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45g 종이 한 장으로 만들었다고? '그레이프랩' 인터뷰

발행일 2021.05.27. 15:00

수정일 2021.05.27. 15:30

책을 비롯한 휴대용 멀티스탠드 'g스탠드' 라인 ⓒ그레이프랩

기업은 수익을 얻기 위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버려지는 물건도 넘쳐난다. 특히 기업이 경제적 이익에만 너무 몰두하다 보니 자연 파괴는 물론 쓰레기 문제로 우리 삶은 몸살을 앓고 있다. 우리가 배출하는 다양한 쓰레기가 있지만 종이는 더욱 특별하다. 종이를 얻기 위해 나무를 베어야 하고 이를 가공하기 위해 물과 에너지가 소비된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서는 순수 친환경 사회적기업이 있다. 45g 재생종이 한 장으로 노트북 거치대는 물론, 수첩, 다이어리 등 새로운 창작물을 만드는 그레이프랩의 김민양 대표를 만나서 그가 꿈꾸는 세상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재생종이와 접지기법을 통해 새로운 창작물을 만드는 그레이프랩 김민양 대표 ⓒ김재형

디자인으로 지속가능한 삶을 꿈꾸다

그레이프랩이 위치해 있는 동작구 노량진로의 '스페이스 살림'에 도착해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름 널찍한 공간이지만 디자인을 위한 여러 대의 컴퓨터, 수작업공간, 프레스기계, 다양한 소재와 샘플 등이 빼곡히 공간을 차지했다. 그레이프랩은 어떤 회사일까? 김민양 대표는 "환경과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데 이를 디자인적인 관점에서 풀어나가는 디자인 스튜디오"라고 답했다. 그레이프랩이라는 회사명이 다소 특이한데 그가 영국 유학시절 때 경험이 투영된 것이다.

"대기업들이 경영효율화를 위해 제3 국가에 공장을 세웁니다. 그러면 지역의 수공예 장인들이 할 일을 잃고 대다수가 공장으로 직장을 옮기는 현상을 목격했습니다. 지속가능한 사회를 추구하는 관점에서는 사회가 무너질 것 같다는 우려감이 들었죠. 저는 2013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지속가능한 디자인 공부를 했습니다. 예를 들어 포도송이는 하나만 독식하거나 더 커지는 형태가 아닙니다. 작은 포도 알맹이들이 연결돼 하나의 송이를 만들고 옆으로 몸짓을 불립니다. 포도송이에 영감을 받아 현대 사회도 건강한 조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같은 내용으로 영국에서 더 번치 오프 그레이프스(The Bunch of Grapes)라는 논문을 썼고 한국으로 돌아와 이를 구체화시켰다. 우리 사회의 구조가 피라미드처럼 되고 있는데 작은 회사들이 대기업으로 편입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내비쳤다.

친환경 종이로 만든 향기 나는 플라워박스 ⓒ그레이프랩

재생종이의 미학

김 대표는 "우리나라의 경우 종이의 재활용을 정말 잘하는 편이다. 다만 창조적인 고부가가치의 작업을 하기에는 종이의 질이 떨어지는 게 현실이다. 어쩔 수 없이 그레이프랩에서는 일반 종이보다 비싼 재생지를 수입해서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재생지의 질을 높일 수 있지만 아직까지 수요가 없다 보니 시장형성이 안되고 있다"고 말했다. 더불어 "재생지는 어떻게 가공하느냐에 따라 일반 종이보다 훨씬 좋은 품질을 얻을 수 있다. 자연보호와 함께 소비자들이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힘줘 말했다.

환경을 보호할 수 있는 재생지는 시장만 형성되면 일반 종이 생산 단가보다 내려갈 수 있다. 때문에 사회에서도 재생지 시장이 확대될 수 있도록 관심을 갖고 노력하는 게 필요하다고 김 대표는 역설했다.

