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화살이 꽂힌 조선의 ‘살곶이 다리’

시민기자 박분

발행일 2016.07.11 13:09

수정일 2016.07.11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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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를 등지고 아련히 서 있는 이 석조 다리의 이름은 `살곶이다리`다

한양대학교를 등지고 아련히 서 있는 이 석조 다리의 이름은 `살곶이다리`다.

멀리서보면 다리는 끊일 듯 아련히 이어진다. 멍석을 깔아 놓은 것 같기도 하고 가까이서 보면 접시 위 가지런한 인절미처럼도 보인다. 성동구와 건너편의 뚝섬을 이으며 양편 고층건물이 빽빽한 도심 속 중랑천에 태연자약이 길게 뻗은 이 다리의 이름은 ‘살곶이다리’이다. 토속적 향이 물씬한 다리이름처럼 다리는 한눈에 봐도 그냥 지나쳐버리기에는 아쉬운 끌림으로 다가온다.

조선 초기 세종 2년에 임금행차가 잦은 이곳에 돌다리가 세워졌다

조선 초기 세종 2년에 임금행차가 잦은 이곳에 돌다리가 세워졌다.

성동구 사근동 102번지에 소재한 살곶이다리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석교(石橋)로 매우 가치 있는 유형문화재다. 조선 초기 세종 2년(1420)에 임금 행차가 잦은 이곳에 다리를 놓기 시작해 성종 14년(1483년)에 완공했다. 반석처럼 튼튼하다하여 당시에 제반교(濟磐橋)로 명명했다고 전해진다.

돌로 지어진 살곶이다리는 조선시대 초기에 지어진 유형문화재다

돌로 지어진 살곶이다리는 조선시대 초기에 지어진 유형문화재다.

20대에 직장이 성동구 행당동에 있어 자주 이 부근을 오가다 어느 날 중랑천변에서 살곶이다리와 처음 맞닥뜨렸다. 기억 속 다리의 모습은 무성한 잡풀에 묻혀 교각은 거의 보이지 않았기에 다리는 현재의 모습보다는 꽤 낮은 키였다. 반쯤은 풀섶에 가려진 채였고 다리상판에는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다. 다리를 알리는 팻말도 없었기에 곧 잊혀 졌지만 구들장만큼이나 큰 돌로 엮여진 다리는 견고해 보였고 한눈에 봐도 범상치가 않아 보여 묘한 감흥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있다.

30여 년 전만해도 이곳은 강변으로 버드나무가 숲을 이룰 정도로 우거져 제법 운치가 있었다. 주변 풍광이 예전만큼만은 못하지만 다리를 걷다보면 마음은 어느새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성동교와 지하철 2호선이 살곶이다리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중랑천의 교통수단을 대신하고 있다. 살곶이다리 입구에서 올려다보면 언덕 위로 한양대학교가 보이며 지하철역도 가까워 찾아가기가 쉽다, 이곳은 조선시대 왕의 사냥터와 군사들의 훈련장, 그리고 관마를 기르던 말목장이 있었던 지역이었기에 성동구에서는 걷기대회를 개최해 태조 이성계가 사냥에 나서던 모습을 이곳 살곶이다리 위에서 재현하기도 한다. 다리 인근에 인라인스케이트장과 X-GAME장 시설을 갖춘 살곶이체육공원이 있어 주말에는 청소년들로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우람한 돌기둥이 열지어 선 다리 교각

우람한 돌기둥이 열지어 선 다리 교각

다리 아래로 내려가 보면 당시의 다리축조술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다. 다리 아래 교각은 가로로 놓인 돌기둥이 4열 세로로 22열로 장대하다. 모아이석상을 떠올리게 하는 이 큰 돌기둥들을 어떻게 옮겼을까? 다리를 굳건히 받쳐주고 있는 튼튼한 돌기둥들이 열을 지어 터널을 이룬 모습이 가히 장관이다. 다리 윗부분, 즉 다리 상판 석 줄의 디딤돌을 이고 선 우람한 돌기둥에서는 힘이 넘쳐난다. 다리 위 디딤돌이 어여쁜 색시라면 아래서 이를 굳건히 받쳐주고 있는 튼튼한 돌기둥들은 미더운 지아비에 비유할만하다.

