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는 악마의 식물이다?
서울식품안전뉴스
발행일 2016.09.08. 13:45
어릴 적 여름철 비 오는 날 툇마루에 앉아 열무물김치와 함께 어머니께서 쪄주신 감자의 그 맛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감자전, 감자볶음, 감자조림, 감자튀김, 으깬 감자샐러드 등 감자는 우리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친근한 먹거리다.
악마의 식물
‘신대륙’ 아메리카가 발견된 후에 세계로 널리 퍼진 먹거리가 많다. 옥수수, 고구마, 토마토, 고추, 카카오 등이 그렇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감자다. 감자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안데스 산맥 고지대에서 재배되고 있었다. 기원후 1400년 무렵 대제국을 이룬 잉카인들은 여러 품종의 감자를 재배하고 식량으로 삼았다. 1522년 스페인의 피사로가 잉카제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유럽 사람들은 감자를 처음 접하게 됐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땅 속에서 놀라운 속도로 뻗어나가는 감자 줄기와 한 줄기에 여러 개의 감자가 주렁주렁 달리는 모습이 매우 낯설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보지 않으려 했다. “악마가 농간을 부린 식물이다.”, “감자를 먹으면 나병에 걸린다.” 이런 오해와 편견으로 인해 오랫동안 감자는 그저 돼지 먹이 또는 노예나 먹는 비천한 음식으로 여겨졌다. 일례로 1770년 나폴리에 대기근이 닥치자 먼저 감자를 받아들여 식량으로 삼았던 북유럽에서 감자를 나폴리에 구호식품으로 보냈다. 그러나 나폴리 사람들은 배를 곯으면서도 감자를 만지는 것조차 거부했다고 한다. 1774년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기근을 맞아 감자를 심을 것을 명령해도 따르려 하지 않았다. 콜베르크 지방 사람들은 왕에게 상소문을 올려 “개조차 먹지 않으려는 것을 우리가 먹어야 한단 말입니까”라고 호소했다.
감자, 식용작물로 복권되다
유럽인 중에서도 감자에 대한 편견에 맞서 이를 널리 보급하고자 노력한 이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프랑스 군대의 약사였던 ‘파르망티에’다. 그가 프러시아와의 7년 전쟁 동안 포로 생활을 했을 때, 돼지 먹이로 쓰이던 감자가 포로들에게 식사로 제공됐었다. 이 경험을 통해 파르망티에는 감자가 기근을 해결하기에 좋은 식품임을 알게 됐고, 루이 16세에게 감자 보급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에 루이 16세는 군대를 사열하던 땅에 감자를 재배하게 하고 착검을 한 왕실 경비병들로 하여금 감자밭을 지키게 했다. 일요일마다 수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고, 이들은 점차 ‘왕의 군대가 지킬 정도라면 감자가 돼지 먹이로 쓰일 음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리고 경비가 느슨해진 틈을 타 감자를 훔쳐가기 시작했다. 감자를 보급하려는 루이 16세의 계책이 들어맞은 것이다. 1789년 바스티유 감옥이 무너지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날 무렵에는 더 이상 감자를 홍보할 필요가 없었다. 사람들이 너무나 굶주렸기 때문이다.
18세기 말이 되자 독일에서 감자 보급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독일은 기후와 토양이 척박해 밀보다는 호밀과 귀리 등의 곡물을 많이 재배했다. 이 때문에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라는 감자는 중요한 식량원으로 급부상했다. 이후 감자는 빠르게 보급되었으며, 오늘날 감자 없는 독일인의 식탁을 상상하기 어렵게 됐다. 영국도 산업혁명 시기를 거치면서 감자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밀 농사만으로는 폭발적인 인구 증가에 따른 식량난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감자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것은 물론이고 같은 면적으로 두 배나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었다. 감자는 밀로 만든 빵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유럽 서민들의 주식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19세기 말 고흐의 그림에는 호롱불 아래 감자를 먹는 서민 가정의 저녁식사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아일랜드 대기근과 케네디 가(家)
유럽에서 감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나라는 아일랜드였다. 아일랜드는 감자를 재배하는데 최적의 기후와 토양을 가졌다. 게다가 아일랜드를 지배했던 영국의 지주들은 아일랜드 소작농들이 재배한 밀과 옥수수 등 각종 곡식을 강제로 수탈했다. 영국인들의 지배에서 빈곤과 가난을 거듭하던 아일랜드인들에게 감자는 신의 축복이었다. 아일랜드에서 감자는 짧은 기간에 주식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감자는 1에이커의 땅만 있어도 여섯 명의 가족이 일 년 내내 먹을 양식을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감자는 값비싼 오븐 대신에 냄비 하나만 있으면 조리할 수 있었고, 빵을 굽는 것보다 연료비를 아낄 수 있었다.
감자는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효율적인 식용작물이었지만 반대로 사람들을 큰 기근에 빠뜨리기도 했다. 1845년 아일랜드에 감자마름병이 돌아 감자의 줄기가 마르고 알이 까맣게 썩어갔다. 이듬해에는 재배할 씨감자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감자마름병을 일으키는 감자역병균은 겨울에도 죽지 않고 버티다가 봄철에 다시 돌아와 증식을 시작하기 때문에 그대로 놓아두면 일대의 감자밭이 말 그대로 초토화됐다. 이 때문에 5년간 1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굶어 죽었다. 한 영국 언론인은 당시 아일랜드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들의 모습은 인간의 살이 어떻게 뼈와 분리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람들은 밤마다 두려움에 떨었다.
쥐들이 그들의 살을 파먹었고, 다음날 날이 밝으면 많은 수의 사람들이 살점이 떨어져나간 채로 죽어있었다. 아이들의 배는 곧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고, 전염병으로 인해 그들의 몸은 성한 곳 없이 피가 흘러내렸다. 길거리에는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마을은 황폐화되었다. 이곳은 지옥과 다름없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해 이민을 떠난 사람의 수도 130만 명에 이르렀다. 상당수가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케네디 가문의 조상도 바로 이 대기근 시기의 아일랜드 이민자였다. 감자마름병이 없었다면 미국의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이런 상상은 너무 지나친 걸까?
글 : 정한진(창원문성대학교 호텔조리제빵과 교수, <세상을 바꾼 맛>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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