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초콜릿을 음료가 아니라 일종의 ‘약’으로 받아들인 셈이다. 초콜릿이 한 궁정에서 다른 궁정으로 이 귀족 저택에서 저 귀족 저택으로 이 수도원에서 저 수도원으로, 온 유럽을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초콜릿을 도입한 스페인에서는 17세기 전반 동안 초콜릿 음료를 마시는 관행이 궁정이나 귀족문화 속에 정착하였다. 프랑스 또한 곧바로 초콜릿의 매력에 빠져 들었다. 1615년 루이 13세와 결혼한 스페인의 공주 안느 도트리쉬가 초콜릿을 프랑스에 가져왔다. 초콜릿을 가지고 한 무리의 하녀들과 함께 궁정에 도착한 그녀는 많은 초콜릿 신봉자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아직은 소수만이 이를 맛볼 수 있었다. 1643년 루이 13세가 죽은 뒤, 여왕은 섭정을 하면서 그의 입맛을 궁정에 정착시켰다.
루이 16세와 결혼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이 먹을 초콜릿을 만들기 위해 제조업자를 오스트리아로부터 데려왔다. 그녀는 설탕과 바닐라만 첨가해서 단순하게 만들어진 초콜릿 음료를 즐겼다. 앙투아네트는 ‘여왕의 초콜릿 제조사’라는 직책을 만들었는데, 이 직책은 ‘자랑스러운 문장 장식을 여러 개 단 남작의 직위보다 더 돈벌이가 되는’ 자리였다.
1828년 초콜릿 산업에서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바로 마시는 초콜릿이 아닌 오늘날의 대부분 소비하는 ‘먹는 초콜릿’이 등장하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화학자 코엔라드 반 후텐은 카카오 버터를 분리하는 여러 차례의 실험 끝에 매우 정교한 유압 압착기를 고안했다. 이 압착기로 카카오 원두에서 카카오 버터를 분리해서 얻은 카카오 덩어리를 곱게 갈아 오늘날 코코아 가루라 불리는 것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반 후텐은 카카오 반죽에 카카오 버터를 섞어 부드러운 고형 초콜릿을 만들었다. 이로 인해 얼마 지나지 않아 초콜릿 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다양한 형태의 초콜릿과 초콜릿 과자가 세계인의 미각을 매료시키기 시작했다.
글 : 정한진(창원문성대학교 호텔조리제빵과 교수, <세상을 바꾼 맛> 저자)
출처 : 서울시 식품안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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