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노소, 빈부귀천 없이 배우다! 근대 교육의 시작은?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3.07.26. 16:22

수정일 2023.07.26.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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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교수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은 미국의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교육기관 '배재학당'의 동관을 활용한 박물관이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은 미국의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교육기관 '배재학당'의 동관을 활용한 박물관이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51) 학교, 근대의 상징이 되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교육에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 성균관과 향교, 서당 등 전통 교육기관을 대신한 근대식 교육기관이 점차 설립된 것이다. 정부에 의해 설립된 근대식 학교도 있었지만, 서양인 선교사들이 주도한 근대식 학교들이 설립되면서, 교육 분야에서도 근대적인 모습이 확연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육영공원과 원산학사

근대식 학교의 시작을 알린 것은 1883년 8월 서울에 동문학(同文學)을 세우고 이곳에서 외국어를 가르친 것이었다. 동문학은 통상사무아문의 부속기관으로 설립하였는데, 개항 이후 수요가 늘어난 영어 통역관을 양성하는 일이 주된 업무였다. 젊고 총명한 자 40여 명을 선발하여 오전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영어, 일본어, 서양의 필산(筆算)을 가르쳤는데, 학교라기보다는 통역관 양성소 역할을 했다.

동문학은 1886년 최대의 근대식 공립학교 육영공원(育英公院)이 설립되면서 폐지되었다. 미국과 일본으로 파견되어 새로운 문물을 접한 개화파들을 중심으로 근대식 학교의 설립 논의는 미국에서 헐버트, 길모어, 번커 등 세 명의 외국인 교사가 옴으로써 그 결실을 맺게 되는데, 1886년 9월 23일에 개교한 육영공원이었다. 육영공원은 ‘영재를 기르는 공립학교’라는 뜻을 담고 있다. 처음에는 서울 정동(貞洞)에 설립하였으나, 1891년 육영공원이 독일영사관 측에 그 부지를 넘겨주면서 박동(礡洞:현재의 수송동 82번지 일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근대식 학교 설립 논의는 헐버트, 길모어, 번커 등 세 명의 외국인으로 인해 결실을 맺었다. 사진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근대식 학교 설립 논의는 헐버트, 길모어, 번커 등 세 명의 외국인으로 인해 결실을 맺었다. 사진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1886년(고종 23) 7월 11일 고종은 전교를 내려, “육영공원 어학(語學)을 이제 시작하여 사람을 수용해야 하겠으니, 학도들을 내외 아문의 당상관과 낭청의 아들, 사위, 아우, 조카, 친척 가운데서 감당할 만한 사람을 선발하여 추천하도록 분부하라.”고 지시하여 육영공원의 시작을 알렸다.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학생의 구성은, 현직 관료나 양반 자제 가운데 젊고 총명한 사람을 선발하였다. 친일파이자 매국노 이완용이 육영공원 출신이었던 점도 주목된다. 관료의 자제로는 좌원반(左院班)을 만들고, 양반 자제로는 우원반(右院班)을 만들어 두 학급 35명을 두었다. 1887년에는 20명, 1889년에는 50명으로 시기별 인원의 차이가 있었다.

교수들은 처음 미국인 헐버트, 길모어, 번커 1894년까지 근무하였고, 번커가 사임한 뒤에 영국인 허치슨과 핼리팩스가 1894년 폐교될 때까지 근무하였다. 1886년 8월 1일 육영공원에 학과를 설치하면 만든 절목에는 “매일 학습하는 차례는 첫째는 책읽기, 둘째는 습자, 셋째는 글자 쓰는 법 배우기, 넷째는 셈 배우기, 다섯째는 셈법을 익힌 것을 연습하기, 여섯째는 지리, 일곱째는 문법 배우기이다.

처음 배우기를 졸업한 학도는 다음과 같은 과목을 공부한다. 첫째는 대산법(大算法), 둘째는 각국의 언어, 셋째는 여러 가지 배운 법을 빨리 쉽게 깨닫는 것, 넷째는 만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정확히 이해하는 것 - 의학(醫學)·농리(農理)·지리(地理)·천문(天文)·기기(機器) -, 다섯째는 각국 역사, 여섯째로 정치 - 각국 조약법과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군사를 쓰는 전술” 등 당시의 수업 과목이 나타나 있다. 이외에, “섣달 - 12월 25일부터 30일까지 - 과 무더운 더위 때 - 초복부터 말복까지 - 가 되면 방학(放學)을 한다.”는 규정도 흥미롭다.

육영공원은 정부의 재정 지원이 악화되면서 운영이 어려워졌고, 학생들의 태만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1889년(고종 23) 3월 20일의 “요즘 듣건대 육영공원의 학도들이 까닭 없이 병을 핑계 대고 공부를 성실히 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교사가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는 『고종실록』의 기록은 육영공원에 위기가 찾아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미국인 교사들은 계약 기간을 마치고 돌아갔고, 조정에서는 영국인 허치슨에게 육영공원을 넘겼으나, 1894년 폐교를 막지는 못했다. 이후 육영공원은 이후 관립영어학교를 거쳐 한성외국어학교로 통합되었다.
나무 사이로 햇살이 스며드는 늦은 오후의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나무 사이로 햇살이 스며드는 늦은 오후의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민간에서도 근대적 학교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1883년에 세운 원산학사(元山學舍)가 최초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에 의해 개항된 세 개의 항구 중 하나였던 원산에 세운 것은 1880년 4월 원산의 개항장에 외국인들이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근대적 학교의 필요성을 인식한 덕원부사 겸 원산 감리로 있던 정현석(鄭顯奭)이 중심이 되어, 어윤중(魚允中)과 정헌시(鄭憲時) 등의 지원을 받아 설립했다.

