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이 경희궁을 지은 사연…왕의 기운 얻고자 했으나 몰락 불러와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1.12.15. 16:55

수정일 2021.12.15.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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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교수
숭정문에서 바라본 경희궁의 정전, 숭정전
숭정문에서 바라본 경희궁의 정전, 숭정전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14) 광해군과 경희궁의 건설

1617년(광해군 9) 광해군의 주도하에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는 궁궐의 창건이 시작되었다. 궁궐의 공사는 1620년에 완성되었는데, 이 궁궐이 바로 경희궁이다. 경복궁을 북궐(北闕), 창덕궁과 창경궁을 동궐(東闕)이라 하였고, 경희궁은 서쪽에 있는 궁궐이라는 뜻으로 서궐(西闕)이라고도 하였다.

1. 인왕산 자락 왕기설(王氣說)

경희궁 창건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1617년 6월의 일로서 이미 인왕산 아래 사직단 동쪽에 인경궁(仁慶宮)을 지으려는 중이었다. 이보다 2년 앞선 1615년에는 창경궁을 중건하였는데, 이때 남은 재물을 인왕산 아래로 옮겨 놓고 인경궁의 창건을 준비하였다. 창경궁을 중건할 때 선수청(繕修廳)을 두고 일부 수리만 할 예정이었으나 공사 도중에 범위가 확대되고 이에 맞추어 영건(營建)을 담당할 조직도 선수도감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선수도감은 영건도감으로 명칭이 바뀌어 본격적인 궁궐 창건에 대비한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이후 영건도감의 지휘 아래 인경궁과 경희궁 공사가 진행되었다. 

인경궁과 경희궁 두 궁궐을 동시에 건립한다는 것은 많은 무리가 따랐으므로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수십 차례나 반대 상소가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를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했다. 광해군이 공사를 강행한 명분은 자신이 왜란 이후 머물던 경운궁에 요변(妖變)이 있다는 것이었다. 경운궁에서 다른 궁궐로 이어(移御)하기 위해 창덕궁을 중건하였만 창덕궁도 불길하여 창경궁을 중건하였다. 광해군은 창경궁에 들 것을 권하는 신하들의 요구에, 한양의 지기(地氣)가 쇠하였다는 지관의 말을 빌어 교하(交河)로 천도하겠다는 주장을 폈다. 그리고 교하 천도가 성사되지 못하자, 이번에는 또 인왕산 아래에 궁궐을 지어 거처하겠다면서 새로운 궁궐 인경궁(仁慶宮) 건설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공사 규모를 크게 벌여 놓은 데다가 사직(社稷)과의 경계 문제로 공사의 진행이 어렵게 되었다. 

이에 광해군은 새문동(塞門洞)에 왕기(王氣)가 서려 있다는 술사 김일용(金馹龍)의 말을 핑계 삼아 또 다른 신궁(新宮)인 경희궁을 창건하고자 한 것이었다. 1617년(광해군 9) 6월 11일의 『광해군일기』에는 그날의 상황을, “새 궁궐을 새문동에다 건립하는 것에 대해 의논하였다. 술인(術人) 김일룡이 또 이궁(離宮)을 새문동에다 건립하기를 청하였는데, 바로 정원군(定遠君)의 옛집이다. 왕이 그곳에 왕기(王氣)가 있음을 듣고 드디어 그 집을 빼앗아 관가로 들였는데, 김일룡이 왕의 뜻에 영합하여 이 의논이 있게 된 것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한 왕기설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이자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정원군을 제거하기 위한 술수로서 처음부터 정치적인 의도가 컸다. 조정의 대신들은 이미 창덕궁과 창경궁 등의 궁궐이 있는데, 또 다시 경희궁을 건립한다면 궁성 안은 궁궐로 가득 차게 되므로 민폐가 크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한 도성 안에 궁궐이 지나치게 많은 듯합니다. 그런데 지금 또 서별궁에다 전우(殿宇)를 조성해서 궁궐 모양을 만들 경우, 철거를 당한 무지한 백성들이 어찌 국가의 사정상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하소연하면서 원망하는 소리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고 하면서, 경희궁 공사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광해군은 이에 “세 궁궐이 모두 안전하고 깨끗지 못하여서 장차 거처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부득이 이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확고한 뜻을 전했다. 이에 광해군은 궁내에 요변이 있다느니, 한양의 지기가 쇠하였다느니, 또는 왕기가 서렸다느니 하는 등 신비적이고 비합리적인 근거를 내세우면서 공사를 강행했다. 
경희궁 숭정전의 정문인 숭전문, 뒤편에 인왕산이 보인다
경희궁 숭정전의 정문인 숭전문, 뒤편에 인왕산이 보인다

