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례방, 명치정, 그리고 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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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9.11.12. 00:00

수정일 2009.11.12. 00:00

조회 4,266



시민기자 송유미


현대와 전통이 어울린 명동 거리

모처럼 들른 명동 거리. 벌써 연말 분위기가 난다. 바람은 싸늘하게 불지만, 바삐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 움직임이 활기 차 보인다. 작가 이효석이 <호텔부근>에서 '거리란 방 속의 세상은 따로 젖혀 두고 다 같이 잠시 동안 모여들어 뛰고 춤추고 흥분하고 장식하고 꿈을 주고 받고 하는 가짜의 회장과 같은 곳이다'라고 말했듯이, 정말 명동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뛰고 춤추고 흥분하고 장식하고 꿈을 주고 받고 하는 공간임이 틀림없다.

오늘날 명동은 현대와 전통이 함께 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천천히 추억의 속도로 걷게 되는 거리이기도 하다. 몇 년 만에 느긋하게 걸어보는 만추의 명동 거리인가. 누군가의 팔짱을 끼고 걷던 청춘의 계절을 더듬어 걷노라니, 심장의 고동이 쿵쿵 뛴다.

명동거리는 명동 1·2가, 정동 1가, 충무로 1·2가, 남산동 1·2·3가와 예장동의 일부 지역이 포함된다. 명동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한성부의 행정구역 중의 하나인 명례방(明禮坊)의 명(明)자를 따서 지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명치정(明治町)으로 불리다가 해방 후 1946년에 밝은 마을, 밝은 고을이란 뜻에서 명동(明洞)이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명동은 주택지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충무로 1·2가를 상업지구로 개발하면서 그 인접지역인 명동도 점차 상업지구로 발전했다. 충무로는 당시 진고개로 불리던 일본인의 거리였다. 비가 오면 하수도 시설이 좋지 않아서, 마누라 없이는 살 수 있어도 장화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상전벽해가 된 충무로다. 이 충무로란 지명에도 우리 역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하겠다.

1885년부터 서울에는 영국인, 중국인, 일본인 등 외국인이 들어와서 많이 살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외국인 거주를 궁궐에서는 인정해야 했다. 임진왜란 때 명장인 이순신의 휘호를 따서 충무로가 생기고,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을 딴 을지로가 생겼다. 을지로는 당시 청국인 거리였다. 그 무렵 을지로나 충무로 거리는 매우 낙후된 거리였다고 한다.

그 당시 충무로는 집을 지으면 북향이 된다고 해서, 풍수상 살기 나쁜 곳이라는 인식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남산골 샌님은 이렇게 해서 생긴 말이라고 한다. 1907년 이후 일본인들이 점점 도시를 개조하면서 일본인이 살던 충무로엔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 중심상권으로 신세계, 한국은행, 일본영사관, 일본우체국, 제일은행지점들이 들어서면서 지금과 같은 중심권으로 바뀌었다.

명동성당은 왜 언덕에 서 있나

명동을 대표하는 상징 건물은 누가 뭐래도 명동성당이다. 이 명동성당 건축에는 웃지 못할 우리나라 역사의 비극이 깃들어 있다. 명동성당은 코스트 신부가 설계하였고, 파리선교회의 재정지원을 얻어 건립되었다. 본래 순교자 김범우의 집이 있던 곳으로, 블랑 주교가 김가밀로라는 한국인 명의로 사들였고 1887년 한국과 프랑스 사이에 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1898년에야 완성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임금이 사는 궁궐보다 높은 위치에 집이나 건물을 지을 수 없었던 당시에 명동성당만은 궁궐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지어졌다는 사실이다. 많은 궁궐의 반대에도 명동성당은 건립된 것이다. 이는 지엄하고 존귀한 조선 왕조의 권력이 점점 외부 세력에 의해 스러져가는 것을 반증한다. 당시 명동성당 건축은 도심 건축 양식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명동의 면적은 0.44㎢, 인구는 3208명, 인구밀도는 7291명/㎢이지만, 실제로는 하루 100만 명이 넘는 인구가 드나든다고 한다. 명동에는 명동성당을 위시하여 서울 중앙우체국,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 한국본부, 중국대사관 등의 주요기관들이 들어서 있어, 아직도 명동은 서울의 심장부라고 말할 수 있겠다.

회상하건대 80년대만 해도 명동의 거리는 가만히 서 있어도 그냥 인파에 의해 떠밀려갔던 거리였다. 그 옛날의 웅성거리던 사람의 물결은 없는 것 같아 개인적으로는 쓸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아직도 인파는 붐비고 있었다. 압구정동이 서울의 패션 중심지가 되면서 한때 명동은 인기가 점점 식어갔지만, 그래도 명동은 대한민국 유행의 첨단지역이었다. 많은 금융기관이 여의도로 이전해갔지만, 휴일도 아닌데 명동엔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역시 명동은 서울에서 가장 젊은 거리이자 가장 역사가 깊은 거리다. 그래서 가장 서울다운 거리다. 해는 늬엿늬엿 지고 불빛이 많아지는 명동 거리. 어디선가 불쑥 중절모 쓴 진고개 신사가 나타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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