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종군의 길을 떠난 이순신 장군, 출발지는 어디?
발행일 2024.03.21. 10:39
“하늘이 캄캄했다!”
1597년 4월 1일 의금부에서 풀려나 백의종군의 길을 떠난 이순신 장군. 그리운 어머니가 계신 아산으로 가던 중 부고를 듣고 쓴『난중일기』의 한 대목이다. 짧지만 절절한 그리움과 사랑을 표현한 촌철살인(寸鐵殺人)의 글이다.
1597년 4월 1일 의금부에서 풀려나 백의종군의 길을 떠난 이순신 장군. 그리운 어머니가 계신 아산으로 가던 중 부고를 듣고 쓴『난중일기』의 한 대목이다. 짧지만 절절한 그리움과 사랑을 표현한 촌철살인(寸鐵殺人)의 글이다.
광화문광장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최용수
서울 대중교통의 새 역사를 쓴 지하철 1호선, 나도 상당 기간 종각역을 이용하여 출퇴근하였다. 당시는 출퇴근 시간에 쫓겨 역 주변을 자세히 살펴볼 여유가 없었는데, 주말 나들이로 찾게 된 종각역 일대가 하나의 ‘야외 박물관’이 되어 있어 놀랐다. 옛 역사문화 이야기, 실내 박물관에서만 보지 말자. 걸음을 멈추고 종각역 1번 출구 일대의 다양한 유적을 둘러보자.
비둘기 보금자리가 된 종각역 1번 출구 일대 모습 Ⓒ최용수
① 죽음보다 고통스러웠던 640km ‘충무공의 백의종군로’ 출발지
종각역 1번 출구를 나오면 먼저 눈에 띄는 곳에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 출발지’ 표지판이 있다. 427년 전인 1597년 4월 1일, 선조의 명으로 이순신 장군은 의금부에서 출옥하여 백의종군의 길을 떠난다. 출발지가 바로 종각역 1번 출구 밖이란 설명이다. 이곳 한양(서울)을 출발하여 초계(합천)까지의 행로와 동년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기 전까지 120일 동안 걸었던 길을 말한다.
왜군의 반간계로 삼도수군통제사직에서 해임되어 한성으로 압송, 투옥, 문초가 이어졌고 죽음에 이르기 직전에야 “백의종군(白衣從軍)하라”는 선조의 명을 받고 다시 전장을 향해 떠난다. 종각역 의금부를 출발하여 남태령~수원~아산~하동을 지나 합천 초계의 도원수진에 이르는 640km의 길이다. 어머니 임종마저 지키지 못하고 걸었던 죽음보다 고통스런 행로였다.
왜군의 반간계로 삼도수군통제사직에서 해임되어 한성으로 압송, 투옥, 문초가 이어졌고 죽음에 이르기 직전에야 “백의종군(白衣從軍)하라”는 선조의 명을 받고 다시 전장을 향해 떠난다. 종각역 의금부를 출발하여 남태령~수원~아산~하동을 지나 합천 초계의 도원수진에 이르는 640km의 길이다. 어머니 임종마저 지키지 못하고 걸었던 죽음보다 고통스런 행로였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로 출발지 안내판, 종각역 1번 출구 밖에 있다. Ⓒ최용수
하지만 장군은 슬픔과 절망의 길에서도 결코 주저앉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생의 큰 위기 속에서도 묵묵히 자기 길을 걸었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명량에서, 노량에서 또다시 나라를 구한 장군의 길은 ‘백의종군로’로 환생했다.
“백의종군로를 걷다 보면 제 인생의 답을 찾을 수 있는 특별한 여정이 될 것 같아요.” 표지판을 둘러보던 한 시민은 “내년도 버킷 리스트로 백의종군로 완주를 정했다.”라고 말했다.
“백의종군로를 걷다 보면 제 인생의 답을 찾을 수 있는 특별한 여정이 될 것 같아요.” 표지판을 둘러보던 한 시민은 “내년도 버킷 리스트로 백의종군로 완주를 정했다.”라고 말했다.
조선의 경제 중심시 한양 육조거리 유구 Ⓒ최용수
② 조선 시대 왕명을 받아 죄인들을 추국하던 ‘의금부(義禁府)’ 터
‘선조신록 1597년 2월 4일’에 의하면 사헌부가 “이순신을 잡아 들어 죄를 물어야 한다”고 아뢴다. 선조는 이틀 후인 2월 6일에 이순신을 잡아 오도록 전교를 내린다. 2월 26일 한산도에서 한성으로 압송된 이순신 장군은 3월 4일 의금부에 갇힌다. 조선의 관리와 양반, 윤리에 관한 범죄를 담당한 의금부(義禁府)에서 장군은 갖은 문초와 옥고를 치른다.
