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에 두 마리의 용, 혜화문에 봉황이 그려진 이유는?

시민기자 양인억

발행일 2022.03.02. 13:00

수정일 2022.03.02. 18:25

조회 1,863

서울을 표현하는 말 중에 ‘성곽도시’라는 말이 있다. 이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한양에 새로운 수도를 정한 후 한양을 둘러싼 백악산(북악산), 타락산(낙산), 목멱산(남산) 그리고 인왕산을 따라 한양도성을 쌓은 덕분이다. 필자는 동대문에서 혜화문을 지나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까지 한양도성 '낙산구간'을 걸으며 동대문의 홍예문, 흐릿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이화마을 등 서울 속 숨겨진 이야기를 찾으며 순성을 즐겼다.

동대문의 통로, 홍예문에 그려진 두 마리의 용

한양도성의 정동쪽에 있어 속칭 ‘동대문’으로 불린 이 문의 원래 이름은 ‘흥인문’이다. 흥인문의 ‘인’은 유교의 5가지 기본적 덕목,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 중 오방(동, 서, 남, 북, 중앙의 다섯 가지 방향)인 동방과 호응하는 '인(仁)'을 문 이름에 넣은 것이다.

현재 동대문 현판은 ‘흥인지문’으로 되어있는데, 실록에 보면 세조1년(1455) 기사에 처음 ‘흥인지문’이 보인다. 흥인문에 ‘지’자를 더한 이유는 동대문과 그 주변 지대가 다른 곳에 비해 낮아 땅의 기운을 돋우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름 뿐만 아니라 태조 6년(1397) 도성을 보수할 때 동대문 앞에 옹성을 새로 조성하여 실질적 보완장치를 마련했다. 때문에 동대문은 한양도성의 성문 중 옹성을 가진 유일한 문이다.

동대문의 통로인 아치 형태의 문(홍예문) 천장에는 화려한 두 마리의 쌍룡이 단청으로 그려져 있다. 용이 동대문에 있는 이유는 사신 중 동방을 나타내는 것이 용(龍)이기 때문이다. 화려한 쌍룡 문양은 옹성 때문에 동대문 앞에서 볼 수 없다. 왼쪽으로 문을 돌아 횡단보도가 있는 곳으로 가는 수고가 필요한데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지금의 동대문 모습은 고종 6년(1869)에 다시 지은 것으로 좌우 성벽은 1907년 잘려 섬처럼 남게 된 것이다.
홍예문 천장에 용 문양의 단청이 있는 이유는 동쪽 방위를 나타내는 사신이 ‘용'이기 때문이다 ⓒ양인억
홍예문 천장에 용 문양의 단청이 있는 이유는 동쪽 방위를 나타내는 사신이 ‘용'이기 때문이다 ⓒ양인억
동대문은 한양도성의 성문 중 문 앞에 옹성을 가진 유일한 문이다 ⓒ양인억
동대문은 한양도성의 성문 중 문 앞에 옹성을 가진 유일한 문이다 ⓒ양인억
동대문의 옹성 우측에 트여 있는 곳으로 출입할 수 있다 ⓒ양인억
동대문의 옹성 우측에 트여 있는 곳으로 출입할 수 있다 ⓒ양인억
동대문 옹성 좌측으로 돌아가면 홍예문 천장의 쌍룡을 볼 수 있다 ⓒ양인억
동대문 옹성 좌측으로 돌아가면 홍예문 천장의 쌍룡을 볼 수 있다 ⓒ양인억
동대문의 원래 이름 흥인문에 ‘지’자를 추가한 것은 낮은 지대에 있는 동대문의 지세를 보완하기 위한 것이다 ⓒ양인억
동대문의 원래 이름 흥인문에 ‘지’자를 추가한 것은 낮은 지대에 있는 동대문의 지세를 보완하기 위한 것이다 ⓒ양인억
동대문 옆의 ‘흥인지문공원'에 있는 성곽길을 따라 가면 옹성이 있는 동대문 구조를 보다 자세히 볼 수 있다 ⓒ양인억
동대문 옆의 ‘흥인지문 공원'에 있는 성곽길을 따라 가면 옹성이 있는 동대문 구조를 보다 자세히 볼 수 있다 ⓒ양인억
동대문 옆의 흥인지문 공원 위로 옛 스러운 성곽길이 이어진다 ⓒ양인억
동대문 옆의 흥인지문 공원 위로 옛 스러운 성곽길이 이어진다 ⓒ양인억
성곽의 안과 밖은 커다란 대문과 소문 이외에도 작은 암문이 있다. 암문을 이용하면 수시로 성 안팎을 오갈 수 있다 ⓒ양인억
성곽의 안과 밖은 커다란 대문과 소문 이외에도 작은 암문이 있다. 암문을 이용하면 수시로 성 안팎을 오갈 수 있다 ⓒ양인억

