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뎌진 칼, 다 갈아드려요"

시민기자 최용수

발행일 2016.02.05. 15:59

수정일 2016.02.05. 17:10

조회 2,969

칼을 갈고 있는 홍남호 회장(좌)과 김영섭 선생(우)

칼을 갈고 있는 홍남호 회장(좌)과 김영섭 선생(우)

“어머, 칼 가시는구나, 하나에 얼마씩 받아요?” “그냥 갈아 드려요”

“그럼 한 집 당 한 자루씩만 갈아주나요?” “아니, 다 갖고 오세요, 갈아드릴게요”

마트에서 돌아오던 기석이 엄마는 칼 가는 광경을 보고는 집으로 종종걸음을 한다. 금방 칼 세 자루를 들고 왔다. 잠시 칼 가는 모습을 지켜보더니 전화기를 꺼낸다. 아파트 부녀회원, 앞집 엄마, 단지 인근에 사는 친구에게까지 얼른 칼 갈러 오라며 전화를 한다. 칼 가는 천막 주위는 금세 칼을 갈러 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칼갈이’가 이렇게 인기 있는 봉사일 줄이야...

가양4단지 아파트에 설치된 칼갈이 작업장 모습

가양4단지 아파트에 설치된 칼갈이 작업장 모습

강서구 가양4단지 아파트 한 구석에는 작업도구를 실은 ‘곰두리케어’ 트럭과 작은 비닐천막 하나가 설치됐다. ‘칼갈이 봉사’를 위해 설치한 ‘곰두리봉사대’의 임시 작업장이다. 오늘 봉사는 홍남호 회장과 김영섭, 황연옥 선생 등 4명이 한다. 홍 회장이 전기 연마기로 무뎌진 칼을 초벌로 갈고 나면, 김 선생이 받아서 부드러운 숫돌에서 꼼꼼히 마무리 한다. 다 갈린 칼로 신문지를 베어본다. “슥~삭~!” 합격이다. 합격한 칼은 황 선생이 건네받아 신문지로 돌돌 감싼다. 칼 주인의 이름을 쓴 다음 천막 한 켠에 정리해 놓는다. 잔심부름은 서호성씨 담당이다. ‘칼갈이봉사대’를 이끌고 있는 홍 회장은 하반신을 전혀 쓰지 못하는 중증장애인이다. 현재 장애인 권익 향상을 위해 ‘장애인먼저 곰두리봉사회’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

칼갈이 봉사활동 중인 홍 회장. 그의 거칠어진 손을 보니 안쓰럽다

칼갈이 봉사활동 중인 홍 회장. 그의 거칠어진 손을 보니 안쓰럽다

칼 갈러온 주민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칼 갈러온 주민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설이 며칠 안 남았는데, 칼이 잘 들면 음식준비가 얼마나 수월한지 몰라, 손목도 안 아프고.” 차례상을 준비해야 한다는 한 주부(58세)의 말이다. 칼과 가위를 8개나 갖고 온 아저씨도 한마디 거든다. “칼은 아무나 못 갈아요. 잘못 갈면 칼을 통째로 망칠 수 있거든.” 중량구에서 봉사 소식을 듣고 일부러 찾아왔다는 곰두리봉사대의 회원은 “홍 회장은 어릴 때부터 기계 일을 하던 아버지 밑에서 기술을 배워서 못 만지는 것이 없어요. 맥가이버라고 보시면 돼요.”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주민들이 칼을 맡기고 있다

주민들이 칼을 맡기고 있다

‘곰두리케어’에서 칼갈이 봉사를 시작한지가 벌써 4년이 되었다. 옛날에는 칼갈이 아저씨들을 종종 만날 수 있었는데, 요즘 서울에서는 정말 보기 어렵다. 어느 날 음식을 하던 아내가 손목통증을 호소하는 걸 보고 칼갈이 봉사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추석과 설맞이 등 1년에 네다섯 차례에 걸쳐 봉사를 해오고 있다. 이번 설맞이 칼갈이봉사는 가양 1, 4, 7단지별로 하루씩 사흘간 진행했다. 한 집에 칼, 가위 5개는 보통이다. 어떤 집은 10개도 가져온다고 한다. 3일간 220여 가구의 칼을 갈았으니 어림잡아도 1,200여 개는 될 것 같다.

손질한 칼은 안전하게 신문지로 싸서 정렬해 둔다

손질한 칼은 안전하게 신문지로 싸서 정렬해 둔다

“시간만 허락하면 아파트 단지마다 돌면서 칼과 가위를 갈아주고 싶어요” 봉사대는 다 해주지 못하는 아쉬움을 한숨으로 표현했다. 사실 이들은 강서구 등촌동의 한 길모퉁이 천막에서 7년째 휠체어, 실버카트(Silver Cart), 자전거 등 수리봉사를 하고 있다. “수시로 장애인과 노인들이 찾아오니 꼼짝할 수가 없다”면서 “휠체어, 실버카드는 장애인과 어르신들에게는 손발과 같아서 바로 고쳐드리지 않으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고 했다. 물론 이곳으로 칼을 가져오면 언제라도 갈아드린다.

칼갈이 작업장에서 휠체어, 실버카트 수리 상담까지 해주고 있다

칼갈이 작업장에서 휠체어, 실버카트 수리 상담까지 해주고 있다

설 명절이 코앞이다.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즐거움보다는 걱정이 더 앞서곤 한다. 이럴 때 잘 드는 칼 몇 자루는 음식준비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설맞이 준비를 하는 시민들에게 칼갈이 봉사보다 더 좋은 선물이 또 어디 있을까? 날씨는 아직까지 쌀쌀함이 가시지 않았지만, 마음은 벌써 훈훈하다.

휠체어, 실버카트를 수리해주는 곰두리케이 비닐천막

휠체어, 실버카트를 수리해주는 곰두리케이 비닐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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