2. 경희궁 건립 과정

1617년(광해군 9) 6월 인경궁과 경희궁의 창건을 결정한 이후, 광해군은 “인왕산 아래의 신궐[인경궁]은 시문용과 성지의 말에 따라 짓고, 서별궁[경희궁]은 김일룡이 말한 바에 따라 지으라고 도감에 말하라.”고 하였다. 인경궁과 경희궁의 공사를 병행케 한 것이다. 이때까지 경희궁은 ‘서별궁(西別宮)’으로 칭해졌다가 ‘*경덕궁(慶德宮)’이란 새 이름을 얻었다. (*경덕궁은 ‘경덕’이 정원군(후에 원종으로 추존)의 시호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로, 영조 때에 ‘경희궁’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광해군은 공사의 진행에 관심을 가지고 상황을 세세하게 검토하였다. 그러한 왕의 뜻에 부합하고자 해서인지, 궁궐 역사에 동참하고자 하는 인물들도 생겨났다. 김극효는 옛 집터의 섬돌과 주춧돌을 도감에 바쳤으며, 유대일과 이중기는 집터를 경희궁의 대내에 편입되게 하였다. 요즈음으로 보면 광해군의 뜻에 맞추어 기부를 한 것이다. 광해군은 이들에게 관직을 제수해주었으며, 그 대가에 상응하는 물품도 내려주었다. 『연려실기술』에서는 궁궐을 짓는데 재료를 제공하는 등의 일로 관직을 제수받은 자들을 비꼬아 ‘오행당상(五行堂上)’이라고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광해군이 관직을 임명할 때에 은이 많고 적은 것을 보아서 벼슬 품계를 올리고 낮추며 또 인경궁·자수궁(慈壽宮)·경덕궁을 건축할 때 민가를 모두 헐고 담장을 넓혔으며 산에 나무를 모두 베어서 큰 뗏목 배가 강에 이어져 있고 인부들을 징발하여 중들이 성안에 가득 찼었다. 그때 집터·돌·은·나무 등을 바치고 혹은 내천을 막아 물을 가두고 혹은 숯을 태워 쇠를 다룬 자도 모두 옥관자의 반열에 올렸는데, 사람들이 오행당상(五行堂上: 물·불·쇠·나무·흙 다섯 가지로 얻은 당상관)이라 불렀다.」 

공사 반대 여론도 적지 않았다. 왜란 이후 재정의 궁핍함과 상황의 어려움을 들어 공사 중지를 상소했으나, 광해군은 공사가 이미 반 이상 끝났으니 그만둘 수 없다고 하였다. 반대가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경희궁 공사는 1620년까지 계속되었다. 그해 3월 광해군은 “내가 경덕궁을 보니, 거의 다 조성되었는데 다만 산정(山亭)이 아직 조성되지 않았고 담장의 일도 끝나지 않았다. 다시 더 일을 독려하여 금년 안으로 아주 끝내는 것이 좋겠다.”고 하며 이번 해에는 꼭 마무리 지을 것을 강조하였다. 

이에 대해 사관(史官)은 “이때에 흉년이 이미 극도의 상황에 이르러 굶주려 부황난 사람이 잇달아 있으니, 마땅히 내탕고에 저장한 곡식을 풀어 우러러 바라보고 있는 백성들을 구제해야 한다. 그런데 2천 석의 쌀을 도리어 돌을 사들이는 비용으로 돌렸으니, 애석하다.”고 경희궁 공사를 비판하였다. 광해군의 강력한 의지 속에 완성된 경희궁은 한편으로는 광해군의 몰락을 재촉하는 부메랑이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낸 서인 세력은 광해군 폐출의 명분으로, 그가 벌인 대규모 토목 공사를 꼽았던 것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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