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날로 스며드는 이야기…역사 따라 옛 도서관 길을 걷다

시민기자 방윤희

발행일 2022.12.09. 10:50

수정일 2022.12.09. 16:03

조회 1,688

문화 곁에 쉴 수 있는 책 읽는 서울광장
문화 곁에 쉴 수 있는 책 읽는 서울광장 Ⓒ방윤희

서울도서관 개관 10주년을 맞아, 해설사와 함께 서울의 옛 도서관 역사를 따라 역사인문기행에 올랐다. 짙어져 가는 가을 풍경을 배경으로 한국 근대 도서관의 역사를 만나보자.  

길 위의 도서관 여행을 하기 위해 이번 답사의 출발지인 서울도서관 정문 앞에 모였다. 기자가 방문 했을 당시 하반기 책 읽는 서울광장 운영으로 푸르른 광장을 책과 사람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책 읽는 서울광장’은 4월 23일 ‘세계 책의 날’을 맞아 개최를 알렸다.

이후 혹서기를 제외한 지난 11월 13일까지 서울을 대표하는 독서 행사로 자리 잡으며,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열린 도서관’으로 변하는 서울광장에서 독서와 휴식을 즐길 수 있었다.  
책 읽는 서울광장에서 독서와 휴식을 함께 즐길 수 있다.
책 읽는 서울광장에서 독서와 휴식을 함께 즐길 수 있다. Ⓒ방윤희

도심 속 잔디밭에 누워 책을 읽는 이색적인 풍경을 뒤고 하고, 본격적인 답사길에 올랐다. 서울의 대표도서관인 서울도서관은 서울특별시청(옛 경성부청사) 건물을 리모델링 하여 만든 곳으로, 광복 후에는 서울특별시 청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도서관은 좌우 대칭적인 정면성과 입면과 평면의 3분할 구성 등 르네상스 양식의 기본 틀을 갖추면서도 대지 형태에 맞춘 합리적인 배치, 개방형 사무공간, 장식성을 배제한 수수한 외관 등 역사주의 건축 양식에서 근대주의 건축으로 이행되는 과도기적 성격을 보여준다.

인구의 폭발적 증가와 시정의 확대로 수차례 증축과 개수와 보수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행정 수요의 변화에 대응하고, 세계 도시로서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서울도서관 뒤편에 새로운 청사를 짓게 되었다.
서울광장 앞에서 바라본 개관 10주년을 맞은 서울도서관
서울광장 앞에서 바라본 개관 10주년을 맞은 서울도서관 Ⓒ방윤희

서울도서관을 지나 환구단으로 향했다. 환구단(圜丘壇)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 공간이다. 환구단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황단 또는 원구단, 원단이라고도 한다. 이 자리에는 조선 후기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남별궁이 있었는데, 고종(高宗:1852~1919)이 1897년 황제에 즉위하면서 제국의 예법에 맞춰 환구단을 건설하였다.

1897년(광무 원년) 10월에 완공된 환구단은 당시 왕실 최고의 도편수였던 심의석(1854~1924)이 설계하였다. 환구단은 제사를 지내는 3층의 원형 제단과 하늘신의 위패를 모시는 3층 팔각 건물 황궁우, 돌로 만든 북과 문 등으로 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조선총독부가 황궁우, 돌로 만든 북, 삼문, 협문 등을 제외한 환구단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경성철도호텔을 지었다. 환구단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는 상징적 시설로서 당시 고종 황제가 머물던 황궁(현재의 덕수궁)과 마주보는 자리에 지어졌다.
3층 팔각 건물의 환구단이 도심 속에 어우러졌다.
3층 팔각 건물의 환구단이 도심 속에 어우러졌다. Ⓒ방윤희

1914년 일제는 환구단을 철거하고, 조선철도 호텔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환구단은 사라지고, 황궁우와 석고단만 남았다.

석고는 광무 6년 황제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조형물이다. 세 개의 돌북은 하늘에 제사를 드릴 때 사용하는 악기를 형상화한 것으로 몸통에 용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이 용무늬는 조선조 말기의 조각을 이해하는 좋은 자료로서 당시 최고의 조각 중 하나로 평가된다. 대한제국 역사에서 중요한 이곳은, 우리 도서관 역사에서도 의미 있는 공간이 아닐 수 없다.
세 개의 돌북이 마치 악기를 형상화하고 있다.
세 개의 돌북이 마치 악기를 형상화하고 있다. Ⓒ방윤희

다음 여정은 도심 사거리에 자리한 대관정(大觀亭)으로 불린 공간이다. 대관정은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의 집이었다가, 대한제국 영빈관으로 쓰였다. 경성부립도서관(지금의 남산도서관)이 자리했던 곳이다. 현재는 부영호텔 건립 공사가 한참 진행 중이다.

