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왕' 정세권, 북촌 한옥마을을 만든 이유
발행일 2021.03.08. 13:00
북촌 역사와 한옥 재조명한 '북촌 한옥역사관' 3월1일 개관
북촌에 또 하나의 의미 있는 공간이 문을 열었다. 3.1절 개관한 북촌 한옥역사관이다. 북촌 깊이 들어와 배렴 가옥을 지나고 석정보름 우물에서 골목으로 들어가면 이 작은 집을 만날 수 있다.
종로구 계동4길 3, 석정보름 우물 골목에 북촌 한옥역사관이 문을 열었다. ⓒ이선미
넓지 않은 공간에 아담하게 들어앉은 역사관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섰다. 문득 옛 ‘조선집’에 들어선 것 같기도 했다. ‘한옥역사관’이라고 했지만 사실 이 집의 주인공은 ‘건축왕’ 기농 정세권이다.
공공한옥을 리모델링해 문을 연 북촌 한옥역사관 ⓒ이선미
마당에 들어서면 유리창을 스크린 삼아 ‘영화로 보는 조선집’이 상영되고 있다. ⓒ이선미
열체크를 하고 QR코드를 확인하면서 테이블에 놓인 방명록을 보았다. 빼곡하게 가득한 방명록에 문득 울컥해지는 글이 있었다.
“항상 빈손으로 세상에 왔다고 생각하며 슬퍼했는데, 오자마자 나라를 갖게 된 건 많은 분들의 희생 덕분이라는 걸 깨닫고 갑니다! 수저 한 벌과 우리말사전을 두고 가신 선생님처럼 저도 좋은 것, 소중한 걸 남기고 빈손으로 갈래요! 정말 좋았습니다.”
“항상 빈손으로 세상에 왔다고 생각하며 슬퍼했는데, 오자마자 나라를 갖게 된 건 많은 분들의 희생 덕분이라는 걸 깨닫고 갑니다! 수저 한 벌과 우리말사전을 두고 가신 선생님처럼 저도 좋은 것, 소중한 걸 남기고 빈손으로 갈래요! 정말 좋았습니다.”
열체크와 QR코드 확인을 거치고 역사관으로 들어섰다. ⓒ이선미
문을 연 첫 날, 북촌 나들이를 왔다가 우연히 들렀다는 세 여고생 가운데 한 학생이 쓴 인사였다. 그 여고생들은 ‘소름 돋는다’고 소감을 전했다고 한다. 여태 전혀 몰랐던 이야기들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가진 돈 다 내어놓고, 자신이 가장 잘 하는 일로 일본의 폭력에 저항한 정세권. 떠난 자리에 말 그대로 수저 한 벌 남았다는 선생을 우리는 너무나 뒤늦게 기억하고 있다.
역사관에서 만나는 기농 정세권 ⓒ이선미
부끄러운 일이지만, 필자 역시 북촌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 창덕궁 가까운 곳이니 당연히 양반들의 부유한 집들이려니 생각했다. 정세권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북촌의 한옥이 고관대작의 오래된 집이 아니라 일제의 잠식을 막기 위한 놀라운 비폭력 저항의 결과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사실 필자도 그때 소름이 돋았다.
한옥역사관 담당자가 시민들에게 정세권의 한옥 사업 등을 안내하고 있다. ⓒ이선미
한옥역사관의 전시는 북촌-민족문화의 방파제, 전통한옥과 도시형 한옥, 기농 정세권 등 세 개의 주제로 구성되었다.
북촌, 민족문화의 방파제
1920년대 들어 일제는 한양 남쪽에 살고 있던 일본인의 생활권을 북쪽으로 옮기고 있었다. 이에 맞서 정세권은 '일본인들이 종로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는 신념으로, 익선동을 시작으로 지금의 북촌마을인 가회동, 삼청동 일대를 조선집 마을로 만들었다. 그가 세운 ‘건양사’는 성북동, 혜화동, 창신동, 서대문, 행당동 등지로 조선집을 확대했다. 그의 사업은 경제적인 것이었지만 더 중요한 건 문화적 의미였다. 조선집은 비록 국권은 침탈되었으나 일상을 지켜내고 있다는 위로이자 자긍심이기도 했다.