흐릿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이화동 벽화마을

도성 안쪽을 걷다보면 눈길을 끄는 조각 작품들이 시민을 맞이한다. 낙산구간 순성길을 벗어나 잠시 이화동 벽화마을을 둘러 보는 것도 좋다.

관광객의 지나친 소음으로 지친 원주민들에 의해 많은 벽화가 사라졌지만 거주 공간과 조금 떨어진 곳과 소상공인이 운영하는 공방과 카페 주변에는 여전히 인상적인 작품들이 이화동 벽화마을을 지키고 있다. '신사와 강아지’ 작품은 이화동 벽화마을의 대표 작품이다. 이 작품을 어떤 심정으로 바라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필자에게는 하루빨리 코로나가 진정돼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자는 희망의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이화동 벽화마을 근처에 있는 고양이 조각상 ⓒ양인억
이화동 벽화마을 근처에 있는 고양이 조각상 ⓒ양인억
이화동 벽화마을 근처 소상공인 카페에서 만난 고양이 조각 작품 ⓒ양인억
이화동 벽화마을 근처 소상공인 카페에서 만난 고양이 조각 작품 ⓒ양인억
이화동의 많은 벽화가 사라진 가운데 여전히 남아 있는 천사의 날개 ⓒ양인억
이화동의 많은 벽화가 사라진 가운데 여전히 남아 있는 천사의 날개 ⓒ양인억
신사와 강아지는 이화동 벽화마을의 상징과 같은 작품으로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다가온다 ⓒ양인억
신사와 강아지는 이화동 벽화마을의 상징과 같은 작품으로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다가온다 ⓒ양인억
신사와 강아지를 휴대폰에 담으려는 시민들 ⓒ양인억
신사와 강아지를 휴대폰에 담으려는 시민들 ⓒ양인억
높이 124m의 작은 산, 낙산이지만 서울 동북부를 조망할 수 있는 조망 명소다 ⓒ양인억
높이 124m의 작은 산, 낙산이지만 서울 동북부를 조망할 수 있는 조망 명소다 ⓒ양인억
낙산공원에 있는 암문을 통해 성곽 밖으로 순성길을 이어간다 ⓒ양인억
낙산공원에 있는 암문을 통해 성곽 밖으로 순성길을 이어간다 ⓒ양인억
낙산 구간에서는 한양도성을 쌓은 후 지속적인 보수 작업을 한 조선시대 시기별(태조, 세종, 숙종, 순조)로 다른 축성 흔적을 살펴 볼 수 있다 ⓒ양인억
낙산 구간에서는 한양도성을 쌓은 후 지속적인 보수 작업을 한 조선시대 시기별(태조, 세종, 숙종, 순조)로 다른 축성 흔적을 살펴 볼 수 있다 ⓒ양인억

혜화문의 원래 이름은 '홍화문'이었다?