대관정 터를 지나 도심 한복판을 메우고 있는 근택빌딩 터로 향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근택빌딩이 있던 자리로 근택빌딩은 한국 현대사와 언론사 문학사에서 의미 있는 공간이다. 정지용과 윤동주의 이야기가 깃든 장소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롯데백화점 주차타워로 쓰이고 있다.

다음은 조선총독부도서관국립중앙도서관의 옛터를 찾았다. 1925년 문을 연 조선총독부도서관은 어디에 있었을까? 지금의 소공동 롯데백화점 주차장(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 6번지) 자리에 1923년 11월 30일부터 1974년 12월 1일까지 있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조선총독부도서관의 시설·장서·사람을 승계하여 1945년 10월 15일 개관했다. 도심 한복판에 있던 국립중앙도서관을 남산을 거쳐 반포동으로 이전한 것에는 정치적인 이유도 빼놓을 수 없겠다.
롯데백화점 주차장 자리에 1992년 10월 15일에 세워진 국립중앙도서관의 옛터
롯데백화점 주차장 자리에 1992년 10월 15일에 세워진 국립중앙도서관의 옛터 Ⓒ방윤희

이어 옛 미국문화원(국가등록문화재 제238호)으로 걸음 옮겼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38년 조선에 들어왔던 일본기업 중 하나인 '미쓰이물산 경성지점'으로 지었다. 본래 이 자리에는 1900년대 초 고전주의풍의 미쓰이 지점 건물이 서 있었는데 그 건물을 허물고 지하 1층~지상 4층으로 다시 지었다. 원래는 7층으로 지을 계획이었으나 다 짓지는 못하였다.

이 건물은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화강석과 타일로 외장을 하였다. 건물의 외관은 모더니즘 양식으로 되어 있는데 창 사이의 벽에 주름 장식을 넣었다. 이는 장식을 배제하여 무미건조한 분위기를 보였던 1930년대 국제주의 양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밀랍인형 박물관인 그레뱅 뮤지엄(Grevin Museum)이 문을 열기도 했다.
옛 미국문화원 건물에 여러 이야기들이 켜켜이 쌓였다.
옛 미국문화원 건물에 여러 이야기들이 켜켜이 쌓였다. Ⓒ방윤희

1948년부터 한미정부 간의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에 따라 미국 행정부가 소유하여미국문화원으로 사용하였다. 해방 후에는 미국대사관과 미국문화원으로 쓰이기도 했다. 현재는 서울시가 서울시청 별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1985년 민주화 과정에서 있었던 '대학생 미문화원 점거 농성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다. 서울시청 별관으로 쓰인 이 건물에는 건물의 이름만큼이나 여러 이야기가 앞다퉈 서려 있을 것이다.

다시 향한 곳은 서울시청 신청사 건물 앞이었다. 서울시청 신청사는 건축가 유걸 씨가 설계했다. 호불호가 엇갈리는 현대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신청사 건축으로 내부와 외관 일부가 변경되었고,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새단장 공사를 거치면서 서울도서관과 전시관, 역사관을 갖춘 시민 문화 공간이 조성되었다. 이 건물은 옥탑과 전면 파사드(facade), 현관과 중앙홀 등 주요 부분에 건립 당시의 모습이 잘 남아 있어 당시의 건축 기술 수준을 가늠할 수 있으며, 주변의 덕수궁과 성공회성당, 구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등과 함께 서울 태평로 일대의 역사적 도시 경관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
물결치는 듯한 서울시 신청사의 모습이 펼쳐진다.
물결치는 듯한 서울시 신청사의 모습이 펼쳐진다. Ⓒ방윤희

서울시청 신청사에서 길을 건너 부민관으로 이동했다. 경성부(京城府)가 경성전기주식회사의 기부금으로 지은 건물이다. ’부민(府民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지었다. 지하 1층, 지상 3층 건물로 일제강점기 마지막 의거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국회의사당으로 쓰이다가, 지금은 서울시의회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부민관이었던 서울시의회 건물 앞에서 지난한 도서관의 역사를 음미하고 있다.
부민관이었던 서울시의회 건물 앞에서 지난한 도서관의 역사를 음미하고 있다. Ⓒ방윤희