덕원과 원산의 주민들, 원산상회소(元山商會所) 등 지역민들의 지원도 큰 역할을 하였다. 문예반과 무예반(武藝班)으로 편성하였는데, 문예반은 약 50명의 학생을 뽑았고, 무예반은 정원 200명을 뽑아서 별군관(別軍官)을 양성하도록 하였다. 문무의 공통과목으로는 산수·격치(格致: 물리), 기기(機器), 농업, 양잠, 광채(礦採) 등 실제에 응용할 수 있는 학문을 주로 가르쳤다.

특수과목으로서 문예반은 경의(經義)를, 무예반은 병서(兵書)를 가르쳤다. 원산학사는 한국 최초의 근대학교이자 사립학교라는 점과 특히 외국인 손에 의하지 않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힘만으로 설립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고종은 나라의 인재를 배양하라는 뜻으로 아펜젤러에게 ‘배재학당’이라는 교명과 간판을 하사했다.
고종은 나라의 인재를 배양하라는 뜻으로 아펜젤러에게 ‘배재학당’이라는 교명과 간판을 하사했다.

서양인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들

개항 이후 서양인 선교사들이 국내로 들어오면서, 서양 문물의 도입과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근대식 학교들도 다수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미국인 아펜젤러(1858~1902)가 1885년에 세운 배재(培栽)학당이 최초였다.

아펜젤러는 1884년 미국 감리교 선교위원회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1885년 서울에 도착하였다. 1886년 6월 8일에 배재학당이 시작되었으며, 1887년 2월 고종은 나라의 인재를 배양하라는 뜻으로 아펜젤러에게 ‘배재학당’이라는 교명과 간판을 하사해 국가공인 학교로 승인했다.
'배재학당'의 최초 설립자이자, 미국에서 온 선교사 아펜젤러
'배재학당'의 최초 설립자이자, 미국에서 온 선교사 아펜젤러

개화파 지식인 서재필과 윤치호, 초대 대통령 이승만, 한글학자 주시경,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의학자 오긍선, 소설가 나도향,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시인 김소월 등이 배재학당 출신이다. 
이화학당 프라이홀(梨花學堂 Frey Hall)의 전경을 담은 사진엽서
이화학당 프라이홀(梨花學堂 Frey Hall)의 전경을 담은 사진엽서

메리 스크랜튼(1832~1909)은 183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에서 감리교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1853년 윌리엄 스크랜튼과 결혼했지만 19년 만에 사별한 이후, 외아들 윌리엄이 의료를 통한 조선 선교를 결심하자 조선 땅을 밟았다. 1886년에 설립한 이화(梨花)학당은 유교적 관습에 얽매여 있던 조선 여성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큰 학교이다.

1887년에는 고종으로부터 '배꽃같이 순결하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의 ‘이화학당(梨花學堂)’의 교명을 하사받았다. 정동(貞洞)에 설립되었으며, 이화여고와 이화여대의 전신이다. 이화여고는 현재에도 원래 세워진 위치에 있다. 1919년 3.1 만세 운동을 주도한 유관순 역사가 이화학당 출신이다.

미국인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1859~1916)는 1886년 경신(儆新)학당을 세웠다. 1885년 알렌의 도움으로 입국한 언더우드는 입국하자마자 서울 정동에 한국 최초의 고아원인 언더우드학당(경신학당)을 설립했다. 1886년 서울 정동의 자신의 집에 부속된 건물을 이용하여 고아원 형식의 학교를 창설한 것이 현재의 경신중, 고등학교의 시작이었다. 경신중, 고등학교는 현재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에 위치해 있다.

1915년 언더우드는 경신학당을 모태로 고등교육기관인 경신학교 대학부(현 연세대학교의 전신)를 설립했다. 경신학교 대학부는 1917년부터 연희전문학교의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1887년에 설립된 정신(貞信)여학교는, 1886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인 애니 앨러스(1860~1938)가 정동에 정동여학당을 만든 것이 시작이었다. 1886년 7월, 벙커, 헐버트 등과 함께 내한했는데, 미국 북장로교가 파송한 첫 번째 여성 의료 선교사였다. 앨러스 선교사는 정식 의사는 아니었지만 내한 초기 제중원 부녀과에서 알렌을 도와 의료 선교사로 일했으며, 곧바로 명성황후를 모시는 의사가 되었다.
정동여학당이 처음 세워진 곳은 현재의 덕수궁 중명전 자리였다.
정동여학당이 처음 세워진 곳은 현재의 덕수궁 중명전 자리였다.

애니 앨러스는 함께 내한한 벙커 선교사와 결혼했으며(1887년), 같은 해 6월에는 정동여학당(현 정신여고)을 설립하여 2년 동안 초대 교장으로 봉직했다. 정동여학당이 처음 세워진 곳은 현재의 덕수궁 중명전 자리였다. 1895년 종로구 연지동으로 이전하면서 연동여학당으로 교명을 바꾸었다. 1909년 정신여학교로 개칭하였으며, 현재는 송파구 잠실에 위치해 있다.

미국인 선교사들의 학교 설립에는 미국을 통해 서양의 신문물을 수용하려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적극적인 지원도 큰 힘이 되었다. 선교사들이 세운 미션스쿨은 전통적인 교육 체계와는 다르게 남녀노소, 빈부귀천,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보편적인 교육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조선이 근대식 교육으로 그 방향을 잡아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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