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과 함께, 운현궁에서 서울역사박물관까지
발행일 2018.01.08. 10:51
종로구 운니동에는 서울특별시 사적 제257호가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소나무를 재료로 건설한 후 단 한 번의 훼손이나 화재도 없이 150년 동안 본래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운현궁이다.
흥선대원군(이하응)과 운현궁 관련 유물 8,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이 연말연시를 맞이하여 대원군과 운현궁에 얽힌 역사와 유물 이야기를 한 곳에서 둘러볼 수 있는 특별한 전시회를 마련했다.
특별전 ‘운현궁_하늘과의 거리 한 자 다섯 치’는 1863년 고종 즉위부터 청나라 유폐기, 1898년 흥선대원군의 상장례까지 그의 생애와 시선을 따라 운현궁에 담긴 역사와 유물을 만날 수 있는 기회다.
“하늘과의 거리 한 자 다섯 치”라는 글귀처럼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왕도 정치에 대한 야망과 권력의 상징이었다. 국왕인 고종보다 더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시절의 운현궁의 노안당(老安堂), 명성왕후가 가례를 치른 노락당(老樂堂), 권력을 내려놓은 뒤 노년을 보낸 이로당(二老堂)과 운현궁의 재정 등을 흥선대원군의 회고로 재구성하였다. 또한 흥선대원군이 청나라 보정부(保定府)로 유폐되어 지냈던 시기도 최초로 소개한다.
흥선대원군 정치권력의 산실 ‘노안당’
‘아들이 임금이 되어 좋은 집에서 노년을 보내게 되어 흡족하다’라는 뜻의 노안당은 1864년에 건립되었다. 대원군은 이곳에서 통치체제 재정비, 경복궁 중건, 서원철폐, 호포제 등 개혁정책을 펼쳤고, 집권과 실각을 반복할 때에는 묵란(墨蘭, 수묵을 사용한 난초그림)를 치며 마음을 달래던 예술적 공간이다. 추사 김정희(金正喜)로부터 서화를 익힌 대원군의 묵란은 30대에 조선의 제일이라는 극찬을 받았을 정도였다. 마지막 임종을 맞은 곳도 노안당이니 그야말로 대원군의 삶이 온전히 담겨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노안당의 현판은 대원군이 존경했던 스승 추사 김정희의 작품이다. 노안당을 완공하고 스승에게 현판글씨를 부탁하고 싶었으나 이미 저승으로 간 스승에게는 부탁할 수 없어 추사가 생전에 남긴 목판글씨를 모아 “老安堂”이라는 현판을 만들었다고 한다. 스승에 대한 대원군의 존경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명성왕후 가례를 치른 ‘노락당’
‘아들이 왕이 되어 노자(老子, 대원군 자신)는 즐겁다’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노락당(老樂堂)’, 노안당과 같은 해 건립되었다. 이곳은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의 생활공간이자, 명성황후가 궁중 예법과 가례 절차를 익히고, 1866년 3월에 고종과 가례를 치른 의례 공간이다. 고종은 운현궁에서 친영례(親迎禮, 왕이 왕비를 모시고 가는 의식)를 마쳤다. 당시 창덕궁으로 환궁하는 행렬에는 총 2,430여 명의 인원과 690여 필의 말이 동원되는 등 역대 왕 중 가장 성대한 규모였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고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高宗明成皇后嘉禮都監儀軌)’(보물 제1901-2호, 장서각 소장)을 통해 가례 절차와 내용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권력을 내려놓은 뒤 노년을 보낸 ‘이로당’
노락당과 더불어 운현궁의 안채 역할을 하던 건물로, 1869년에 지어졌다. 대원군과 부인 민씨를 지칭하여 ‘두 노인(二老, 이로)을 위한 집’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이로당(二老堂)은 권력을 내려놓은 대원군과 부대부인의 노년 모습이 담긴 장소이다. 이 전시공간에서는 '송수구장십첩병풍'이 최초로 공개되었다. 장남 이재면이 1891년 회혼(回婚)을 맞이한 흥선대원군 부부의 장수를 비는 아홉 악장을 비단에 써서 올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 보정부(保定府)에서 유폐되어 지냈던 시기를 최초로 소개한다. 지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흥선대원군의 고독한 유폐 생활 모습이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와 손자 이준용의 생일 선물로 그려 보낸 묵란화, 유폐 생활 기록인 ‘석파잡기(石坡雜記)’ 등을 통해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특히 열다섯 살 성년이 된 맏손자 이준용(李埈鎔, 1870~1917)을 사랑하는 할아버지의 따뜻한 감정이 담긴 석란도(石蘭圖)의 화제도 챙겨보면 좋겠다.
운현궁의 재정 운영과 수입 등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운현궁의 재정’
이번에 전시된 ‘통조수지(統照須知)’는 1889년 1월부터 1892년 1월까지의 운현궁 재정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한 회계 장부다. 이를 통해 운현궁의 수입과 지출 등 세부 명세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다. 운현궁은 지대 수취에 국한하지 않고, 저수지나 보의 소유권을 통해 농민들에게 매년 물세도 받았다. 또한 호조나 선혜청으로부터의 정기적 이전, 국왕을 비롯한 왕실로부터의 하사 등 다양한 수입원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운현궁에서도 일반 사가(私家)와 마찬가지로 등잔(燈), 소금(鹽), 식초(眞醋), 기와(常瓦), 이불(衾) 등을 구입하였으며 사치품이라 할 수 있는 녹용(鹿茸), 약초와 인삼(藥, 蔘) 등의 내역도 찾아 볼 수 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흥선대원군도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다. 부대부인이 1897년 12월 16일(음력) 운현궁 이로당(二老堂) 동쪽 온돌방에서 먼저 세상을 떠나자 운현궁에 예장청(禮葬廳)을 설치하여 상장례를 주관하던 대원군, 그 역시 1898년 2월 2일(음력) 노안당(老安堂)에서 79세로 훙서(薨逝)한다. 이에 부대부인과 흥선대원군의 상장례는 동시에 진행되었다. 79세 죽음에 임해서도 대원군은 여전히 의관을 착용하고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전시된 예장청등록(禮葬廳謄錄)란 책을 통해 상장례에 관한 의식, 절차 등을 세부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또한 서울역사박물관이 최근 운현궁으로부터 기증받은 임인진연도병풍(壬寅進宴圖屛風)도 눈길을 끈다. 1902년 망육순(望六旬, 51세)이 된 고종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것을 기념하여 경운궁에서 열린 궁중행사를 그린 병풍이다. 기로소는 조선시대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서를 말한다.
역사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대학생 K군은 “운현궁과 흥선대원군에 대한 역사와 유물을 시대적 흐름에 따라 정리되어 볼거리가 풍성했고 특히 귀중한 현판들을 직접 볼 수 있어 좋았다”고 하였다.
이번 흥선대원군과 운현궁에 대한 전시는 역대 최대의 컬렉션이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전시하기 전에 운현궁(雲峴宮)을 먼저 방문하라고 권하고 싶다. 전시물을 둘러볼 때 운현궁의 생생한 모습이 오버랩되면 보다 실감나는 관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역사박물관 특별기획전, ‘운현궁_하늘과의 거리 한 자 다섯 치’는 2018년 3월 4일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 ‘운현궁, 하늘과의 거리 한자 다섯치’ 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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