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살 훌쩍 넘었네' 사연 많은 서울의 나무들
발행일 2022.04.04. 14:40
손기정 월계관수. 서울에는 사연 있는 나무들이 많다. ©최용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음력 2월 25일을 양력으로 계산하면 4월 5일이며, 조선시대 성종이 직접 나가 밭을 간 날도 4월 5일이다. 식목일(植木日)은 이 뜻깊은 두 날을 기념하고 계절적으로도 '청명(淸明)'을 전후하여 나무 심기에 좋은 시기라는 점을 감안하여 1949년 대통령령으로 지정되었다.
곧, 4월 5일 식목일(植木日)이 다가온다. 올해는 청명(淸明)과 같은 날이니 나무를 심고 가꾸기에 더 없이 좋은 시기인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식목하는 마음은 있어도 나무를 심을 마땅한 장소가 없는 것이 서울이다. 그렇다면 이번 식목일에는 ‘식목(植木, 나무심기)'보다는 '애목(愛木, 나무를 사랑으로 가꾸기)'의 날로 보내면 어떨까? 600년 도읍지 서울 곳곳에는 특별한 이야기와 역사를 품은 소중한 나무들이 많기 때문이다. 식목일을 맞이하여 대표적인 서울의 나무 5그루를 소개한다.
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창덕궁 향나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는 도심을 벗어난 명승고적에나 있을 법 하지만 수도 서울에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천연기념물 제194호로 지정된 창덕궁의 향나무다. 향나무는 식물 중 향을 풍기는 나무로는 으뜸인데 특히 태울 때 내뿜는 진한 향이 귀신을 물리친다고 하여 일찌기 제례에 사용되어 왔다.
용트림 하듯 비상하는 모양의 천연기념물, 창덕궁 향나무 ©최용수
창덕궁 돈화문을 지나 보각(普閣)과 봉모전(奉謨殿) 사이에 용트림 하듯 춤을 추는 형상의 향나무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족히 700년 수령은 넘긴 듯 동서로 12.2m, 남북으로 7.5m 가지를 뻗은 거목이다. 2010년 태풍 ‘곤파스’의 피해를 입기 전만 해도 높이 12m의 거목이었으나 지상 4.5m지점에서 부러져 지금의 모습으로 남았다. 비록 위풍당당하던 과거의 모습은 볼 수 없으나 멋스러운 풍채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더 이상 시련 없이 창덕궁과 함께 오래오래 우리 곁을 지켜주면 좋겠다.
○ 천연기념물 지정, 높이 6m, 둘레 4.3m, 종로구 율곡로 99
○ 천연기념물 지정, 높이 6m, 둘레 4.3m, 종로구 율곡로 99
② 서울시 첫 번째 보호수가 된 '방학동 은행나무'
북한산둘레길 20구간(왕실묘역길)에는 원당샘 공원이 있다. 이곳에는 600년 전부터 주민들의 식수원이었다는 원당샘 앞쪽에 거대한 은행나무 한그루가 서있다. 서울의 최장수 나무로 알려진 수령 880년 ‘방학동 은행나무’이다. 둘레 2.5m의 굵은 줄기에서 4개의 큰 가지가 갈라져 중·상층부에서 웅대한 수형을 이루고 있다.
서울시 첫번째 보호수 '방학동 은행나무' ©최용수
이 거목에 매달린 ‘유주(乳柱)’는 '방학동 은행나무'의 존재감을 높여준다. 유주(乳柱)란 ‘젖기둥’이라는 뜻으로 모양이 마치 여인의 젖가슴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졌다. 거목(巨木)이 생존하는데 모자라는 숨을 보충하기 위해 나뭇가지에 돋아난 일종의 뿌리이다. 서울시에서는 이 나무의 수령을 감안하여 1968년 2월 26일 서울의 첫 번째 보호수로 지정(서10-1호)하였다.
○ 보호수 서10-1, 수령 880년, 수고 17m, 줄기둘레 2.5m, 도봉구 방학로 17길
○ 보호수 서10-1, 수령 880년, 수고 17m, 줄기둘레 2.5m, 도봉구 방학로 17길
③ 배려와 공존의 아이콘 '정동 회화나무'
모 작가는 회화나무를 가리켜 ‘바람도 품에 안은 장엄한 포용으로 풍성한 그늘이 내린다’고 말했다. 덕수궁 정동길 중간쯤 들어서면 묵직한 무게감의 회화나무를 만난다. 예로부터 ‘학자수’라 하여 선비의 굳은 절개와 높은 학문을 상징하던 최고의 길상목(吉祥木)이다. 회화나무라는 이름은 의외로 순우리말이다. ‘괴목(槐木)’ ‘괴화목(槐花木)’이라 불리는 중국식 ‘괴’자의 발음(huai)이 우리말로 옮겨오면서 ‘회화’가 된 것이란다.