서울의 동북쪽으로 연결된 혜화문은 속칭 ‘동소문’이다. 이 문이 처음 지어진 태조 5년(1396)에는 ‘홍화문’ 이었다.

홍화문은 성종 6년(1484) 창경궁 신축과 함께 창경궁 동문 이름으로도 사용된다. 근거리에 2개의 문 이름이 똑같아 혼란을 막기위해 중종 6년(1511)에 궁궐보다 격이 낮은 도성문 이름을 개칭, 새로운 이름 ‘혜화문’을 얻었다. 혜화문은 조선시대 여진족 신하가 이용한 문으로 남대문을 이용한 명나라 사신과 차이를 두어 사신이 이용하는 문도 달리한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병자호란 이후 더 이상 혜화문을 이용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사라진 혜화문 문루(문 위에 세운 누각 건물)를 중건한 임금은 영조로 영조 20년(1744)에 문루를 짓고 ‘혜화문’ 편액을 다시 걸었다. 때문에 정선의 그림 '동소문'에는 문루 없는 혜화문이 그려져 있다. 영조가 중건한 혜화문 문루는 일제강점기인 1928년 헐린다. 그도 모자라 1939년에는 전차 선로 건설로 완전히 사라진다. 지금의 혜화문은 1994년 창경궁로 때문에 도로 옆 언덕 위에 복원 된 것이다. 복원된 혜화문 천장에는 봉황이 그려져 있는데 그 유래는 동소문 밖의 숲에 사는 새들로 인한 농사 피해 방지를 위해 새들의 왕 격인 봉황을 그린 것이다.
낙산 구간이 끝나는 부근 빼곡한 집들 사이로 전통 한옥 지붕을 한 건물이 혜화문이 보인다 ⓒ양인억
낙산 구간이 끝나는 부근 빼곡한 집들 사이로 전통 한옥 지붕을 한 건물이 혜화문이 보인다 ⓒ양인억
창경궁로 언덕 위에 복원된 혜화문이 우뚝 서 있다 ⓒ양인억
창경궁로 언덕 위에 복원된 혜화문이 우뚝 서 있다 ⓒ양인억
동대문과 달리 근래 복원된 혜화문은 새 건물처럼 말끔하다 ⓒ양인억
동대문과 달리 근래 복원된 혜화문은 새 건물처럼 말끔하다 ⓒ양인억
안쪽에서 바라 본 혜화문 ⓒ양인억
안쪽에서 바라 본 혜화문 ⓒ양인억
혜화문 천장에는 봉황이 그려져 있다. 봉황의 ‘봉'은 수컷이고 ‘황’은 암컷으로 봉황은 항상 암수가 함께한다 ⓒ양인억
혜화문 천장에는 봉황이 그려져 있다. 봉황의 ‘봉'은 수컷이고 ‘황’은 암컷으로 봉황은 항상 암수가 함께한다 ⓒ양인억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전시실에서 볼 수 있는 겸재 정선의 '동소문'에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혜화문에 문루가 없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양인억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전시실에서 볼 수 있는 겸재 정선의 '동소문'에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혜화문에 문루가 없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양인억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는 1940년대 목조 건물로 대법원장 공관 및 서울시장 공관으로 사용된 건물을 리모델링 한 것이다 ⓒ양인억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는 1940년대 목조 건물로 대법원장 공관 및 서울시장 공관으로 사용된 건물을 리모델링 한 것이다 ⓒ양인억
서울시장 공관에 거주했던 역대 서울시장은 물론 서울시장의 인터뷰 등을 볼 수 있는 2층 전시실 ⓒ양인억
서울시장 공관에 거주했던 역대 서울시장은 물론 서울시장의 인터뷰 등을 볼 수 있는 2층 전시실 ⓒ양인억

한양도성 '낙산구간'

○ 낙산구간 : 혜화문 ~ 흥인지문 (동대문)
○ 거리 : 2.1km
한양도성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시민기자 양인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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