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TX도 뚫었다! 3,200톤 땅속 괴물 기계의 비밀을 파헤치다

곽재식 교수

발행일 2024.04.09. 15:52

수정일 2024.04.09. 17:26

조회 2,515

곽재식 교수의 '서울 속 숨은 과학 찾기' (6) 세종대왕의 마법검과 남산터널 뚫기
곽재식 교수의 '서울 속 숨은 과학 찾기'
날카롭고 단단한 철을 일컫는 ‘빈철’은 우리가 자주 이용하는 ‘남산터널’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날카롭고 단단한 철을 일컫는 ‘빈철’은 우리가 자주 이용하는 ‘남산터널’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고려 시대, 한국인들과 오랫동안 다툼을 벌였던 북방 민족 중에 거란족이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거란’이라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 민족의 이름치고는 특이하게 들리지 않는가? 거란이라는 말의 뜻에 대해 떠돌던 말 중에서 조선 시대 사람들 사이에 잘 알려진 설명은 거란이 ‘빈철(鑌鐵)’이라는 특별한 금속을 뜻하는 단어라는 이야기였다.

‘빈철’은 특별히 날카롭고 단단한 특수한 철을 일컫는 말이었던 것 같은데, 짐작해 보자면 아마도 거란족의 전사들이 훌륭한 칼을 잘 만들어 들고 다녔기 때문에, 혹은 그만큼 무예에 뛰어났기 때문에 그런 말이 민족 이름이 되지 않았나 싶다. 상상일 뿐이지만 먼 옛날 거란족의 영웅이 굉장히 강력한 신비로운 칼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 칼이 빈철로 되어 있었다는 전설이 생겨서 거란족이라는 말이 생긴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화여대 김세린 교수는 최근 한 논문에서 ‘몽골제국 시대에 빈철이라는 이름으로 거래된 것은 주로 중국 서쪽의 먼 외국에서 수입된 검은 빛깔의 독특한 철이었던 듯하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더 재미난 생각을 한 가지 해 볼 수 있다. 유럽에서는 중세 시대에 ‘다마스쿠스 강철’이라고 하는 아주 강력한 신비의 금속을 동쪽 나라에 가면 찾을 수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다마스쿠스 강철로 칼을 만들면 무적의 무기가 되므로, 다른 칼이 다마스쿠스 강철 칼과 부딪히면 칼날이 잘려 나간다는 따위의 상상을 중세의 기사들은 이야기했던 것 같다.

다마스쿠스 강철 전설은 특별히 신비로운 강한 금속이 있었다는 빈철 이야기와 비슷하다. 더군다나 다마스쿠스는 중동 지방에 있는 도시이니 몽골의 서쪽에 있다. 그렇다면 다마스쿠스 강철이 사실은 바로 거란족의 상징이었던 빈철은 아니었을까?

다마스쿠스 강철로 만들었다고 하는 칼은 지금도 남아 있는 물건이 있다. 마법의 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독특한 겉모양과 특별히 강한 재질 때문에 훌륭한 골동품으로 평가받곤 한다. 그러니 정말로 중세 시대, 중동 지역에는 마법의 칼까지는 아니더라도 유독 더 날카로운 철이 생산되는 지역이 있었다는 뜻이다.

존 버호벤은 현대에 남아 있는 다마스쿠스 강철의 성분을 분석해 본 결과, ‘바나듐’이라는 물질이 0.003% 정도로 아주 약간 포함되어 있었고 그 덕택에 특별히 칼이 더 날카롭고 강해졌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렇다면 우연히 바나듐이 포함된 재료를 사용해 작업을 하던 어느 중동의 장인이 신비로운 금속을 발견했고, 그것이 서쪽으로 유럽에 퍼져서 다마스쿠스 강철로 만든 마법의 검 전설이 되었고, 그것이 동쪽으로 퍼져서 거란족을 상징하는 빈철이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 봄 직하다.
어느 중동의 장인이 신비로운 금속을 발견했고,
그것이 서쪽으로 유럽에 퍼져서 다마스쿠스 강철로 만든 마법의 검 전설이 되었고,
그것이 동쪽으로 퍼져서 거란족을 상징하는 빈철이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 봄 직하다

