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파독 간호사들 이야기

시민기자 박분

발행일 2017.08.23. 11:43

수정일 2017.08.23.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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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 간호사의 간호복과 의료용품 ⓒ박분

파독 간호사의 간호복과 의료용품

“엄마, 제가 돈 벌어서 꼭 빚 갚아드릴게요.”

“누나가 너희들만은 꼭 대학에 보낼 테니 조금만 기다려.”

가정형편이 어려워 동생들을 대학에 보내려고, 혹은 더 넓은 세상을 보고자 반세기 전 독일행을 택했던 한국 여성들이 있었다. 1960~70년대 한국을 떠나 머나먼 나라, 독일에 진출해 새 삶을 일군 한국 간호 여성들이다. 독일로 떠날 무렵 20~30대의 젊었던 그들은 어느덧 고희를 넘긴 반백의 모습으로 독일 교민 1세대를 이뤘다.

“조국과 독일, 두 개의 뿌리가 있어 잘 버틸 수 있었다”고 털어놓는 그들이 그동안 펼쳐 놓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전시회에 풀어 놓았다.

<국경을 넘어 경계를 넘어 – 독일로 간 한국 간호 여성들의 이야기> 기획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을 찾아갔다. 우리에게는 ‘파독 간호사’로 더 잘 알려진 한국 간호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가족들을 위해 또 자신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서 머나먼 독일로 건너가 교민 1세대를 형성한 여성들의 삶을 담은 전시회다.

“라인강이며 로렐라이 언덕 등… 무척이나 가보고 싶었던 유럽의 아름다운 나라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독일로 가는 비행기에 앉자마자 눈물부터 주르륵 흘러내렸다.” 한국 간호 여성들은 전시 문구를 통해 이렇게 밝히고 있었다. 사랑하는 부모형제들, 정다운 친구와 고향산천을 떠나 긴 세월을 낯선 나라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했을 것이다.

부푼 꿈을 안고 독일 베를린에 닿은 파독 간호사들은 독일 의료기관이나 요양기관에 취업해 뿔뿔이 흩어졌다. 간호사들이 맡았던 업무는 주사나 투약 등의 업무뿐 아니라 환자 목욕 등 거구의 독일인들을 상대로 한 간병 업무까지 담당해야 했다.

1966년 9월 1일 동아일보에 실린 간호사 모집공고 기사 ⓒ박분

1966년 9월 1일 동아일보에 실린 간호사 모집공고 기사

당시의 간호사 모집공고가 실린 기사도 눈길을 끈다. ‘해외로 꿈 부푼 여성’, ‘벌써 나간 간호원, 국내선 모자라’ 등 파독 간호사가 톱뉴스로 화제가 됐던 것 같다.

간호사들은 어떤 연유로 독일에 오게 됐을까? 한국과 독일의 당시 시대 상황은 어땠을까? 전시는 간호사들이 기증한 간호사 시절의 사진과 육성을 통해 좀 더 내밀한 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1960년대, 제2차 세계대전의 패망을 극복하고 경제부흥에 성공한 독일은 경제 성장과 더불어 의료, 요양 등의 국민복지시스템 분야에 외국인 노동력 유입이 절실했다. 같은 시기에 한국은 경제개발정책을 추진 중이었고 외화 확보가 절실했다. 서로 원하는 바가 잘 맞아 1961년 두 나라는 경제기술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고, 기술협력과 차관 공여와 함께 광부, 간호 인력의 파견이 진행되기에 이른다.

당시 독일 취업은 간호 분야뿐만 아니라 해외에서의 삶을 꿈꾸는 모든 여성에게 선택의 기회였다. 나라가 가난했던 까닭에 가족을 돕겠다는 생각으로 이주를 선택하기도 했지만, 서구문화에 대한 동경과 자신의 미래에 대한 투자, 한국사회의 불평등에 대한 저항 등 여러 이유로 선진국인 독일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고자 했던 여성들도 독일행을 택했다.

파독 간호사 인터뷰 영상을 보고 있는 학생들 ⓒ박분

파독 간호사 인터뷰 영상을 보고 있는 학생들

서울역사박물관 <국경을 넘어 경계를 넘어> 기획전에는 파독 간호사들이 기증한 간호사 시절의 사진들과 육필편지, 증명서 등 50여 년 세월의 흔적이 묻은 120여 점의 자료가 한데 모였다. 독일 남자와 결혼한 딸의 결혼식에 오지 못해 어머니가 정성과 눈물로 지어 보낸 한복도, 딸의 시부모에게 보내는 편지도 보인다. 오매불망 그리웠던 딸을 독일인과의 혼인으로 또다시 멀리 보내야 하는 어머니의 애끓는 마음을 담아 독일인 사돈에게 부친 편지다.