재생종이로 제작한 그레이프랩의 대표적인 작품은 ▲노트북을 거치할 수 있는 'g플로우', ▲책을 비롯한 휴대용 멀티스탠드 'g스탠드', ▲월별 일정을 적을 수 있는 'g플래너' 등이다. 특히 이날 김민양 대표는 친환경 종이로 향기 나는 플라워 박스를 소개할 때 눈빛이 반짝였다. 종이 상자에서 고급스러운 감성이 느껴졌다. 그가 상자를 열자 달달한 향기와 함께 종이꽃이 피어올랐다. 상자 내부에는 그레이프랩에서 제작한 제품들이 정갈하게 들어가도록 제작했다. 이 밖에도 태양광 LED로 제작한 무드등은 마치 마법영화에서 봤던 신비한 디자인이다.

노트북 등을 거치할 수 있는 'g플로우' 라인 ⓒ그레이프랩

독특한 모양의 종이가 부피를 줄였다가 늘리는 과정이 신기해 꼼꼼히 살펴보니 자동화하기에 힘들 것 같다. 이에 대해 그는 "종이에 입혀지는 인쇄는 기계로 하지만 제품을 접는 건 모두 사람이 직접 손으로 한다. 손으로 만들기 때문에 적정량을 생산할 수 있고 제품이 인기를 얻으면 그만큼 고용을 늘려나갈 수 있는 구조다. 또한 우리 제품이 섬세한 구조로 돼 있어 공장에서 일률적으로 찍어 낼 수 없는 것도 수작업을 고집하게 된 배경이다"라고 답했다.

회사 한쪽 벽면을 차지한 독특한 모양의 기계가 눈에 띈다. 완성된 작품을 케이스에 넣기 위해서 압착하는 프레스기계이다. 친환경 회사에 걸맞게 전기를 사용하지 않고 손잡이를 돌려서 압착시키는 수동방식의 프레스기를 사용하고 있어 다시 한 번 놀랐다. 또한 생산하는 제품은 화학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종이를 접는 방식이다. 친환경적으로 제품을 만들고 있는 그레이프랩은 'SK 사회성과 인센티브' 프로그램을 통해 기여도를 인정받았다. 100% 재생용지를 사용하는 노트북 거치대가 플라스틱 제품에 비해 이산화탄소가 99% 줄어들고 물 사용량도 90% 이상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공로로 인센티브도 받을 수 있었다.

'환경·디자인·실용성' 세마리 토끼 잡아

종이로 제작한 스탠드가 어떻게 노트북과 책 등의 무게를 견뎌낼 수 있는지 묻자 김 대표는 "당연히 평면 종이는 힘이 없어서 버티지 못한다. 하지만 종이를 접기 시작하면 힘을 지지하는 축이 생기고 이런 축들이 5kg 이상의 무게를 견디게 한다"고 말했다. 과거 영국 유학시절 친환경 패키지 수업 중 심각한 쓰레기를 유발하는 샌드위치 박스를 친환경적으로 제작했던 경험을 살린 것이다. 그가 개발한 접지기법은 글로벌 디자인특허 등록을 완료했고 해외에서도 호응을 얻고 있다.

거치대는 손쉽게 압축시킨 후 케이스에 넣을 수 있다. 휴대성이 돋보인다. ⓒ그레이프랩

특히 지난 4월,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 중 하나인 독일 'iF 디자인 어워드'에서 친환경 거치대 '지플로우&미니스탠드' 제품으로 디자인 부문 본상을 수상했다. 당시의 기분은 어땠는지 궁금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디자인상을 받게 돼서 정말 기뻤다. 환경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한 제품이 품질면에서 다소 부족할 수 있다는 우려를 깨고 수상을 했기 때문에 의미가 배가 됐다. 앞으로도 다양한 소재개발과 제품생산에 주력하겠다”고 말했다.

실제 김민양 대표는 채석장의 버려진 돌가루를 소재에 활용하고 있다. 돌종이로 만든 지플로우는 기존 제품보다 방수성과 내구성이 훨씬 뛰어나다. 해외 작가와도 협업을 통해 디자인에도 공을 들였다. 이 제품은 지난해 해외 펀딩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고, 조만간 국내펀딩을 통해 만날 수 있다. 또 작년에는 생수 병뚜껑을 녹여서 수첩커버를 만들기도 했다. 현재는 폐비닐로 만들 수 있는 작품을 고심 중이다. 소재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에 재사용할 수 있는 재료를 계속 찾고 있다.