마침 ≪조선왕조실록≫ 1430년 음력 7월 17일 기록을 보면 중국 명나라에서 조선의 세종대왕에게 선물을 보냈는데, 그게 빈철로 만든 칼이었다는 내용이 있다. 그 칼은 보석과 진주로 장식되어 있었고 금과 은으로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까지 귀하게 꾸민 칼이었다면 혹시 그 칼의 재질인 빈철이 정말로 머나먼 서쪽, 중동 지역에서 생산되어 어찌저찌 중국까지 건너 온 다마스쿠스 강철과 같은 것이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가끔 공상을 해 본다. 지금 서울의 경복궁 어느 한 켠 구석에 혼란한 역사 속에 버려지고 잊힌 보물상자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묻혀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속에서 1430년의 그 빈철 칼이 발견되고, 그 성분을 분석해 보면 정말로 조선에 선물로 온 빈철과 다마스쿠스 강철이 같은 것이었는지, 다른 것인지, 정말로 어떤 재질이었길래 그렇게 강하다는 소문이 났는지, 참으로 오래간만에 확실히 밝혀낼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이 모든 이야기들이 별 쓸데없는 무의미한 옛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신비의 검에 대한 이야기가 요즘 우리 삶과 무슨 큰 관련이 있겠는가? 혹시 그나마 약간 관련이 있는 대목이 있기는 있을까?

나는 남산터널이 바로 신비의 금속, 빈철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 보고 싶다.

터널을 뚫는 공사는 힘든 작업이다. 한국의 수도권 지역처럼 조금만 땅을 파고 내려가면 단단한 화강암 바위 덩어리가 나타나는 곳이라면 돌을 깨부수면서 구멍을 뚫어야 하니 터널 공사는 더욱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강바닥처럼 너무 물렁한 흙과 모래 더미가 있는 곳이라면 공사를 하다가 갑자기 약한 천장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 그렇기에 그런 지역은 그것대로 또 문제다. 때문에 터널 공사를 할 때 예전에는 곡괭이와 삽을 들고 조금씩 파나가는 방법을 사용해야 했고, 어느 정도 기술이 발전한 뒤에는 콘크리트를 발라가면서 다이너마이트 같은 폭약으로 바위 덩어리를 조금씩 폭파해가며 구멍을 뚫는 방법을 사용했다. 근래에 자주 사용하는 폭파를 이용한 터널 공사 방식은 오스트리아식 굴 뚫기 신공법(New Austrian Tunneling Method)이라고 하는 것인데 약자로 NATM이라고 부르고 업계에서는 그냥 ‘나틈’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NATM이라고 해도 조금씩 폭파를 해 가면서 구멍을 뚫는다는 게 생각처럼 부드럽게 진행되기란 어렵다. 가끔은 소음이나 진동이 문제가 될 때도 있다. 그래서 1980년대 이후로 또 다른 공사 방법이 퍼져나가고 있다. 그것은 거대한 드릴처럼 생긴 굴파는 기계를 땅 속에 집어넣어 한번에 돌을 착착 깎아 내면서 구멍을 뚫는 방법이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옛날옛날에 ‘배좀벌레조개’라고 부르는, 배의 나무판에 구멍을 뚫고 들어가는 벌레 같이 생긴 동물을 보고 처음 유럽의 어느 기술자가 그 원리를 떠올렸다고 한다. 이런 공사 방식에 사용하는 기계를 흔히 TBM이라고 한다. 굴에 구멍 뚫는 기계(Tunnel Boring Machine)라는 말의 약자다. 첨단 장비의 이름치고는 좀 싱거운 이름이다.
수도권 제2순환 고속도로 김포-파주 구간 중 한강 아래를 횡단하는 터널공사에 국내 최대규모의 TBM이 도입됐다.
수도권 제2순환 고속도로 김포-파주 구간 중 한강 아래를 횡단하는 터널공사에 국내 최대규모의 TBM이 도입됐다.

그러나 현대의 대형 TBM은 결코 싱거운 기계가 아니다. 오히려 거대한 땅속의 괴물에 가깝다. 현재 수도권 제2순환 고속도로 김포-파주 구간 중 한강횡단 터널 공사에 사용되고 있는 대형 TBM을 예로 들면, 땅속을 기어가며 고속도로가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터널을 파야하기 때문에 크기부터가 굉장히 크다. 지름이 14미터이고 길이는 125미터에 달하며, 무게는 무려 3,200톤이다. 4~5층 건물 만한 커다란 기계가 땅속을 파고들며 돌을 깎아 내면, 깎아 낸 돌가루는 그대로 기계 속으로 들어가 자동으로 운반되어 멀리 기계 바깥으로 나가게 되어 있다. 그러면서 조금씩 터널을 파나갈 때마다 자동으로 벽면 공사까지 처리한다.

