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3년 영조가 그곳에 행차한 이유! 공평도시유적전시관 이야기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4.08.28. 14:09

수정일 2024.08.28. 17:59

조회 1,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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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종로구 공평동에 위치한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조선시대에 발굴된 도시유적을 전시한 공간이다.
서울시 종로구 공평동에 위치한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조선시대에 발굴된 도시유적을 전시한 공간이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78) 공평도시유적전시관

이탈리아 나폴리 인근에 위치한 폼페이 유적은 지하 도시유적의 대표로 손꼽힌다. 기원 79년의 베수비오산의 화산 폭발로 매몰됐지만, 1748년 발견된 이래로 발굴이 진행돼 오늘날 그 전모를 거의 드러내고 있다. 폼페이 유적과는 비견할 수 없지만 서울에도 조선시대에 발굴된 도시유적을 전시한 공간이 있다. 종로구 공평동에 위치한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 그곳이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의 탄생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서울이라는 도시가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서울이라는 도시가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공평동 1,2,4 지구에 대한 도시 환경 정비 사업이 진행되던 2015년에 조선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서울의 옛 골목길과 건물터 등이 발굴된 것에서 시작한다. 서울시는 이곳의 보존을 결정했고, 2018년 9월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 탄생했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서울이라는 도시가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출토된 유구와 생활 유물을 이용한 다양한 콘텐츠와 전시기법을 통해 16~17세기 한양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사용했던 골목길이 확인돼 이문안길전동 골목길을 직접 걸으면서 조선시대 한양에 와 있는 느낌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전시관이 들어선 장소는 조선시대에도 한양의 중심 공간으로 중부 견평방(堅平坊)에 속했다. 광화문 앞에 형성된 육조 거리와 인접해 있고, 종로 일대에 형성된 시전(市廛) 건물의 한 축을 형성한다. 인근에는 중죄인을 심문하는 의금부와 그 맞은편에는 감옥인 전옥서가 있었다. 의료와 약재를 담당했던 기관인 전의감(典醫監)도 인근에 있었다. ‘공평동’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이곳에 있던 죄인을 심문하는 기관인 의금부가 있었던 만큼, ‘일처리를 공평하게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문은 치안이나 교화 등 민중들의 일상생활을 규제하는 것도 있었지만, 특수집단이나 관아 시설을 보호하기 위한 것들도 있었다.
이문은 치안이나 교화 등 민중들의 일상생활을 규제하는 것도 있었지만, 특수집단이나 관아 시설을 보호하기 위한 것들도 있었다.

구씨 종가 터에서 종로의 어물전으로 이어지는 길이 피맛길과 만나는 지점에는 이문(里門)이라 칭해지는 시설이 있었다. 이문은 치안이나 교화 등 민중들의 일상생활을 규제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특수 집단이나 관아 시설을 보호하기 위한 것들도 있었다. 어물전 뒤의 이문은 당시 권력을 가진 능성 구씨들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었다. 이 이문의 안쪽으로는 심지어 국가의 행정력조차 진입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이곳에 이문 시설이 있었음을 알리는 대표적인 공간은 1902년에 개업해 120년 이상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노포 ‘이문 설농탕’이다. 이문 설농탕은 현재에도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

능성 구씨의 외후손, 인조

공평도시유적전시관 일대에 세거했던 대표적인 가문은 능성(綾城) 구씨(具氏)이다. 능성 구씨는 주로 무관직을 역임해 왔는데, 구수영(具壽永:1456~1523)이 세종의 막내인 영응대군(永膺大君)의 딸인 길안현주와 혼인해 왕실과 인연을 맺게 됐다. 구수영은 12세에 영응대군의 사위로 뽑혀 세조로부터 특별히 선략장군부호군(宣略將軍副護軍)을 제수 받았다. 예종이 즉위한 뒤에는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오르고, 성종이 즉위하자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됐으며,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곧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중종반정을 도모하자, 이에 가담해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에 책록되고 능천부원군(綾川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연산군의 충복이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기도 했다.

『중종실록』의 사관은 구수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구수영은 영응대군의 여서(女壻)이다. 폐조를 당하자 스스로 제집 여비(女婢)를 골라서 궁중에 바치고 왕의 뜻에 아첨해 제멋대로 작폐하니, 권세가 왕과 같아서 사람들이 미워했다. 반정 때에 여러 장수들이 그를 쳐서 죽이고자 해 의논이 이미 결정됐는데, 그때 마침 수영의 족인(族人)이 그 뜻을 수영에게 누설하니, 수영이 알고 먼저 여러 장수들의 회의하는 곳을 찾아갔다. 이 때문에 과연 죽이지 않고 도리어 정국(靖國)의 공훈을 받게 돼, 당시의 사람들이 분하게 여겼다.”

구수영의 태화정 저택은 아들 구순(具淳)을 거쳐 3대째인 구사맹(具思孟:1531~1604)까지 이어졌다. 구사맹은 문과 급제 후 공조판서를 지냈으며, 이황(李滉)에게서 학문을 배우기도 했다. 저서로 『팔곡집(八谷集)』을 남겼다. 구사맹은 네 아들과 막내로 낳은 딸을 뒀는데, 이 딸은 선조와 인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 정원군(定遠君)과 혼인했다. 정원군은 능양군(陵陽君), 능원군(綾原君), 능창군(綾昌君) 등 3남을 두었는데 능양군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조선의 16대 왕이 됐다.