정세권의 한옥 사업은 일제로부터 경성을 지켜내는 ‘민족문화의 방파제’가 되었다. 사진은 1951년 9월 촬영한 서울 한옥마을 풍경 ⓒ이선미
전통한옥과 도시형 한옥
정세권이 지은 집은 전통적인 한옥과 여러 면에서 달랐다. 우선 기존의 양반집을 5, 6개로 쪼개 도시형 조선집을 지었다. 지금의 도시재생과도 비슷한 시도였다.
집을 짓는 재료도 달랐다. 전통 한옥은 기둥과 대들보, 서까래 등 크고 좋은 목재를 사용해 세심하게 다루는 과정을 거쳐 지었다. 반면에 이 새로운 집들은 규격화된 목재를 사용해 비용을 절감하고, 서까래 길이를 짧게 해 처마 길이는 줄이는 대신 함석 차양을 달아 비바람과 햇빛을 피하게 했다.
집을 짓는 재료도 달랐다. 전통 한옥은 기둥과 대들보, 서까래 등 크고 좋은 목재를 사용해 세심하게 다루는 과정을 거쳐 지었다. 반면에 이 새로운 집들은 규격화된 목재를 사용해 비용을 절감하고, 서까래 길이를 짧게 해 처마 길이는 줄이는 대신 함석 차양을 달아 비바람과 햇빛을 피하게 했다.
한옥역사관에서는 정세권의 ‘조선집’을 자세하게 알아볼 수 있다. ⓒ이선미
한옥역사관에서는 정세권의 ‘조선집’을 살펴볼 수 있다. ⓒ이선미
조선집 짓기, 조선물산운동, 조선어학회 지원까지
그가 한옥을 지어 ‘집장사’만 한 것은 아니다. 1920년 시작됐다가 한풀 꺾여있던 조선물산장려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소비중심 운동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조선물산 생산자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조선물산 생산과 소비를 장려하며 기관지를 발행했고, 낙원동에 조선물산장려회관을 지을 땅을 기부하고 건물을 올리기도 했다.
정세권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조선집 짓기, 조선물산운동, 신간회 지원 등을 거쳐 그는 조선말(한글)에 주목했다. 당시 일제는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우리말과 한글을 탄압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조선어사전’ 편찬에 들어간 조선어학회에, 맘 놓고 일할 수 있는 2층 양옥을 지어 기증한 것도 바로 그였다. 정세권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이듬해에는 대부분의 재산을 몰수당했다.
정세권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조선집 짓기, 조선물산운동, 신간회 지원 등을 거쳐 그는 조선말(한글)에 주목했다. 당시 일제는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우리말과 한글을 탄압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조선어사전’ 편찬에 들어간 조선어학회에, 맘 놓고 일할 수 있는 2층 양옥을 지어 기증한 것도 바로 그였다. 정세권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이듬해에는 대부분의 재산을 몰수당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인사들의 단체 ‘십일회’ 사진. 첫 번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정세권이다. ⓒ이선미
늦었지만, 정세권을 기억하는 공간이 북촌에 마련되어 참 반갑다. 우리 역사에도 이토록 자랑스럽고 고마운 이들이 여럿 있었다. 그런 역사를 알아가는 건 우리의 자긍심을 키우는 데도 중요한 요소다. 학생들이나 청년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북촌에 가시거든 작지만 뜨거운 이 집을 찾아가보시라. 북촌에도, 익선동에도 정세권의 아름답고 고마운 헌신이 배어 있다.
옛 기억과 오늘날이 어우러져 더 멋진 북촌 풍경 ⓒ이선미
■ 북촌 한옥역사관
○ 주소: 서울시 종로구 계동4길 3
○ 운영시간: 매일 10:00~18:00, 월요일 휴무
○ 문의: 02-747-8630
○ 운영시간: 매일 10:00~18:00, 월요일 휴무
○ 문의: 02-747-8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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