괴물이라는 비유가 전혀 과장이 아닌 것이, 1967년에 나온 영화 ≪대괴수 용가리≫에서 서울 시내를 부수고 다니는 괴물 용가리의 크기는 시청 구청사 건물보다 조금 큰 50m 내외로 보인다. 비교해 보자면 대형 TBM은 용가리보다도 몇 배나 더 크다. 그만한 기계가 땅을 파고 몇 킬로미터, 몇십 킬로미터씩을 꿈틀거리며 움직이면서 큰 공사를 해낸다. 공사 작업을 하기 위해 사람이 TBM 속에 들어가 땅속에서 한참 작업을 하고 있으면, 거대한 우주선을 타고 알 수 없는 머나먼 행성을 탐험하는 것 같은 느낌이 나지 않을까?

이런 거대한 기계의 맨 앞에는 바위를 깎아 내는 칼날이 붙어 있다. 이런 칼날은 아주 튼튼하고 강하게 만들어야만 한다. 지구상의 어떤 맹수 이빨보다도 날카로운 재질이어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런 칼날을 만들기 위해 강철에 바나듐 같은 여러 원소를 조금씩 섞어서 ‘공구강’이라고 하는 특별한 합금 금속을 만들어 낸다.
거대한 땅속의 괴물 같은 ‘TBM’ 기계의 맨 앞에는 바위를 깎아 내는 칼날이 붙어 있다.
거대한 땅속의 괴물 같은 ‘TBM’ 기계의 맨 앞에는 바위를 깎아 내는 칼날이 붙어 있다.

세종대왕이 갖고 있었던 빈철 칼과 재질이 똑같지는 않겠지만, 다마스쿠스 강철을 만들 때 바나듐을 조금 섞어서 철을 강하게 만든 원리를 사용하고 있는 재료라고 볼 수 있다. 현대의 화학은 마법이나 전설에 기대지 않고, 정밀하게 성분 함량을 조절해서 원하는 만큼 단단한 칼날을 만들 수 있다. 바로 그런 기술이 있기에 오늘도 거대한 TBM이 무사히 공사를 해낼 수 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TBM을 사용한 사례는 1989년 착공한 남산1호터널 확장 공사였다고 한다. 지금도 서울 중구에서 용산구로 이동하는 차량들이 매일 같이 이용하고 있는 아주 친숙한 터널이다. 그러니 터널을 지날 때 그 땅속 안쪽 면을 깎아 낸 것이 한때는 신비의 금속이라고 불렀던 빈철과 비슷한 칼날이었다고 생각해 봐도 좋겠다. 이후 여러 공사에 TBM을 사용해 작업하는 사례는 갈수록 늘어 나서, 최근 개통된 GTX 공사에서도 TBM은 큰 역할을 했다. GTX는 땅속 40미터가 넘는 깊이에서 열차가 고속으로 달릴 수 있는 큰 굴을 길게 뚫어야 하므로 TBM 같은 자동 장비를 사용하면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아직까지 한국과 서울의 TBM 제작 기술이 세계에서 인기가 높다고 할 수준은 아니라는 점이다. 처음 TBM 사업을 크게 성공시킨 독일산 TBM이 보통 세계 최강으로 손꼽히며, 그 뒤로는 많은 건설 사업 경험을 통해 빠른 속도로 TBM 기술을 발전시킨 중국 업체들이 활발히 활동하는 편이다. 그 밖에는 기계 기술 강국인 미국, 일본 회사들도 경쟁에 뒤따르고 있다. 그에 비하면 한국은 아직까지 기술 교류를 통해 TBM 제작을 해나가면서 중소형 TBM을 제작하는 정도다. 거대한 덩치를 갖고 무서운 속도로 공사 현장의 바위를 먹어 치우며 기어 다니는 TBM 강국에서 만든 초대형 TBM과는 격차가 있어 보인다.

그렇지만 한국은 철강 산업이 발달해 있어서 강한 금속을 만들어 내는 기술도 발달해 있는 편이고, 승용차에서 유조선까지 커다란 기계를 만드는 사업도 잘해 내는 편이다. 건설 사업 역시 세계 각지에서 활발히 진행해 본 경험이 있는 만큼, TBM 사업에 대해서도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 산업계, 학계에서도 2010년대 이후로 TBM 기술 개발이 자주 시도되고 있다. 멀지 않은 미래에는 더 훌륭한 기술로 완성된 더 강력한 TBM들이 지하를 돌아다니면서, 다마스쿠스 강철과 빈철의 힘을 마음껏 발휘하여 우리의 도시를 더 편리하고 더 안전하게 만드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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