주교좌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한층 깊어진 총천연색의 가을과 어우러진 건물들을 눈에 넣어두는 것이 즐거웠다. 성공회 서울성당은 ‘주교좌성당’이라고 불린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은 이 성당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35호이다. 영국인 건축가 아서 딕슨(Arthur S. Dixon)이 설계했다. ‘미완성’ 상태로 있다가, 1996년 건축가 김원이 원설계 대로 ‘완공’했다. 1987년 ‘6월 항쟁’이 시작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성공회 주교좌성당이 가을 총천연색을 선사한다.
성공회 주교좌성당이 가을 총천연색을 선사한다. Ⓒ방윤희

골목 사이로 고종의 길이 펼쳐졌다. 아관파천 때,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할 적에 사용한 길로 알려져 있다. 정조를 롤모델로 삼았던 고종은, 규장각을 강화하고 개화 서적을 대대적으로 수집하기도 했다.

중구 정동과 서울시청 일대는 대한제국의 정치와 외교 중심지이자 배움과 나눔을 실천하고, 신문화와 계몽이 시작된 공간들이 자리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쌓인 고종의 길을 걸으며, 고종은 왜 근대화에 실패하고 망국의 군주가 되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정동 근대역사길 역사보행 탐방로에서 특별한 정동 산책을 떠나보자.
정동 근대역사길 역사보행 탐방로에서 특별한 정동 산책을 떠나보자. Ⓒ방윤희

고종의 길을 내려와 둔턱에 둘러 앉았다. 뒷 배경은 러시아공사관이 있던 곳으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의 현장이다. 건축가 사바틴(Afanasuu Ivanovich Scredin-Sabatin)이 설계하였다. 사바틴은 ‘한국 근대도서관 건축가’로도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 1925년부터 1950년까지 소비에트연방 영사관으로 쓰였다.
옛 러시아공사관 터에서 근대화에 실패한 고종의 여운이 감도는 듯했다.
옛 러시아공사관 터에서 근대화에 실패한 고종의 여운이 감도는 듯했다. Ⓒ방윤희

정동길로 접어들어 마주한 건축물은 현재 이화박물관이 있는 이화학당의 옛터이다. 신촌 캠퍼스로 이전하기 전, ‘이화학당(梨花學堂)’이 있던 곳이다. 이화학당은 1886년 미국인 선교사 스크랜튼(Mary F Scranton)이 세운 여성 교육기관이다. 이화학당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축물은 심슨기념관(1915년 등록문화재 제3호로 지정)이다.
최초 근대 여자교육의 시작인 이화학당 옛터에 발자취가 스며들었다.
최초 근대 여자교육의 시작인 이화학당 옛터에 발자취가 스며들었다. Ⓒ방윤희

이곳은 미국인 사라 심슨이 죽을 때 위탁한 기금으로 1915년 이화학당에 세워진 건물이다. 이화학당은 1886년 감리교 여 선교사 스크랜턴이 정동에 있던 자택에 세운 학교다. 1899년 메인 홀, 심슨 기념관, 프라이 홀 등을 지어서 본격적으로 캠퍼스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메인 홀은 한국 전쟁 때 파괴되고 프라이 홀은 1975년 화재로 소실되어, 옛 건물 중에는 현재 심슨기념관만이 남아있다. 이 건물은 지하 1층~지상 3층의 벽돌조 건물로, 6·25사변 때 폭격으로 무너진 부분을 1961년 변형된 모습으로 증축됐다. 이후 2011년 10월 교내에 흩어져 있던 벽돌과 화강석으로 원형을 복원하여, 아치창과 화강석 키 스톤이 경쾌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중앙에 현관과 계단실을 둔 중복도식 구조로, 지금은 이화박물관, 교과교실, 자율학습실 등 다양한 교육 활동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건축물인 구 신아일보 별관 터(2008년 8월 27일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402호로 지정)를 지나자 붉은색 벽돌의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이 모습을 드러냈다. 중명전과 예원학교 일대는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지였다가 1897년에 경운궁(현 덕수궁)을 확장할 때 궁궐에 포함되었다.

경운궁 본궁과 이 일대 사이에 이미 미국 공사관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별궁처럼 고종의 집무실과 거처로 사용했다. 중명전은 대한제국 황실 도서관으로 1899년에 지어졌다. 처음에는 1층의 서양식 건물이었으나, 1901년 화제 이후 지금과 같은 2층 건물로 재건되었다.

