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에게 나눈 따뜻한 밥 한끼, 삶의 디딤돌이 됩니다
발행일 2022.10.06. 15:50
[우리동네 시민영웅] ⑮ 노숙자를 위한 무료 급식 지원하는 '바하밥집' 김현일 대표
서울 곳곳을 밝히는 ‘우리동네 시민영웅’을 찾아서...
오늘 우리동네 시민영웅의 주인공은 '혼자 잘 사는 것'보다 '더불어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을 택한 분입니다. 20여 년 간 노숙자를 도우며, 외로운 아이들을 가족으로 맞이한 '바하밥집' 김현일 대표입니다. 한 때 그도 노숙자 생활을 해봤기에 '동병상련'의 마음이 컸다는대요, 그가 건네는 밥 한끼를 나눠 먹은 듯 맘 한 켠이 따뜻하고 든든하게 채워지는 것 같습니다.
바하밥집 봉사자들이 노숙자들에게 배식하고 있다. ⓒ바하밥집
매주 화요일, 목요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성북구 보문로 인근에 있는 노숙자들이다. 그들은 '바하밥집'의 봉사자들이 정성껏 만든 밥을 먹기 위해 무더위에도 줄을 길게 서 있다. 김현일 대표는 지난 2009년부터 바하밥집을 운영하고 있다. '바하밥집'은 바나바하우스밥집의 줄임말이다. 김현일 대표가 노숙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매주 화요일, 목요일에 노숙자들이 식사를 받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바하밥집
김현일 대표는 한때 노숙자로 생활했던 적이 있었다. 1997년 그 시절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암담했던 시기다. 'IMF경제위기'라고 불렀던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파산하고 거리로 내몰렸다. 김현일 대표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그는 사업 실패로 인해 잠시 노숙자로 생활한 적이 있다. 용산, 을지로 일대를 6개월 간 전전하면서 지내야 했다. 그래서 춥고 배고프고 외로운 노숙자의 삶이 어떤지를 생생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가족이 기다리고 있어서 노숙자 생활에서 벗어나 복귀할 수 있었다.
동병상련이라고 할까? 노숙자로 생활하면서 같은 노숙자 신세로 지내는 분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자신처럼 가족이나 건강한 공동체가 있다면 언제든 가족이나 공동체의 품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텐데 그럴 수 없는 분들이 많았다. 노숙자 시절, 그는 자주 무료급식소에서 밥을 받아먹었다. 그가 겪었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지금의 '바하밥집'을 운영하고 있다.
동병상련이라고 할까? 노숙자로 생활하면서 같은 노숙자 신세로 지내는 분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자신처럼 가족이나 건강한 공동체가 있다면 언제든 가족이나 공동체의 품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텐데 그럴 수 없는 분들이 많았다. 노숙자 시절, 그는 자주 무료급식소에서 밥을 받아먹었다. 그가 겪었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지금의 '바하밥집'을 운영하고 있다.
김현일 대표는 바하밥집을 열어서 노숙자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윤혜숙
김현일 대표의 말에 의하면, 약 70%의 노숙자들은 일하고 있다. 대게 일용직이겠지만 그분들은 나름 주어진 상황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그분들이 하루 일을 끝낸 저녁 시간에 밥을 제공하게 된 시작은 이랬다.
2009년 1월 14일 그날은 우리 고유의 명절인 설날이었다. 김 대표는 갑자기 과거 노숙자 신세로 지냈던 설움이 생각나서 동네 인근 노숙자들이 있는 곳을 찾아갔다. 그러면서 1주일에 한 번 노숙자에게 밥 한끼를 제공했는데, 입소문이 나면서 많은 노숙자들이 그를 찾아오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김 대표 자신의 용돈으로 노숙자의 식사비를 마련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고 결국 자신의 전체 수입으로 노숙자의 식사를 준비해야만 했다. 다행히 맞벌이 부부였기에 부인이 버는 돈으로 집안의 생활비를 충당하면서 살아왔다.
김 대표 부인은 오갈 곳 없는 청소년들을 집으로 데려와서 살게 했다. 그게 '바나바하우스'다. 2003년에 바나바하우스를 시작했고, 2009년에 바나바하우스밥집(바하밥집)을 시작했다.