“딸 생각에 8년 동안 흘린 눈물이 몇 동이는 될 것이오. 부족한 게 많은 여식이지만 살기 좋은 독일 나라에서 부디 딸처럼 아껴주시면 그 은혜 결초보은하오리다.”

독일 사돈이 읽지도 못할 한글 편지를, 오죽이나 딸이 그리웠으면, 딸을 향한 절절한 마음이 가슴으로 스민다.

매달 꼬박꼬박 고향집으로 보낸 은행통장 ⓒ박분

매달 꼬박꼬박 고향집으로 월급을 보낸 은행통장

자나 깨나 수없이 읽어 닳고 닳은 독일어 사전과 ‘서독 파견 간호원을 위한 독일어’라는 책은 파독 간호사들이 처음에 언어단절로 겪었을 어려움을 짐작하게 했다. 받은 월급과 고향 집에 매달 꼬박꼬박 보내는 금액을 기재한 독일은행이 발행한 통장도 있었다. 모두가 다 낯선 이국땅에서 발 딛고 살아가는 데 힘이 돼준 것들이리라.

한국간호사들은 성실함과 책임감으로 칭송이 자자했다. 그러나 오일쇼크로 경제적 어려움에 부딪힌 독일 정부가 1973년 한국 간호사들을 대상으로 강제송환 정책을 폈다. 이때 파독 간호사들은 간호복의 소매 한쪽을 뜯어내 완강히 저항했다. 체류권을 얻기 위해 한데 뭉쳐 투쟁한 증표다. 추진력을 얻은 파독 간호사들은 ‘재독한국여성모임’도 결성하여 독일 사회에 더욱 단단히 뿌리를 내리게 됐다. 그들은 소수 이주민이었지만 특유의 강인함으로 체류권을 획득하고, 다양한 정치, 사회, 문화적 경험을 통해 베를린에서 삶을 일구어 나갔다.

파독 간호사들의 목소리를 통해 독일에서의 삶을 들을 수 있다. ⓒ박분

파독 간호사들의 목소리를 통해 독일에서의 삶을 들을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1950년대부터 1976년 간호사의 독일 파견이 공식적으로 중단될 때까지 한국 여성 1만1,000여 명이 서독으로 이주했다. 이 중 많은 이들이 독일에 정착해 간호사로 일했다. 한국과 달리 독일에서는 무료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어 의사, 교수, 예술인, 외교관 등 사회의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기도 했고 다른 국적의 남성들과 결혼해 독일에서 가정을 꾸리기도 했다.

“새해 첫날에 예쁜 한복을 입고 세배를 드리는 엄마의 나라 풍습이 참 좋아요.”

“한글로 쓰시는 일기장을 소중히 다루는 어머니가 존경스러워요.”

금발의 한국 간호 여성 자녀들이 부지런하고 인정 많고 음식 솜씨 좋기로 소문난 한국인 엄마에 대한 자랑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전시 마지막 부분에서는 독일로 이주했던 파독 간호사들이 독일 시민으로 살아가는 현재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사운드박스로 꾸민 전시공간에서는 파독 간호사 2세대들의 인터뷰를 모은 ‘우리 어머니’를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었고 베를린에서의 삶을 사진과 목소리를 통해 들려주고 있었다.

50여 년 전 독일로 이주해 문화적·정치적 경계를 뛰어넘은 파독 간호사들의 자주적인 삶의 모습은 현재 우리들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아울러 한국의 수도 서울이 다양한 국적의 이주민과 더불어 상호 인정의 사회로 잘 나아가고 있는지 되묻게 한다.

가족과 자신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서 머나먼 독일로 건너가 교민 1세대를 형성한 파독 간호사들의 삶을 담은 이 전시는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오는 9월 3일까지 이어진다.

■ ‘국경을 넘어 경계를 넘어’ 전시 안내

◯ 기간 : 6월 27일 ~ 9월 3일

◯ 장소 :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B

◯ 관람료 : 무료

◯ 문의 : 02-724-0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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