중명전 외에도 환벽정, 만회담을 비롯한 10여 채의 전각들이 있었으나, 1920년대 이후 중명전 이외의 건물은 없어졌다. 중명전은 고종이 1904년 경운궁 화제 이후 1907년 강제 퇴위 될 때까지 머물렀던 곳으로,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한 비운의 현장이자 1097년 헤이그특사를 파견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우리 근대사뿐 아니라 한국 도서관 역사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 공간이다.
좌측으로 구 신아일보 별관 터를 지나며 노란 은행나뭇잎이 운치를 더한다.
좌측으로 구 신아일보 별관 터를 지나며 노란 은행나뭇잎이 운치를 더한다. Ⓒ방윤희
한국 도서관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명전의 역사와 마주하였다.
한국 도서관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명전의 역사와 마주하였다. Ⓒ방윤희

다음은 배재학당 동관(2011년 3월 15일 서울특별시기념물 제16호로 지정)으로 사용한 건물이자 지금은 역사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을 찾았다. 서울시 기념물 제16호이며, 배재학당은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1858∼1902)가 1885년 세운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교육기관이며 근대식 중등 교육기관이다.

1984년 배재고등학교가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교실로 사용되었으며 배재고등학교 동관으로 불렸다. 2008년 7월 24일 동관 건물을 새롭게 단장하여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개장하였다. 박물관에는 상설전시관, 기획전시관, 체험교실, 세마나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설전시관에는 1930년대 당시의 배재학당의 교실 모습을 재현했다. 이승만, 주시경, 김소월, 여운형이 배재학당을 다녔고, 서재필은 배재학당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정면으로 바라다보이는 현관(玄關)과 양쪽 출입구의 돌구조 현관이 잘 보존되어 있다.
정면으로 바라다보이는 현관(玄關)과 양쪽 출입구의 돌구조 현관이 잘 보존되어 있다. Ⓒ방윤희

정동 근대역사길을 끝으로 법원도서관이 개관할 때 자리했던 서울시립미술관으로 향했다. 서울시립미술관 건물은, 1928년 경성재판소로 지은 건물이다. 1995년까지 있었으며 일제와 독재시대에 다수의 인권 침해 판결을 내렸던 사법부 지부이다. 해방 후에는 대법원 청사로 사용했다. 현재는 리모델링 공사를 통해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재탄생했다.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오르는 길 바닥 표지석에 법원도서관 터가 새겨져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오르는 길 바닥 표지석에 법원도서관 터가 새겨져 있다. Ⓒ방윤희

이번 기행 마지막 여정은 서울도서관 옥상, 하늘뜰(하늘뜰 동절기 12~2월 미개방)이었다. 옥상에 오를 일이 좀처럼 없었는데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옥상에 오르자 광화문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탐방길에 올랐던 주교좌성당과 근현대사를 담뿍 담고 있는 주변 건축물들이 더 가까이에서 펼쳐졌다.

장장 세 시간 가량의 시간동안 환구단 → 국립중앙도서관 옛터 → 옛 미국문화원 → 부민관 → 주교좌성당 → 고종의 길 → 옛 러시아공사관 → 덕수궁 중명전 →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 법원도서관 옛터 그리고 다시 서울광장의 옛 도서관 길을 가만히 걸어보며 역사 속 그때, 그 날로 스며들었다.
서울도서관 옥상에 오르자 주교좌성당 주변 건축물들의 역사가 눈앞에 펼쳐졌다.
서울도서관 옥상에 오르자 주교좌성당 주변 건축물들의 역사가 눈앞에 펼쳐졌다. Ⓒ방윤희

시설, 책(장서), 사람 이 삼박자가 모여 도서관이 완성되듯 역사의 무대에도 어김없이 도서관이 있었다. 등화가친(燈火可親) 이라고 했다. 등불처럼 잔잔한 노을 빛에 물든 저녁, 화사하게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등지고 앉아, 가만히 책에 귀 기울이는 이 계절, 친구가 되어주는 책이 있어 더없이 좋은 날들이다.
서울도서관 옥상에서 서울의 옛 도서관 길을 걷다 만족도 조사에 참여했다.
서울도서관 옥상에서 서울의 옛 도서관 길을 걷다 만족도 조사에 참여했다. Ⓒ방윤희

시민기자 방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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