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능선' 전투 끝, 73년 만에 다시 만난 '호국의 형제'

시민기자 조시승

발행일 2023.06.07. 13:42

수정일 2023.06.07. 18:07

조회 1,694

형 김봉학 일병의 유해를 동생 김성학 일병의 유해 옆에 안장한 국립서울현충원 '호국형제의 묘' ©조시승
형 김봉학 일병의 유해를 동생 김성학 일병의 유해 옆에 안장한 국립서울현충원 '호국형제의 묘' ©조시승

6월 6일 현충일 이른 아침부터 국립서울현충원에서는 육해공 합동 군악대의 예포가 울렸다. 예포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태극기와 국방부기, 육군기, 유엔기, 성조기 등으로 구성된 기수단이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6·25 참전용사로 양구지역에서 전사한 고 김봉학 일병의 유해를 그의 아우 김성학 일병과 함께 묻는 안장식이 열린 것이다.

52묘역에서 열린 이 날 안장식은 윤석열 대통령과 정부 주요 인사, 군 주요 지휘관이 참석한 가운데 양구 월운리에서 전사한 고 김봉학 일병을 최고의 예우를 갖춰 안장했다. 형 김봉학 일병은 동생인 김성학 일병 바로 옆에 묻혔다. 국방부는 이들을 ‘호국의 형제’로 명명했다.
'호국형제의 묘' 뒷면에는 두 형제의 출생과 전사일자가 새겨져 있다. ©조시승
'호국형제의 묘' 뒷면에는 두 형제의 출생과 전사일자가 새겨져 있다. ©조시승

전사 당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가는 고 김봉학 일병 유해 발견 장소가 한 군데가 아니라 세 군데로 나뉘어 있던 정황으로 짐작할 수 있다. 유해가 나뉘어 발견되더라도 수 미터 인근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김봉학 일병의 유해는 2011년 7월 월운리 수리봉에서 머리뼈와 오른쪽 정강이뼈가 처음 발견된 이후, 나머지 부분은 인근에 없어 찾지 못하다가 2012년 11월과 2016년 10월 2·3차 발굴에서 처음 발견된 지점에서 20~70m 떨어진 곳에서 넙다리뼈 등을 찾았던 것이다.
'호국의 형제'가 대구에서 입대한 후 전투지역을 이동한 경로가 새겨진 지도와 조카가 삼촌들을 기리며 올린 글이 감동적이다. ©조시승
'호국의 형제'가 대구에서 입대한 후 전투지역을 이동한 경로가 그려진 지도와 조카가 삼촌들을 기리며 올린 글이 감동적이다. ©조시승

고 김봉학 일병은 1951년 9월 5일 전사 처리되었으므로 72년 만에 발견되었다. 6·25로 형제가 대구에서 헤어진지 73년 만이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유가족의 유전자 시료를 분석하여 확인한 결과다. 

감식단은 "발굴지점에서 유해와 함께 M1 카빈총 탄피와 수류탄 안전핀 등 유품도 함께 발견되었다. 정말 마지막 순간까지 치열하게 전투에 임하던 중 다량의 포탄에 의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당시 급박하게 일진일퇴했던 양구군 ‘피의 능선’ 전투 상황이 눈앞에 그려졌다. 
'호국의 형제'가 장렬히 전사한 전투와 유해 수습 과정이 기록된 안내간판이 52묘역 입구에 세워져 있다. ©조시승
'호국의 형제'가 전사한 전투와 유해 수습 과정이 기록된 안내간판이 52묘역 입구에 세워져 있다. ©조시승

고 김봉학 일병이 전사한 '피의 능선' 전투지역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극중 무대가 되기도 한 곳이다. 1951년 7월 휴전협상이 시작되었으나, 협상이 타결되더라도 조금이라도 유리한 결과를 얻기 위해 고지를 둘러싸고 치열한 쟁탄전이 벌어졌고, 강원도 양구군 능선 전투에서도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작전은 성공했지만, 무수한 사상자가 발생한 것을 두고 미국 종군기자가 '피의 능선(Bloody Ridge)'이라고 표현하면서 '피의 능선 전투'라 불리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김봉학 일병은 장렬하게 전사한다.
국립서울현충원 위패봉안실에 있는 영현승천상의 모습. 지하에는 무명용사 봉안실이 있다. ©조시승
국립서울현충원 위패봉안실에 있는 영현승천상의 모습. 지하에는 무명용사 봉안실이 있다. ©조시승
위패봉안실에서 간단히 차례를 올리고 있는 가족. 고 김봉학 일병도 시신 발굴 전까지 이곳에 위폐가 있었다. ©조시승
위패봉안실에서 간단히 차례를 올리고 있는 가족. 고 김봉학 일병도 시신 발굴 전까지 이곳에 위폐가 있었다. ©조시승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호국의 형제’는 이번까지 세 번째다. 첫 번째는 2011년 형 이만우 하사와 동생 이천우 이등중사로 30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두 번째는 2015년 형 강영만 하사, 동생 강영안 이등상사로 50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이번에 형 김종학 일병의 유해를 찾으며 동생 김성학 일병과 함께 안장한 것이 세 번째이다. 그동안 동생 김성학 일병의 유해는 전사 직후 수습해 1960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었고, 형 김봉학 일병의 유해는 찾지 못해 현충원 위패봉안실에 위패만 있었다.
전사자 묘역에서 유족들이 참배를 하거나 단장하고 있는 모습. 보는 사람도 경건해진다. ©조시승
전사자 묘역에서 유족들이 참배를 하거나 단장하고 있는 모습. 보는 사람도 경건해진다. ©조시승

위패봉안관에 모신 분들은 대부분 6·25 전사자로 유골이나 유해를 찾을 수 없는 분들 총 10만 4,000여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또 위패봉안관 중앙 영현승천상 아래 지하 무명용사 봉안실에는 국군이지만 식별이 불가능하여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분들의 유해가 5,871위(2021년 8월 기준)안치돼 있다. 우리의 휴전선 지역과 북녘 하늘 아래에 아직 수습하지 못한 유해가 많다고 한다. 하루빨리 신원이 확인되어 사랑하는 가족과 만나 하늘에서라도 평안히 영면하실 날이 오기를 기원한다.

6.25. 당시 국군 16만 명이 전사했지만 12만 명의 유해를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현재 12만 1,879명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날 추념식에 윤 대통령은 12만 1,879번째 배지를 달고 왔다. 12만 1,879명 전사자를 끝까지 잊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아직 찾지 못한 6.25 전사자들이 하루빨리 가족 품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조시승
아직 찾지 못한 6.25 전사자들이 하루빨리 가족 품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조시승

묘역을 거닐다 어느 묘비 앞에 새겨진 가족의 글이 심금을 울렸다. 남편의 죽음 앞에 여생 동안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겠다는 다짐을 담은 아내의 글이다. 
"당신의 뜻을 이어 훌륭히 사남매를 위해서 이 생명 다하여 보답하겠어요. 당신을 그리는 마음 이 몸이 죽어 영혼으로 변하는 그날까지 고이 잠드소서."

국립서울현충원

○ 위치 : 서울시 동작구 현충로 210
○ 교통 : 지하철 동작역 4호선 4번 출구, 9호선 8번 출구
누리집
○ 개방시간 : 06:00~18:00(현충탑 참배시간 09:00~18:00, 충혼당 참배시간 09:00~17:30)
○ 문의 : 1522-1555

시민기자 조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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