종각역 1번 출구 밖에서 만나는 의금부 터 입간판 Ⓒ최용수
당시 의금부는 수많은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을 국문(鞫問)한 곳이다. 신유년(1801)에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와 평신도 지도자 최창현, 정약종 등이 신앙을 증거하였다. 또한 기해년(1839)에는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등이, 병인년(1866)에는 베르뇌 주교, 남종삼 등도 이곳에서 사형 선고를 받는 등 의금부가 있던 자리는 한국 천주교 순교와 신앙 증거의 터이기도 하다.
의금부 터는 한국 천주교 순교의 터이자 신앙 증거의 터이다. Ⓒ최용수
③ 조선의 폼페이 ‘운종가 시전행랑’ 유구
‘사람과 물화가 구름처럼 몰려드는 거리.’ 조선 시대 수많은 점포가 즐비하게 들어섰던 운종가(雲從街)를 일컫는 말이다. 이웃한 육조거리가 조선의 정치 1번지라면 운종가는 경제중심지이다. 조선 600년의 모습이 지하(현 지표 아래 4~6m 깊이)에 문화층별로 켜켜이 보존돼 있어 ‘조선의 폼페이’ 같다. 당시의 건물지, 우물, 도로 등 유구(遺構, 옛 건물의 흔적)를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조선 시대 운종가와 600년 역사를 만날 수 있다니 종각역 주변이 살아 숨 쉬는 것 같다.
조선 시대 한양의 중심 운종가 안내 표지석 Ⓒ최용수
④ 오직 사람만을 위한 길 ‘피맛골’ 이야기
피맛골은 이곳 종각역과 종로3가역 사이 종로의 남북에 형성된 뒤편 길이다. 조선 시대 종로는 궁궐과 관가가 가깝게 있어 가마나 말을 탄 고관대작의 왕래가 잦은 큰길이었다. 하급 관료나 서민들은 고관대작을 만나면 길가에 엎드려 예의를 표해야 했다. 이런 일이 빈번해지자 번거로움을 느낀 서민들은 아예 큰길 뒤편의 좁은 골목을 이용하게 되었다.
종각역에서 종로3가역에 이르는 종로 뒷골목으로 피맛골이 이어진다. Ⓒ최용수
피맛골이란 이름도 ‘높은 사람들의 말을 피하다(피마,避馬)’는 뜻에서 유래했다. 1412년(태종 12) 시전행랑(市廛行廊)을 조성하면서 만들었다고 한다. 초기 피맛골의 너비는 약 6m 정도로 육의전 장랑의 뒷물길로 조성되었다. 그러나 17세가 이후 차츰 물길이 메워지고 앞뒤 집들이 확장되면서 점점 좁아져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피맛골이 되었다는 표지판의 설명이다. 피맛골을 따라 목로주점, 장국밥집 등 들어서면서 서민들에게 사랑받는 장소가 되었고, 지금도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⑤ 한양의 일상을 지배한 ‘종루 보신각’
종각역 일대는 조선 시대 수도인 한양(서울)의 중심부였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도성민의 일상생활은 종각(鐘閣)이 통제했다. 새벽에는 파루(罷漏, 통행금지를 해제하기 위하여 33번 종각의 종을 치던 일)를 치고, 밤에는 인정(人定, 조선 시대 밤에 통행을 금지하기 위하여 28번 종을 치던 일)을 쳐서 백성들의 일상은 물론 한양도성 8개 성문을 여닫게 했다. 수차례 전란으로 종루(鐘樓)의 소실과 복원이 반복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보신각(普信閣)'이란 현액이 종루에 내걸린 이후부터 '보신각'이라는 새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6.25 전쟁 때 파손된 보신각은 1953년에 중건되었고, 1980년 종루를 2층으로 재단장하여 오늘에 이른다.
한양의 일상생활을 지배한 종루 보신각 모습, 1번 출구 대각선 방향에 있다. Ⓒ최용수
수도 서울의 심장, 광화문광장에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존경 받는 두 분의 동상이 서 있다.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동상이다. 하지만 매년 4월이 되면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더 크게 보인다. 아마도 장군이 640km 백의종군 길을 떠난 날이 4월 1일이고, 장군의 탄생일이 28일인 까닭 아닌가 싶다.
광화문광장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과 측우기 모형 Ⓒ최용수
이제 완연한 봄이다. 바쁜 일상으로 멀리 나들이를 계획하기 어렵다면 지하철을 타고 종각역으로의 여행을 권하고 싶다. 백의종군을 떠난 이순신 장군이 되어보고, 피맛골 노포(老鋪) 식당에서 장국밥 한 그릇이면 ‘소확행’은 넉넉하지 않을까! 4월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는 달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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