태조가 태종을 향해 활을 쏘았다가 다리에 꽂인 곳이라 하여 `살곶이`라고 불리게 됐다.

태조가 태종을 향해 활을 쏘았다가 다리에 꽂인 곳이라 하여 `살곶이`라고 불리게 됐다.

하지만 살곶이다리가 놓인 이 지역은 지금의 살곶이다리가 주는 외양과는 다른 아픈 역사를 품고 있기도 하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거쳐 태종으로 등극하자 함흥으로 내려가 은둔한다. 신하들의 간곡한 청으로 함흥에서 돌아오는 태조를 태종은 이곳 중랑천에서 맞이하는데 이때 태조가 태종을 향해 활을 쏘았다고 전해진다. 화살은 빗나가 땅에 꽂혔고 그 이후로 이 지역을 화살이 꽂힌 곳이라 하여 화살꽂이에서 살꽂이로 변화를 거치며 ‘살곶이’라는 지명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왕위계승문제로 골육상쟁(骨肉相爭)을 치르며 왕위에 오른 태조와 태종, 부자지간의 애증이 서린 이곳 살곶이에 세워진 돌다리지만 600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다리를 걷다보면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도록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마음 또한 가뿐해진다. 다리 위로 쌩쌩 달리는 차들이 없어서 이기도 하겠고 난간이 없는 다리가 주는 시원함과 돌다리가 주는 질박함이 때문이기도 하겠다.

옛 교각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살곶이다리. 아직 그 모양새가 늠름하다.

옛 교각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살곶이다리. 아직 그 모양새가 늠름하다.

조선시대에 가장 큰 규모의 석교였음에도 다리는 여러 차례 수난을 겪었다.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景福宮)을 중건하면서 살곶이다리의 일부를 가져다가 석재로 사용했다는 설이 있고 일제 때는 다리에 콘크리트 덧칠을 했으며 1920년대에는 서울에 큰 홍수가 나 다리 일부가 물에 떠내려가기도 하는 등 갖은 세파를 겪다 살곶이다리는 점점 원형을 잃으며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그렇게 세월 속에 방치되다 1972년에 서울시가 무너진 다리를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기에 이른다. 무너진 교량을 이었고 2009년에 발굴조사를 거치며 2011년 보물 제1738호로 지정했으니 600여년의 시간을 품은 채 과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던 다리에 대한 면목이 서는 듯하다.

한가롭게 시민들이 살곶이다리를 걷고 있다

한가롭게 시민들이 살곶이다리를 걷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살곶이다리는 중간 부분이 훼손된 채 군데군데 콘크리트로 덧바르는 등 보수한 흔적이 보이지만 아직도 다리는 옛 교각 그대로를 간직한 늠름한 모습이다. 원형보존을 위해 차량과 오토바이 통행을 금지했고 홍수 때에는 시민들의 통행 또한 제한하고 있다. 또한 다리난간이 없음을 우려해 상판 돌 표면을 거칠게 찍어 미끄럼방지를 위한 안전사고에도 대비 했다.

어릴 적 마을 개울가 징검다리는 장맛비에 개울물이 불어나면 떠내려가기 일쑤라 장마가 지면 마음 졸이곤 했었다. 장대비가 그치면 불어난 강물 아래 끄떡없이 버티고 서 있을 살곶이다리를 다시 밟고 싶다.

살곶이 다리 돌틈에 피어난 이름 모를 꽃이 해맑다

살곶이 다리 돌틈에 피어난 이름 모를 꽃이 해맑다

조선시대 왕들과 백성들이 무수히 밟고 지났을 이 다리 아래로 중랑천이 흐른다. 무심한 강물에 살벌했던 이야기도 씻기었을까? 다리 위 돌 틈 새로 피어난 꽃들은 해맑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