2009년 1월 14일 그날은 우리 고유의 명절인 설날이었다. 김 대표는 갑자기 과거 노숙자 신세로 지냈던 설움이 생각나서 동네 인근 노숙자들이 있는 곳을 찾아갔다. 그러면서 1주일에 한 번 노숙자에게 밥 한끼를 제공했는데, 입소문이 나면서 많은 노숙자들이 그를 찾아오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김 대표 자신의 용돈으로 노숙자의 식사비를 마련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고 결국 자신의 전체 수입으로 노숙자의 식사를 준비해야만 했다. 다행히 맞벌이 부부였기에 부인이 버는 돈으로 집안의 생활비를 충당하면서 살아왔다.
김 대표 부인은 오갈 곳 없는 청소년들을 집으로 데려와서 살게 했다. 그게 '바나바하우스'다. 2003년에 바나바하우스를 시작했고, 2009년에 바나바하우스밥집(바하밥집)을 시작했다.
김현일 대표는 바나바하우스에서 오갈 곳 없는 아이들과 대가족을 이루며 살고 있다. ⓒ윤혜숙
그렇다면 바나바하우스는 어떻게 시작했을까? 1995년 무렵 김현일 대표는 신문보급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새벽에 신문보급소에 갔더니 조그만 아이가 밥을 훔쳐먹고 있었다. 14살 난 그 아이는 3살 때 어머니가 가출하고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 슬하에서 성장했다.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는 아이는 배가 고파서 새벽에 불 켜진 신문보급소에 들어왔던 것이다. 아이는 그 자리에서 라면 5개를 먹을 정도로 몹시 굶주려 있었다.
아이의 사정이 딱해서 김 대표는 언제든 배가 고프면 우리 집에 밥을 먹으러 오라고 했다. 그런 아이가 하나둘 늘어나면서 가족이 되었다.
아이의 사정이 딱해서 김 대표는 언제든 배가 고프면 우리 집에 밥을 먹으러 오라고 했다. 그런 아이가 하나둘 늘어나면서 가족이 되었다.
바나바하우스 거실은 대가족이 생활하는 공간답게 살림살이가 많다. ⓒ윤혜숙
처음에는 3명으로 출발했는데 지금 14명의 대가족을 이루고 있다. 바나바하우스에서 김현일 대표와 같이 생활했던 아이들 중엔 어느덧 50대 초반의 중년이 된 이도 있다. 김현일 대표의 자녀들에겐 이모나 삼촌과 같은 존재다. 김현일 대표의 집을 나와서 독립하고 어엿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도 명절 때마다 잊지 않고 찾아온다.
김현일 대표는 아이들과 지내면서 오히려 도움 받는 게 많았다고 한다. 그것을 '공동체의 힘'이라고 표현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그때 돈이 없어서 아이에게 필요한 옷, 신발, 가방 등을 사줄 수 없었다. 그런데 한 집에서 지내는 아이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필요한 것을 아이에게 선물해줬다.
김현일 대표는 아이들과 지내면서 오히려 도움 받는 게 많았다고 한다. 그것을 '공동체의 힘'이라고 표현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그때 돈이 없어서 아이에게 필요한 옷, 신발, 가방 등을 사줄 수 없었다. 그런데 한 집에서 지내는 아이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필요한 것을 아이에게 선물해줬다.
바나바하우스에는 방마다 공동체 생활에 필요한 이층 침대가 있다. ⓒ윤혜숙
세상이 각박하고 살기 어려워서 자신이 낳은 아이도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내 아이뿐만 아니라 남의 아이들까지 한 집에서 가족처럼 돌봐줬으니 고충도 컸을 것이다.
하지만 김현일 대표는 “살면서 그게 최선이었어요. 서로 도와가며 살아가는 거죠”라면서 “지나고 보니 아름다운 삶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라고 회상한다. 그는 “공동체적 삶이 최고의 삶인 것 같아요”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김현일 대표는 “살면서 그게 최선이었어요. 서로 도와가며 살아가는 거죠”라면서 “지나고 보니 아름다운 삶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라고 회상한다. 그는 “공동체적 삶이 최고의 삶인 것 같아요”라고 강조한다.