해외 작가인 'Ivo Zibulla'가 그린 'Rainbow Heart'를 설명하고 있는 김민양 대표 ⓒ김재형

발달장애인 고용해 사회문제 해소에 기여

무엇보다 그레이프랩은 사회적기업을 추구하면서 발달장애인들을 고용해 이목을 끌고 있다. 김민양 대표는 "소외된 계층이 어떻게 하면 주류로 들어올 수 있을까? 항상 고심했다. 발달장애인분들이 계시는 복지관을 무작정 찾아가서 이들과 예술활동을 2년간 함께 했다. 인생의 전환점이 됐는데 발달장애인들과 같이 지내면서 이분들이 가진 새로운 시각을 발견하게 됐다. 전문적인 미술교육은 받지 않았지만 그림을 그릴 때 순수한 색감과 형태가 나오는 것을 보면 너무 참신하고 좋았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장애인들이 사회생활을 하지 않으면 계속 고립될 수밖에 없어 그는 이들과 함께 일을 시작했다. 다행히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자금이 생각보다 많이 모였고, 이를 통해 발달장애인 고용도 늘릴 수 있었다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김 대표는 "발달장애인들이 회사에 출근하면 처음에는 낯설어 사람을 피하기도 한다. 또한 일부는 관심을 받기 위해서 일부러 사고를 치기도 한다. 그간 외부와 격리된 생활을 했기 때문인데 사회성을 조금씩 기르다 보면 이들의 행동에 자신감이 붙는 게 눈에 보인다. 본인의 능력으로 당당하게 일을 하고 사회구성원으로 활동하다 보면 목소리도 커지고 새로운 사람을 봐도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고 전했다.

그레이브랩에서 직원들이 접지작업을 하고 있다.ⓒ김재형

그는 사회생활을 통해 긍정적으로 변해가는 발달장애인들을 보며 가장 좋아하는 건 그들의 가족이라고 전했다. 상품 제작은 8명의 발달장애인으로 구성된 제작팀이 맡고 종이를 접는 일을 맡는 파트도 있다. 파트너로 근무하는 장애인 아티스트는 제품에 삽입하는 그림을 그린다. 이날 장애인이 직접 그려 상품화된 거치대를 보여줬는데 파란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의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김 대표는 "이런 감동은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값진 경험이다. 물론 회사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장애인을 고용하는데 부담도 컸지만 사회구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제는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라고 말했다. 다만 그는 "기업이 장애인 고용을 더욱 확대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지원도 필요하다. 기업 입장에서 장애인을 시작부터 정규직으로 채용하기에는 부담이 있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장애인 역시 본인이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을지 두려움이 크다. 때문에 3~4개월 인턴 기간 동안 임금 등을 정부가 지원해 주면 기업과 장애인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설명했다.

사회를 이롭게 변화시키는 디자이너

해외 진출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당분간 중단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다행이 그레이프랩의 제품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기업들의 주문이 늘고 있다. 현재는 네이버 스토어를 통한 판매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편집숍 등에서 그레이프랩 제품을 판매 중이다.

또한 그레이프랩은 5월 30일~31일 서울에서 열리는 '2021 P4G 서울 정상회의(2021 서울 녹색미래 정상회의)'를 위한 한정판 거치대(g플로우, g스탠드)를 제작·출시했다. P4G 서울 정상회의는 기후변화 대응과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국제 다자간 회의로,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첫 환경분야 다자 정상회의다. 그레이프랩의 P4G 정상회의 한정판 제품은 기념 전시가 열리는 대림미술관 아트샵에서 구매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어떤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지 물었다. 그는 "예전에는 좋은 디자인, 멋진 제품을 만드는 게 최고인 줄 알았다. 하지만 디자이너의 역할과 책임감에 대해서 이제는 더 비중을 두고 있다. 디자이너는 제품형태와 재질을 결정한다. 제품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고 자원을 아낄 수 있는지 디자이너의 판단에 좌우되는 것이다. 앞으로 좋은 라이프 스타일을 설계하고 사회를 이롭게 변화시키는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