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웠던 1637년 그날의 이야기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2.03.02. 14:30

수정일 2022.03.24. 17:01

조회 7,018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19) 삼전도비에 얽힌 사연
신병주교수의 사심 가득한 역사이야기
삼전도비
삼전도비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 잠실 롯데백화점에서 성남 방면으로 가는 대로에 고풍스러운 모습의 비석이 서 있다. 원래의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였지만, 이곳에 삼전 나루가 있었기 때문에 일명 ‘삼전도비(三田渡碑)’라 불리고 있다. 삼전도비의 역사는 1636년 12월 청나라가 조선을 쳐들어왔던 병자호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맞이한 전쟁의 후유증은 너무나 크고도 비참하였다. 국체의 상징인 왕 인조가 친히 오랑캐 황제 앞에서 항복 의식을 할 수 밖에 없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그것도 이전까지 오랑캐라 멸시하던 대상에게 했던 것이니 조선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후폭풍도 컸다. 군신 관계를 골자로 하는 정축화약(丁丑和約)이 맺어졌고, 두 왕자는 인질로 청에 가는 운명을 맞이했다. 여기에 더하여 청나라 황제의 공적을 칭송하는 비문을 작성하라는 청의 요구가 이어졌다. 

굴욕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1637년 1월의 그 날은 왕과 신하, 백성 할 것 없이 조선의 강토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치욕에 떨면서 눈물을 흘린 날이었다. 정축화약이 맺어지면서 청군은 1월 28일부터 포격을 중지하고, 소수의 복병만을 산성 주변에 잔류시킨 다음 주력군들을 외곽으로 철수시켰다. 화의의 방침이 정해진 뒤에도 김상헌, 정온, 윤집, 오달제 등 척화파들은 인조의 출성(出城)을 반대했지만, 1월 30일 인조는 묘시(오전 5시~7시) 무렵 세자 및 대신들과 호위군을 동반하고 서문을 빠져나와 청 태종의 지휘 본부가 있던 삼전도로 향했다. 그날의 비참했던 현장의 모습이 1637년 실록의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성 밖에 와서 상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상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 멀리 바라보니 한(汗)이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휴대한 자가 방진(方陣)을 치고 좌우에 옹립하였으며, 악기를 진열하여 연주했는데, 대략 중국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상이 걸어서 진(陣) 앞에 이르고, 용골대 등이 상을 진문(陣門) 동쪽에 머물게 하였다. 용골대가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 한의 말을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고 하자, 상이 대답하기를, “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 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함께 창(唱)하게 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상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쪽에 앉게 하였다. 대군 이하가 강화도에서 잡혀 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 」

인조는 남한산성의 정문인 남문 대신에 서문으로 나갔고, 왕의 복장도 갖추지 못한 채 남색 군복 차림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해야 했으니, 그야말로 삼전도의 굴욕이었다. 

인조는 땅에 엎드려 대국에 항거한 죄를 용서해 줄 것을 청하였고, 청 태종은 신하들로 하여금 조선 국왕의 죄를 용서한다는 칙서를 내렸다. 그리고 청 태종은 조선의 항복을 받은 이 사건을 영원히 기념하려는 뜻에서 비석을 세우게 한 것이었다. 승전을 돌에 새겨 영원히 기억하도록 한 방식은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의 비면에 ‘대당평백제비명(大唐平百濟碑銘)’을 새기게 한 모습과도 유사하다.

삼전도비에 얽힌 사연

삼전도비의 건립은 청의 일방적인 요구였지만 당시의 정세상 거절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청은 비문 작성을 통해 조선에 대한 확실한 군신 관계를 대외적으로 공표하려 했다. 인조는 특명을 내려 공사를 지시했고, 국가적인 사업으로 비단(碑壇, 비석의 평평한 단) 조성이 강행되어 1637년 11월 3일 비단이 완공되었다. 11월 25일에는 청나라 사신이 비단을 조사하고 만족감을 표시했다. 
비석 뒷면에 공식 명칭인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한자어와 비문이 써져 있다.
비석 뒷면에 공식 명칭인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한자어와 비문이 써져 있다.

삼전도비의 정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서 전서(篆書)로 쓰여 있다. 높이 395 센티미터, 너비 140 센티미터이며, 이수와 귀부를 갖춘 대형 비석이었다. 비의 앞면 오른쪽에는 만주(여진) 문자로 20행, 왼쪽에는 몽골 문자로 20행이 새겨져 있다. 뒷면은 한문으로 글자 굵기 7푼의 해서(楷書)로 새겼다.

삼전도비의 비문의 내용을 누가 쓸 것인지를 두고도 많은 논란이 따랐다. 오랑캐라고 멸시했던 청의 황제를 찬양하는 굴욕적인 글귀를 쓰고 싶은 신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급해진 인조는 이경석, 장유, 이희일에게 비문의 찬술을 명했고, 비문을 검토한 인조는 장유와 이경석의 글을 청나라에 보냈다. 청나라는 비문의 내용에 대해 거듭 트집을 잡았지만, 그나마 이경석(李景奭)이 비문 맨 앞에 ‘대청 숭덕 원년’이라 하여 청의 연호를 먼저 쓰고, ‘삼한에는 만세토록 황제의 덕이 남으리라.’는 표현을 보고 비로소 만족했다. 인조의 간곡한 요청을 받은 이경석은 국가의 안위를 생각하여 청의 비위에 맞추어 비문을 찬술하였지만, 그 치욕감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손을 후벼 팠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경석은 훗날 삼전도비문을 썼다는 이유로 두고두고 거친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특히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이경석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표시했다. 이경석의 삼전도비문을 둘러싼 논쟁은 이후 서인 정파가 노론과 소론으로 분립이 되는 데에도 중요한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즉 이경석의 행위가 의리상 문제점이 많았다는 노론과, 이경석의 비문 찬술이 현실 여건상 어쩔 수 없었다는 입장에 선 소론으로 나뉘게 되는 것이다.

삼전도비는 청일전쟁 후인 1895년 고종의 명으로 강물 속에 쓰러뜨렸으나, 일제강점기인 1917년 조선총독부에서 주관하여 다시 그 자리에 세워졌다. 일제는 우리 민족이 역사적으로 이민족에게 지배받은 사실을 강조하여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 한 것이다. 1945년 광복 후 삼전도비를 없애자는 논의 속에 1956년 문교부에서 다시금 땅속에 묻도록 했다.

그러나 1963년의 홍수로 비석의 모습이 드러나자, 정부에서는 역사의 반성으로 삼자는 의미에서 원래 위치했던 곳에서 조금 동남쪽인 석촌동으로 옮겼고, 다시 송파대로의 확장으로 삼전동의 어린이 놀이터 안으로 옮겨 놓았다. 이후 원래 위치(석촌호수 서호)와 가장 가까운 곳에 설치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면서, 2010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삼전도비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항복 의식을 새겨놓은 비석이라는 점에서 우리 민족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삼전도비는 명분만을 내걸고 수행하는 잘못된 전쟁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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