봉사자들이 노숙자들에게 제공할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바하밥집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선한 삶을 방해하는 게 많다. 경쟁사회에 내몰려서 무조건 앞만 보고 내달리니깐 인생의 본질이나 가치를 외면한 채 지내고 있다. 그는 청년시절에 우리 사회가 변하지 않는 것에 절망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생각을 바꿨다. 세상을 바꾸진 못해도 나와 내 주변을 바꾸는 데 일조해야겠다고! 그는 “지금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에 집중하자"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아이들과 함께 대가족을 이뤄서 지내다 보니 마냥 좋았던 것만은 아니다. 때론 실망도 하고 좌절도 했다. 그는 변화하는 것은 내 몫이 아니고 아이들 각자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고 한다.
아이들과 함께 대가족을 이뤄서 지내다 보니 마냥 좋았던 것만은 아니다. 때론 실망도 하고 좌절도 했다. 그는 변화하는 것은 내 몫이 아니고 아이들 각자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고 한다.
노숙자들에게 주는 따뜻한 밥 한끼는 그들에게 삶의 디딤돌이 될 수 있다. ⓒ바하밥집
1965년생인 그가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온 지 어언 20년이 지나고 있다. 가끔 일을 그만둔 채 쉬고 싶어도 이젠 이 일의 가치를 알기에 중단할 수 없다고 한다. “나보다 훨씬 어렵게 사는 이웃들이 많아요. 타인의 삶이 내 시야에 들어오면서 그들의 고통, 가난, 외로움을 봤고, 그들과 함께하면서 오히려 내 삶의 만족도가 높아졌어요”라고 말한다. 이른바 '마더테레사 효과'라고 하겠다. 남을 돕는 활동을 통하여 오히려 김현일 대표의 내면이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겠다.
바하밥집은 밥, 자활, 공동체를 지향한다. ⓒ바하밥집
바하밥집에는 김현일 대표 부부의 삶의 지향점이 내재되어 있다. 바하밥집의 3대 가치로 '밥, 자활, 공동체'를 꼽는다. 단순히 식사만 제공하는 것에서 나아가 자활, 공동체를 꾸리는 일을 병행하고 있다.
김 대표는 매주 2회 배식하면서 살펴보니 2015년부터 청년 노숙자들이 부쩍 늘어났다고 한다. 그는 청년을 돌보는 게 사회적 비용 절감 차원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또한 집안에 고립된 은둔형 청년을 돌봐줄 가족이 없다면 그들이 노숙자로 내몰릴 수도 있다면서 우려를 표한다. 그래서 주위에 은둔형 청년이 있는지 살펴보고, 그들을 집밖으로 끌어내기 위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김 대표는 매주 2회 배식하면서 살펴보니 2015년부터 청년 노숙자들이 부쩍 늘어났다고 한다. 그는 청년을 돌보는 게 사회적 비용 절감 차원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또한 집안에 고립된 은둔형 청년을 돌봐줄 가족이 없다면 그들이 노숙자로 내몰릴 수도 있다면서 우려를 표한다. 그래서 주위에 은둔형 청년이 있는지 살펴보고, 그들을 집밖으로 끌어내기 위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김현일 대표는 자신이 있는 곳에서 작은 봉사를 지속할 것을 당부한다. ⓒ윤혜숙
김현일 대표는 “내가 사는 곳에서 아름답게 살자”고 당부한다. 행복의 기준은 각자의 경험과 가치에 따라서 다르다. 하지만 이 세상을 마무리할 때 내 삶을 되돌아보면서 어땠는지를 따져본다면 어떨까? 그 삶이 아름다웠노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건 제대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김 대표는 “내 주변을 살펴보면서 작은 봉사부터 지속해서 아름답게 사는 삶을 실천해보면 어떨까요?”라고 조심스레 말한다.
아무리 사회가 냉혹하고 현실이 고달파도 여전히 우리 사회가 따스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김현일 대표와 같은 분들이 계셔서 우리 사회가 여전히 밝고 아름다울 수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사회가 냉혹하고 현실이 고달파도 여전히 우리 사회가 따스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김현일 대표와 같은 분들이 계셔서 우리 사회가 여전히 밝고 아름다울 수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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