덕수궁 뒤편 정동길에서 만나는 회화나무 ©최용수
1995년도 조선 말 손탁호텔이 있던 자리에 캐나다대사관을 지을 때 이야기이다. 한민족의 역사와 함께 해온 이곳 회화나무를 다치지 않도록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건물 디자인까지도 한 발 물러서 나무에게 양보하였고, 터를 닦는 굴착 시기도 나무의 동면주기에 맞추어 겨울에 진행했었다. 회화나무는 병충해가 적고 대기정화 능력도 탁월해 요즘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근엄한 자태를 뽐내는 것은 여느 나무도 쉬이 넘볼 수 없는 회화나무만의 매력이다.
○ 보호수 서2-3, 수령 520년, 수고 17m, 중구 덕수궁길 21-1
○ 보호수 서2-3, 수령 520년, 수고 17m, 중구 덕수궁길 21-1
④ 종친부와 다시 상봉한 '소격동 소나무'
2013년 11월, 소격동에 자리하던 국군수도병원과 기무사령부가 경기도 과천으로 옮겨가고 그 자리에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이 들어섰다. 이 때 정독도서관으로 옮겨졌던 종친부(宗親府)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종친부는 조선 역대 왕들의 어보와 어진을 보관하고, 왕과 왕의 의복을 관리하며 종실의 관혼상제 등의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옆에 있는 종친부 소나무 ©최용수
종친부 건물 옆에 우뚝한 소나무 한그루가 서있다. 높이 4.5m, 줄기 둘레 1.9m, 수령 120여 년으로 종친부 옆에 있던 소나무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개관과 함께 제자리로 돌아온 소나무는 종친부와 상봉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 보호수 서1-31, 수령120년, 수고 5m, 줄기둘레 0.6m, 종로구 삼청로 30
○ 보호수 서1-31, 수령120년, 수고 5m, 줄기둘레 0.6m, 종로구 삼청로 30
⑤ 경복궁 창건을 도운 '호압사 느티나무'
금천구 호암산 기슭에 호압사(虎壓寺)란 절이 있다. 호압사(虎壓寺)란 이름에는 재미나는 설화가 있다. 태조 이성계는 한양으로 수도를 정한 후 새 궁궐을 짓게 된다. 낮 동안 열심히 지은 궁궐은 밤이 되면 무너지곤 하여 공사에 진척이 없었다. 이에 근심으로 나날을 보내던 이성계는 어느 날 꿈을 꾼다. ‘반쪽은 호랑이로, 다른 반쪽은 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나타나 불을 뿜으며 궁궐을 망가뜨리는 꿈’이었다. 깜짝 놀란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찾았더니 ‘포효하는 호랑이 형상의 호암산 바위가 원인’이라며 “호랑이는 꼬리를 밟고 있으면 맥을 못 추니 꼬리 해당하는 곳에 절을 지으면 호랑이를 제압할 수 있다”하였다. 무학대사의 말을 듣고 창건한 사찰이 바로 ‘호압사(虎壓寺)’로, 이러한 이유에서 특이한 사찰이름을 갖게 되었단다.
호암산 기슭 호압사 약사전 앞 두 그루의 느티나무 ©최용수
이 호압사 약사전 앞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두 그루가 마주보고 있다. 사찰 창건 당시에 심었다니 500살을 족히 넘는 듯하다. 느티나무는 무늬와 색상이 좋아 예로부터 고궁이나 사찰을 만드는 고급 목재로 쓰였다. 천마총이나 가야분에서 느티나무로 제작된 관이 나왔다니 이를 증명해준다. 먹을 것이 궁하던 보릿고개 시절, 봄철 어린잎은 식용으로 허기를 달래주던 나무이다. 마을마다 1∼2그루의 느티나무는 심었으니 일명 정자나무라 불리기도 했다.
○ 보호수 서18-5~6, 수령 500년, 수고 11m, 줄기둘레 1.1m~1.3m, 금천구 호암로 278
○ 보호수 서18-5~6, 수령 500년, 수고 11m, 줄기둘레 1.1m~1.3m, 금천구 호암로 278
잠원동 뽕나무, 손기정 월계관수 등 서울의 사연 깊은 나무들
이 외에도 잠원동 뽕나무, 손기정 월계관수, 삼청동 등나무(총리공관), 재동 백송, 성균관 측백나무, 딜쿠샤 앞 권율장군 집터 은행나무 등 서울에는 사연 깊은 나무들이 많이 있다. 오래 시간 우리와 함께 한 역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나무를 생각하면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어느 순간 우리는 우리에게 녹색 빛 여유로움을 주던 나무들을 잊어 가며 살고 있습니다….” (우종영 작가의 책 <나무처럼 살고 싶다>에 대한 김수환 추기경의 추천사 중에서)
행촌동 딜쿠샤 앞 권율장군 집터 은행나무 ©최용수
한번 뿌리를 내리면 평생 자리를 떠날 수는 없어도 한마디 불평함이 없이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나무, 사람이 나무처럼 살고 싶다면 사치일까? 이제 4월 5일 식목일이다. 매년 맞이하는 식목일, 단순히 나무 심는 날로만 기억하기에는 식목의 여건이 많이 변했다. 올 식목일에는 오랜 세월 우리와 희비애락을 함께한 '서울의 사연 있는 나무'를 살피고 가꾸는 날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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