인조가 왕이 되면서 정원군은 원종(元宗)으로, 정원군 부인은 인헌왕후(仁獻王后)로 추존됐다. 인조는 왕위에 오르기 이전 시절에 외가인 구사맹의 태화정 저택에 살면서 부용당 연못 앞에서 글을 읽었다고 해 영조 때 이곳에 ‘잠룡지(潛龍池)’라는 현판을 보내 부용당에 걸었다고 한다. 인조의 잠저는 어의궁(於義宮)이라고도 했는데, 후에는 효종의 잠저와 구분해 인조의 잠저는 ‘상어의궁(上於義宮)’, 효종의 잠저는 ‘하어의궁(下於義宮)’으로 칭했다.

1773년 영조의 ‘잠룡지’ 행차

현재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을 방문하면, 영조가 80세가 되던 해에 이 지역을 방문했던 상황을 영상 자료로 보여주고 있다. 1773년 2월 15일의 『영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영조가 이날 왜 이곳을 방문했는지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현재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을 방문하면, 1773년 2월 15일 영조가 이 지역을 방문했던 상황을 영상 자료로 보여주고 있다.
현재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을 방문하면, 1773년 2월 15일 영조가 이 지역을 방문했던 상황을 영상 자료로 보여주고 있다.

『영조실록』에는 “왕이 잠룡지(潛龍池)에 행행(行幸)했다. 잠룡지는 어물전(魚物廛)의 이문(里門) 안에 있는데 인묘(仁廟:인조)가 어렸을 때에 놀던 곳이기 때문에 이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왕이 잠룡지의 정자에 나아가 구윤명(具允明)에게 지난날의 유적(遺跡)에 대해 물으니, 구윤명이 효종의 어필(御筆)이 그의 집에 많이 있다고 말하자, 왕이 즉시 소여(小輿)를 타고 그의 집으로 가려 했다. 도승지 이계(李溎)가 아뢰기를, ‘사저(私邸)에 왕림(枉臨)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닙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나는 어필을 보고 싶다.’ 하고 이어 태화정(太華亭)에 나아가 어필을 봉람(奉覽)한 뒤에 집에 있는 여러 구씨(具氏) 모두를 불러 만나보고 상을 내리거나 혹은 뽑아서 등용하라고 명했다.”

『승정원일기』의 1773년 2월 15일의 기록에는 영조가 80세를 맞아 만감이 교차하며 추모의 마음이 커서, 이곳을 방문한다고 하고 있다. 또한 구씨가 영응대군의 외후손이고, 잠룡지와 태화정과 효종의 어필을 보고자 했던 의지가 보인다. 당시 이곳을 지키던 봉사손(奉祀孫)이자 태화정의 주인 구윤명(具允明:1711~1797)에게 특별히 가자(加資)한 내용도 보인다.

구윤명은 1743년(영조 19)에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14년 동안 주로 승지직으로 있으면서 영조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1791년(정조 15)에는 정조의 명으로 『무원록(無寃錄)』을 언해하였다. 『승정원일기』의 기록에는, 영조가 구윤명에 대하여 ‘태화정주인봉은군’이라 칭하고 하물며 ‘능천봉사손’이라고 표현한 것은 구윤명이 능천부원군(綾川府院君) 구인후(具仁垕:1578~1678)의 봉사손(奉祀孫)으로 능은군(綾恩君)을 습봉(襲封)했기 때문이다. 영조가 이 사실을 정확히 인식한 것에서도 왕실과 능성 구씨의 깊은 인연을 확인할 수가 있다. 구인후는 구사맹의 손자로 인조반정에 참여해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올랐다.

영조의 이날 행차 때 세손의 지위에 있던 정조도 함께 수행했음은 1794년(정조 18) 3월 17일 『일성록』의 기록에 보인다. 정조는 도성을 행차하는 길에 구상(具庠)에게 하교를 내려서, “경의 집 태화정(太華亭)에 선조(先朝:영조)께서 방문하셨을 때 나도 배종(陪從)했고 도승지도 궁관(宮官)으로서 수가(隨駕)해 참석했다.”고 해 당시 자신도 선왕인 영조와 함께 이곳을 찾았음을 기억했다.

이어서 “정자의 모양과 집터는 아직도 기억이 나는데, 그때의 연월을 상세히 기억하지 못하겠다. 과연 참고할 만한 문적(文蹟)이 있는가?” 하니, 구상이 아뢰기를, “이는 계사년(1773, 영조 49)에 있었던 일이나, 그 당시 신이 제주에 귀양을 가 있었기 때문에 사실에 대해서는 상세히 모릅니다.”고 했다. 정조나 구상은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지만, 『영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이날이 1773년 2월 15일임이 분명하게 기록돼 있다.

정조는 하교해 “선조께서 어제(御製)를 남기셨고 나도 화답해 지어 올렸다. 그때의 보첩(寶帖)이 아직도 내각에 있으니 각신을 시켜 베껴서 보내도록 할 것이다. 경이 정자에 새겨 걸어라.”고 지시했다. 영조에 이어 정조가 이곳을 찾는 감회를 말하고, 보첩을 태화정에 게시하게 했음을 알 수가 있다.
『일성록』의 기록에 따르면, 1773년 영조의 잠룡지 행차에 정조도 함께 수행했다.
『일성록』의 기록에 따르면, 1773년 영조의 잠룡지 행차에 정조도 함께 수행했다.

한양의 중심에 위치하여 관청, 시전, 양반댁, 인조의 잠저 등 도시유적을 지하에 그대로 담고 있는 ‘공평도시유적전시관’. 영조와 정조가 직접 이곳을 찾아 감회를 표현한 부분이 생생한 기록으로 남아 있어서, 우리에게 더욱 생생한 역사적 현장으로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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